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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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46화
146. 동맹
그것은 연회라기보다는 그저 뜻잇는 사람들끼리 모여 담소를 나누던 식사에 가까웠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탁 위에서 술이 한 두잔 오가며 쉴 새 없이 대화가 이어졌고, 안톤은 거기서 대략적인 대륙의 정세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펭 제국과 성국, 지아누와 츠레이바, 그리고 베노에까지. 이렇게 5국가가 블라디미르의 손에 넘어갔다고 보면 되겠군."
이를 듣던 카린이 고갤 끄덕이며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네. 그리고 레노테이르와 그레일시아를 첫 제물로 삼았죠. 아마 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거에요."
"그리고 그 이후엔 필시 우리들 차례겠지."
클린턴의 적절한 호응에 카린이 시원시원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동맹군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해요. 아무래도 우리들만으로 그들과 대적하기엔 현실적으로 무리니까요. 아마 그레일시아나, 레노테이르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내민 손을 거절치 못할 거에요. 전쟁의 직격탄을 맞은 건 그쪽이니까. 우리의 제안은 동앗줄 같겠죠. 그러니 지금은 그 외의 후보들에 대해서만 말할게요."
카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에 펼쳐져 있던 대륙 지도로 다가갔다.
"현재 중립 상태를 지키고 있는 국가는 총 네 곳이에요. 갠드와 볼-메이르, 그리고 록티아와 소우든이죠. 그리고 위치상 동맹 체결이 불가한 갠드와 볼-메이르를 빼면 오롯이 두 개만이 남아요."
"왜 볼-메이르를 빼려는 거죠?"
내내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펠샤인이 카린의 설명에 딴지를 걸고 나섰다.
억양도 그렇고, 질문의 내용도 그렇고. 누가봐도 트집을 잡으려 드는 듯한 물음이었다.
카린이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다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여기 지도만 봐도 알지 않나요? 볼-메이르는 우리들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해린에과는 완전히 반대편에 위치한 국가에요. 설령 운 좋게 동맹을 맺는다 해도, 혼자 고립되어 있는 형세니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곧바로 무너지고 말겠죠."
논리정연한 카린의 설명이 끝이 났지만, 펠샤인은 그저 태연자약하게 턱을 짚더니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흐음. 그럼 무너지면 되겠네요."
그 말에 카린은 속에서 열불이 치솟는 걸 겨우겨우 도로 삼켜냈다.
블라디미르와 대적하기 위해 용의 현자로서의 그녀가 지닌 능력은 거의 필수였기에 마냥 화부터 내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후우... 그들이 바보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와 동맹을 맺으려 하겠어요?"
그래도 최대한 좋게 말한다고는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은연중 짜증이 묻어나 있었다.
이를 듣던 펠샤인이 기다렸다는 듯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카린이 있는 옆으로 다가가 지도 위에 컵을 올렸다. 볼-메이르가 위치한 곳이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요. 볼-메이르는 제 손바닥 안에 있거든요."
그런 펠샤인의 행동에 장중의 모두가 눈에 의아함을 띠었다.
오직 단 한 명, 안톤만을 빼고 말이다.
이곳에서 안톤만이 그녀의 말을 허황되다 생각치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안톤은 전생에 용의 현자 앞에 붙은 또다른 수식어를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자였다.
'볼-메이르의 용의 현자.'
정신 조작 마법으로 한 국가를 송두리째 지배한 미치광이.
'설마 벌써 그 작업이 끝이 났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아무튼 전생의 기억을 알고 있는 안톤은 예외였지만, 대체로 장중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다들 그것만으론 신뢰할 수 없다는 눈초리를 그녀에게 쏘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펠샤인은 그런 시선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믿든 말든 상관은 없어요."
그리고는 이 한 마디만 남기고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새침하게 앉았다.
이를 지켜보던 카린이 기가막힌 듯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그게 사실이라고 쳐도 한 나라를 그냥 버림패로 쓰자니..."
그녀로서는 펠샤인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몹시 비인도적으로만 들렸다.
물론 전쟁이라는 것이 사사로운 정에 얽메여선 안 된단 것 정도는 그녀또한 알지만, 암만 그래도 저건 너무 도가 지나쳤다.
허나 모두가 카린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 대표격인 인물로는 클린턴이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는 전제 하의 얘기지만, 정말이라면 일단 감추어두다가 나중에 비장의 수로 쓰는 게 좋겠네. 만약 중요한 순간에 그들이 적의 배후를 쳐 줄 수 있다면 아주 큰 전력이 될 것이란 것 만큼은 분명하니 말일세."
클린턴의 냉철한 말에 카린은 반박할 수 없었다.
심정적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니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이성은 그와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이성과 감정의 충돌로 머리가 아파진 카린은, 굳이 이 고민을 벌써부터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이 안건은 보류해 놓도록 하죠. 사실 확인을 하고서 고민해도 늦지 않을 문제이니까요."
"옳바른 판단이네."
"그럼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펠샤인이 느닷없이 존재감을 드러내며 딴길로 샜던 이야기가 다시 원래의 경로로 돌아왔다. 카린은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를 손가락질하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 록티아와 소우든, 이 두 국가가 현재 우리들과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가장 효과적인 동맹이 가능하다는 게 제 견해에요."
"소우든은 그렇다 쳐도, 록티아라..."
그녀의 말을 듣던 안톤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가 보기에 록티아가 동맹군에 합류할 확률은 극히 미비하다 여겨졌다.
짧은 시간 동안 겨우 몇몇과 만나본 것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사고 방식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었달까.
"그들은 결코 그랜드 게이트 밖으로 나와 난세를 겪으려 들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이에 대해선 카린 또한 알고 있었는지 곧바로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어떻게든 그들을 끌어낼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죠. 아직까지 눈에 띠는 성과는 없지만... 그래도 조사하던 중에 이렇게 용의 현자에 대한 정보도 알게 되었으니 쓸모 없는 짓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아,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그만 딴 길로 새버렸군요. 흠흠!"
한 번 목을 가다듬은 카린이 장중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소우든을 설득하는 건 비교적 쉽다고 봐요. 아무 연고도 없는 록티아완 달리, 안톤과 십이가문 중 하나인 조르디가는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까요."
"으음..."
장중의 시선을 맞게 된 안톤이 침음을 흘렸다.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카린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와 조르디가는 그리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혹시 뭔가 달리 생각해둔 방법이 있는가 싶어 안톤은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조르디가로 가서 직접 설득하면 되나?"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안 그래도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거든요. 내일 그쪽에서 사람이 올 거에요. 근래 들어 유명세를 떨치는 분인데, 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
문득 카린의 눈에 안광이 어렸던 것은 그만의 착각이었을까.
안톤이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넬-린디아스 조르디."
"아! 공녀가 사절로 오기로 했소?"
"네. 당신에 대한 얘기를 듣더니 당장에 오겠다고 하더군요. 이제보니 당신은 참 인연을 맺은 여인이 많은 것 같네요. 혹시 그분들한테도 그렇게 인연을 강조했던 걸까요?"
"..."
어째선지 한기가 절절하게 흐르는 목소리에, 안톤은 손 아귀에 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 * *
그들만의 작은 연회는 밤 늦게까지 이어졌다.
그 동안 계속 진지한 얘기들만 하면서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미래에 관한 이야기들이 일단락 되자, 그들은 각자의 지난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댔다.
그리고 안톤은 굉장히 즐거운 마음으로 이를 경청했다.
원래 선천적으로 본인의 얘길하는 것보다 듣길 좋아하는 안톤이었다.
"그럼 날이 늦었으니 이쯤에서 자리를 끝내는 게 좋겠소."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끝나는 시기가 있기 마련.
주최자라 할 수 있는 핫산의 말을 끝으로, 다들 내일을 기약하며 자리를 파하고선 각자의 잠자리로 향했다.
"안톤. 그대는 전에 있던 그 별채에서 지내게나. 언제 자네가 돌아올지 몰라서 늘 비워뒀었네."
"신경 써줘서 고맙소."
그렇게 안톤과 펠샤인, 그리고 카린까지 총 셋이 함께 별채로 향하게 되었다. 안톤 혼자가 아니라, 이렇게 셋이 함께 가게 된 경위에는 일련의 사건이 존재했다.
왕궁 내에 따로 본인 소유의 별채가 있음에도, 펠샤인이 일전의 안톤과 했던 호위 약속을 꺼내들며 같은 공간에서 지내기를 희망했고, 그러자 귀빈실에서 3년 간 잘 지냈던 카린도 갑자기 둘만 둘 수 없다며 함께 머무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나는 잠시 오라버니랑 할 얘기가 있어서 다녀올게요. 굳이 따라올 필요는 없어요."
"그러시오."
별채에 도착하고 펠샤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면서 안톤은 카린과 단 둘이서 남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생겼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안톤이었다.
"다들 성장한 모양이더군. 물론 그 중에서도 최고를 뽑자면 당신이고 말이야. 블루머챈트의 수장이 된 것,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하오."
"에이, 축하는요. 당신이 없었다면 훨씬 오래걸렸을 텐데."
"그래도 못했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는구려."
"글쎄요. 겪어보니 겸손이 꼭 미덕인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카린이 농담을 섞으며 배시시 웃음을 내지었고, 안톤도 따라서 쾌활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맞는 말이긴 하오. 근데 그래도 실질적으로 이 개성 넘치는 사람들을 한데 모은 것이 당신이지 않소. 나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오. 정말로 대단한 일을 해주었소."
그런데 아깐 겸손은 미덕이 아니라더니, 안톤의 진심어린 칭찬에 카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안톤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뭐가 대단하겠어요. 사실 그 사람들의 중심은 당신인 걸요. 그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당신이란 공통점이 있었기에 모일 수 있었어요."
"...사람을 머쓱하게 만드는데도 재주가 있는진 몰랐군."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이 사람의 진심을 이끌어내는것에 소질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저도 그중 한 명이었고..."
자신있게 말하던 카린의 목소리가 끝에가서 개미처럼 작아졌다. 그리고 얼핏보니 얼굴에도 홍조가 어려있었다.
안톤은 그것이 애꿎은 조명 탓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 때문일까. 마치 주변에 꽃가루가 휘날리는 듯 코가 간질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카린이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황급히 말을 이어붙였다.
"흠흠! 어쩌면 당신이야말로 상인 일을 했어도 대성했을지 모르겠네요."
"그, 그렇다니 다행이군."
뭐가 다행인진 알 수 없지만 덩달아 당황한 안톤이 그렇게 말했고, 그때 누군가가 별채로 들어왔다. 핫산을 만나고 온다던 펠샤인이었다.
그녀는 묘한 눈길로 그들을 쓱 훑어보고선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흐음. 설마 여기서 뭔가 하고 있던 건가요?"
"아, 그게..."
"별 건 아니고, 어느 방에서 잘지를 상의하고 있었어요. 당신도 알 듯이 워낙에 방이 많잖아요?"
정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을 붉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 걸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머뭇거리던 안톤과 달리 카린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를 보며 안톤은 자신은 결코 그녀의 말처럼 상인으로 대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 딱히 찔릴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카린이 잘 대답한 덕분에 펠샤인도 고갤 갸웃했다.
"그래요? 그냥 아무 방이나 골라서 자면 될 텐데. 아니, 것보다 그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당신이 자리에 없었으니까요."
"그럼 이제 왔으니 어서 다들 자러 가죠. 졸려 죽겠네요."
펠샤인이 하품을 하며 먼저 아무 방이나 골라 들어갔고, 이후 안톤과 카린은 서로를 보며 멋쩍은 듯 씨익 웃었다.
"당신도 이만 쉬세요.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하니까."
"그러지."
그렇게 해린에서의 첫날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