내가 믿는 것은 검 150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56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50화
150. 포섭
집회가 열린 소우든 궁전 내부.
안톤의 등장에 마치 사냥감을 살피는 듯한 맹수의 눈빛들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호오..."
"저 자가 바로 그 소문의 검신인가."
"정말로 젊군."
장내에 한 자리씩 엉덩이를 깔고 앉은 팔대세가의 인물들이 제각기 물건을 품평하듯 읊조렸고, 가우스트는 이를 싹 무시하며 린디아스를 대신해 조르디가를 위해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러길 무섭게, 누군가가 시비조로 말을 걸어왔다.
"외부인을 데리고 오다니 검성, 자네도 이제 사리분별이 힘들 만큼 늙었나 보군."
그는 팔대세가 중 당당히 일석을 차지한 가베스란의 가주로, 천둔검이란 무명을 지닌 사내였다.
그를 필두로 주변의 인물들을 훑어보던 안톤은 내심 탄성을 질렀다.
'역시 소우든인가.'
가우스트까지 포함해, 이곳에만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여섯이나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안톤과 가우스트를 제외하면 명인의 칭호까지 부여받은 자는 없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다.
이 작은 국가에 제국 만큼의 마스터가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마스터들은 전부 팔대세가의 대표 자리에 있는 자들이었고, 대표 중에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들은 대체로 젊었다.
아마 린디아스 공녀처럼 가주 대리로 참가한 자들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안톤이 장내의 구성원들을 살피고 있던 때.
가우스트가 심드렁하게 귀를 파며 입을 열었다.
"늙은 건 자네인 것 같은데... 혹시 요즘 눈이 침침한가? 대체 여기에 외부인이 어디있지?"
그러고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너스레까지 떨어준 후, 천둔검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말을 이어붙였다.
"여기 있는 안톤은 암검의 제자다. 엄연한 조르디가의 일원이지."
말을 마친 가우스트가 동조를 바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이 집회에서 생긴 분쟁을 중재할 권한을 지닌 유일한 이.
바로 소우든의 왕이었다.
"검성. 그대의 말이 옳소."
왕의 한 마디에 둘의 낯빛에 음영이 갈린다.
"자, 이제 국왕께서도 인정해주셨는데, 뭐라곤 못하겠지?"
화색이 돋은 쪽인 가우스트가 이죽거리며 입을 열자, 천둔검도 어쩔 수 없이 이를 바드득 물며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거나 말거나, 안톤은 왕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검국이라 불리는 소우든의 왕이라기에 내심 기대를 했었는데, 예상외로 그는 굉장히 평범했다.
그저 겉모습만 보면 궃은 일 한 번 겪지않고 곱게 늙은 자 같달까.
애초에 체내에서 별 다른 기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예 무술을 익히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소란은 이쯤에서 그만하는 걸로 하고... 이제 슬슬 논의를 시작하겠소."
그런데도 그의 말 한 마디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내에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건, 단순히 소우든의 왕가가 그들 사이에서 엄청난 상징성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검성도 새로이 왔으니 말해드리겠소. 오늘 자리는, 지난 번에 동표로 무산됐던 안건에 대해 마지막으로 의결을 가르기 위한 자리오."
왕의 친절한 설명에 가우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린디아스에게 미리 들어서 알고 있던 정보였다.
앞으로의 전란이 걱정되니 미리 제국과 손을 잡자, 이 안건에 지난 번 의결에서 무려 4명이 찬성을 했고, 다른 4명은 반대를 했다. 참고로 왕은 기권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를 위해 최종적으로 의논할 시간을 드리겠소. 누군가 할 말이 있다면 나서시오."
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둔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먼저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해보시오."
왕의 승낙이 떨어지자 그는 대전 중앙으로 나왔고, 대뜸 양팔을 벌리며 큰 소리로 외치며 이목을 끌었다.
"사실 오늘 의결은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름 없소!"
이미 지난 하루 사이에 암중으로 다른 한 표를 약속 받은 것일까. 그의 태도는 아주 당당했고 자신의 말에 확신으로 차 있었다.
장중의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잠깐의 간격을 두었던 그에게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전 의결에서 반대표를 냈던 쪽에 속해있던 자가 행한 질문이었다.
"어차피 결정이 났다면 그냥 가만 있지, 왜 나선 것이오?"
곱지 않은 말투임은 분명 했으나, 천둔검은 아주 좋은 질문이라는 듯 미소지었다.
"진정으로 소우든을 위한다면 우리 팔대세가가 하나로 뭉쳐야한다 여겼기 때문이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리기로 했소. 그러니 조금은 마음을 열고 지금 내 얘기를 들어줬으면 좋겠소."
그리고나서 그는 한참이나 소우든이 제국과 힘을 합쳐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다.
뭐, 안톤의 귀에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장수의 말처럼 느껴졌지만, 그래도 나름 설득력을 갖춘 웅변이었다.
하지만 그의 설득에는 진실이 없었다. 그저 거짓만 가득한 허울 좋은 말일 뿐이랄까.
"내가 한 마디 드리고 싶소."
열변을 끊으며 안톤이 중간에 끼어들자, 천둔검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무례하군."
"당신의 평가야 아무래도 좋소. 중요한 건 그런 감언이설을 듣느라 시간 낭비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귀중하다는 것이오."
"...지금 날 도발하는 겐가?"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그래서 국왕, 어차피 저 자의 말도 대충 끝났는데 이번엔 내가 말을 해도 되겠소?"
"해보시오."
그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안톤은 더욱 거칠 것 없었다.
좌중을 한 번 쓱 둘러본 안톤이 크진 않았지만 뚜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전란이 북부에서 그치지 않고 남부까지 퍼질 것이란 건 나도 동의하오. 그리고 그 난세 속에서 소우든이 혼자서 버텨낼 수 있을지 너무나 불확실하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고."
천둔검은 앞서 자신이 했던 말에 동의를 하는 안톤을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안톤은 그들의 얼굴을 보며 자신있게 말했다.
"허나 그렇다고 그것이 제국과 협력할 이유는 아니라고 보오."
"합당한 이유를 말해보시오."
국왕의 말에 안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굳이 제국이 아니라도 힘을 합칠만한 다른 국가들이 있소."
안톤의 대답에 천둔검이 참지 못하고 혀를 끌끌 찼다.
"그게 제국과의 협력을 반대하는 이유라고? 뭔가 싶어 잠자코 들었는데 어린 아이의 허황된 소리였군."
"제국과 맞서는 것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소. 허나 당신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는데 어쩌겠소? 제국은 누군가의 수족으로 전락해버린지 오래됐소."
천둔검을 필두로 그와 뜻을 함께하는 대표자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국왕! 들을 필요도 없소이다. 어서 저 미친 놈을 내쫓읍시다!"
천둔검이 그렇게 외쳤으나, 국왕은 잠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은 후 안톤에게 물었다.
"흑막이 따로 있다는 소린가?"
"그렇소. 전쟁을 벌인 것도 그들의 짓이었소."
감히 제국을 제멋대로 부리는 집단이 있다니, 처음 듣는 괴언에 국왕이 입을 꾹 다물었다. 도대체 안톤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화합을 모르오. 오로지 복종만을 원하지. 제국은 물론 여러 국가들이 그들의 손에 넘어갔소. 그리고 지금 소우든도 그러려고 하는 중이지. 지금 이곳에도 벌써 그들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몇몇 섞여 있소이다."
그리고 그들이 누군진 뻔하다는 듯, 안톤이 좌중의 몇몇 인물을 쏘아보았다.
그 시선을 가장 앞에서 받은 천둔검이 검을 뽑아들었다.
"모욕은 참지 않겠다!"
아니, 뽑아들려고 했다.
그가 검자루에 손을 올리는 순간.
쉬이이잉!
아무런 낌새도 없이 나타난 안톤의 대검이 그의 앞섭을 가르고 지나가 목젖 위에 멈춰섰다.
"..."
좌중에 정적이 흘렀다.
이곳에서 가우스트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안톤의 일검이 휘둘러지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것이 명인과의 격차란 말인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후, 처음 맛보는 무력감이었다.
이미 몸이 굳고 등에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천둔검이 소리쳤다. 위기감을 느낀 그는 아주 필사적이었다.
"검성! 설마 자네도 저 미친 놈과 같은 생각인 건 아니겠지? 우리들이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다니, 그게 무슨 망언이란 말인가!"
"네 녀석들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썩은 뿌리는 되도록 빨리 골라내야 하겠지."
가만히 지켜보던 가우스트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천둔검을 따르는 대표들도 검을 꺼내들었다.
채챙!
순식간에 조성된 살벌한 분위기.
자칫 움직였다간 살이 베일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공기가 좌중에 흐르고 있었다.
"대전에서 검을 뽑아들다니, 다들 이게 무슨짓이오? 모두 검을 내리시오!"
국왕이 엄숙하게 호통을 쳤음에도 그 어느 누구도 검을 집어넣는 자는 없었다.
"가만 있어 보시오. 국왕. 금방 내 말을 증명하겠소,:
안톤이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온 패를 꺼내들었다.
"밤 그림자."
팔찌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펠샤인이 등장했다.
장중의 인물들이 그녀의 미모를 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저 여인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 사태를 진전시킬 것이 분명했기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안톤이 서두없는 물음을 그녀에게 보냈다.
"몇명이오?"
"우두머리로 치면 셋. 떨거지들까지 더하면 열 다섯이네요."
"좋군."
펠샤인이 손으로 인물들을 하나씩 찝었다.
그녀의 여린 손가락이 누군가를 가리킬 때마다 의심과 경악의 눈초리가 그들을 향했다.
"이 자리서 피를 보자는 것으로 듣겠소."
천둔검이 가주로 있는 가베스란 가를 선두로, 지목된 대표의 가문 출신 검객들이 뭉쳤다. 퀼런과 호르안 가문이었다.
예상과 달리, 그들과 같이 찬성표를 던졌던 마르멀론 가는 펠샤인의 지목을 받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순전히 설득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나 한 명 잡아와요."
펠샤인의 읊조림에 안톤의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됐다.
세뇌를 풀었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킬 자, 가베스란 가의 가주 천둔검이었다.
"다치게 하진 않겠소."
휘이잉!
안톤의 검이 빠르게 찔러졌고, 이를 막기위해 휘둘러진 그의 검이 중간을 가로막으며 산산조각이 나 흩뿌려졌다.
그러면서 생긴 짦은 틈새 속에서 안톤은 재빨리 천둔검의 혈도를 짚었다.
"읏...!"
이름 높은 팔대세가 중 일문의 수장이기도 한 그가 겨우 한 수에 제압이 되어버린 모습을 보며, 좌중의 인물들은 그들이 혈도가 짚인 것도 아닌데 덜컥 몸이 굳었다.
"부탁하겠소."
빳빳하게 몸을 세운 천둔검에게 펠샤인이 다가가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오며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갔고, 그것은 상당한 시간 동안 계속 됐다.
그 동안에도 안톤과 가우스트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다 끝났어요."
생각만큼 쉬운 작업은 아니었는지, 펠샤인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고생했소."
그런 그녀를 향해 감사의 눈빛을 보낸 안톤이 천둔검의 앞에 섰다.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끝났는지, 혼란의 빛이 가득한 그의 동공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도 제국을 돕고 싶소?"
안톤의 질문에 여럿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질문의 대답이 어떠한지에 따라 이 사태가 또다시 역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 나는, 아니야... 그건 내가 아니었소. 그들이 날 그렇게 만들었소."
천둔검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자,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피어났다.
"정말이었다니..."
"큰일 날 뻔 했군."
안톤이 벌인 짓에 끼어들지 않고 지켜보던 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긴가민가하던 사건에 답이 나왔으니, 그들로서도 가만 있을 수는 없던 것이다.
펠샤인이 지목했던 인물들의 주변에 순식간에 포위망이 펼쳐졌고, 이는 모든 사태가 종료될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