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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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44화
144. 준비
"그건 비밀이에요."
펠샤인은 일말의 여지조차 없이 단호히 고갤 저었다.
그 탓에 굉장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의 성격상 몇 번을 다시 물어본들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안톤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안톤에게 잘했다는 듯, 펠샤인이 마치 어린 애에게 상이라도 주는냥 보다 농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튼 그리고는 이곳에 있던 성물만을 가진 채 돌아갔죠."
"과연 여기에도 성물이 있었나."
아무튼 그렇다면 아르토르가 이곳을 찾은 것도 이해가 간다.
성물이야말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헌데 왜 펠샤인을 그냥 내버려두고 떠난 거지?'
그런 모순이 안톤을 고민하게 만들었으나, 그 고민은 길게 이어질 수 없었다.
입을 꾹 닫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그를 펠샤인이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래서 왜 나를 찾아왔죠? 설마 그때 배에 타라던 것을 거절한 것 때문에 미련이라도 남았었나?"
펠샤인이 질문을 보냈다.
뒤에 장난기 실린 농을 첨가하긴 했지만 뭐, 본질은 어서 본론으로 넘어가자는 것이었다.
뭐, 안톤 역시 괜히 에둘러 말하며 대화를 질질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바라는 바였다.
"당신의 힘이 필요하오. 펠샤인. 당신은 블라디미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소?"
안톤의 질문에 펠샤인이 고갤 갸우뚱했다.
얼핏 보기엔 하나도 모른다는 듯한 제스쳐였으나, 이어진 그녀의 대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글쎄요. 그들이 이 세계를 끝장내버리려 한다는 정도? 아! 그리고 아르토르라는 남자의 정신 지배를 막을 수 있는 게 나뿐이라는 것도 어쩌다보니 알게 됐네요. 오호라... 그러고보니 당신이 날 찾은 것도 그래서인 것 같군요."
펠샤인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안톤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펠샤인은 알고 있는 것이 많았다.
그것도 심지어 자기 자신이 지닌 가치마저도 정확히 말이다.
"...그렇소."
안톤이 뻘쭘한 목소리로 긍정하자, 펠샤인이 보여주기 식으로 콧소리를 크게 내며 어깨를 돌린다.
"흥! 그럴 땐 말이라도 아니라고 하는 거에요. 여전히 여자의 맘을 몰라주는 군요."
안톤은 어쩔 줄 몰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것은 딱히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펠샤인이 한숨을 그윽하게 내쉬며 다시 어깨를 돌려 안톤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당신을 따라가는 건 좋지만, 조건이 있어요."
"말해보시오."
"평생 내 옆에서 날 지켜줘요."
설마 이건 고백인가 싶을 정도로 나긋나긋한 목소리.
순간 안톤은 곤혹스런 얼굴로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중의적인 표현을 쓴 것은 고의였으리라.
펠샤인이 안톤을 놀리기라도 하듯 분위기를 바꾸며 말을 이었다.
"블라디미르에서 가장 죽이고 싶은 건 당신이겠지만, 아마 그 다음은 저일 걸요? 난 살아서 이 세계의 끝을 보겠다고 결심했거든요."
"그런 이유에서라면... 알겠소. 그러리다. 평생이랄 것도 없이, 그들을 모두 해치울 때까지 당신을 최우선시해 지키겠소."
워낙에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기에, 안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 표정만으로 알 수 없었다.
허나 분명한 건 그녀가 안톤의 힘이 되어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고마워요. 아, 그럼 한 가지 알려드리자면. 당신이 쓰던 검, 아직 그곳에 있어요."
그것도 기대도 안 했던 선물과 함께.
* * *
"그럼 가볼까요?"
"정말 괜찮은 것이오?"
"그런 걱정을 하는 거 보니 준비는 다 된 것 같네요. 가자, 안타!"
그 말이 끝나기 즉시, 안톤과 펠샤인을 태운 마룡 안타리얼리니온이 협곡 위로 빠르게 비상했다. 예상했던 바람은 전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펠샤인이 무언가 마법적인 조치를 취해둔 모양이었다.
그러나 중력만큼은 그녀로서도 어쩔 순 없었던 모양.
안톤은 아래로 몸이 떨어지려는 것을 줄 하나에 의지해 버텨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안톤과 달리, 펠샤인은 미리 만들어둔 안장 위에서 편안한 비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하늘로 솟아올랐을 때일까.
안톤은 분명 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어두컴컴한 기현상과 마주했다.
저 멀리서 작게 보였던 별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안톤은 문득 고개를 내려 지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록티아를 빙 두른 그랜드 게이트는 물론, 드넓던 츠레이바의 사막 지대 전역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심해요. 이제 내려갈 거니까!"
안톤의 귓가에 펠샤인의 경고가 들려왔고, 그러기가 무섭게 아래를 향하던 안톤의 몸체가 위로 솟구쳤다.
'젠장.'
그리고 이내 한바탕의 수직 활강이 이어졌다.
펠샤인의 마법 덕에 바람이 불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안톤이라도 붙잡고 있던 줄을 놓아버릴 수도 있었으리라.
"자, 이제 내려도 되요."
쿠웅.
펠샤인과 안톤을 태우던 용이 둔닥한 소음을 내며 지면에 안착했다.
4년 전, 안톤이 블라디미르와 일전을 벌였던 그 호수에 있던 바위 섬이었다. 비록 예전의 그 일로 섬의 형체는 잃고 거대한 바위들이 물 위로 흩어져 있는 모습이긴 했다마는 아무튼.
"후우..."
이제야 두 발로 지상에 내려서게 된 안톤이 숨을 크게 내쉬며 고르고 있자, 펠샤인이 그에게로 다가와 사과의 말을 전했다.
사실 진심이라고는 추호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의 말이었다.
"미안해요. 저만 편하게 온 것 같아서. 저도 마음이 편치는 않아요."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아주 밝아보이는구려. 그나저나 꼭 그렇게까지 높이 올라가야만 했던 것이오?"
"아직 용을 모는데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한 귀로 듣기에도 사실이 아니라 느껴지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증거는 없지만, 안톤은 왠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어쩌면 오늘의 일은, 지난 날 그녀의 말을 따라 배를 타지 않은 것에 대한 작은 보복일지도 몰랐다.
이에 대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안톤은 결국 하지 않기로 했다.
구차하게 말을 해봤자 증거도 없었고, 얻는 것은 하나도 없이 괜히 속 좁은 놈으만 몰릴 것이 빤했다.
'역시 무시무시한 여자야.'
안톤이 고개를 저으며 어디론가 향했다.
그곳은 말 그대로 폐허가 되어버린 바위 섬에서도 더욱 망신창이인 장소였다.
반구의 형태로 깊게 파인 구덩이, 그 정중앙에는 안톤의 분신과도 같던 그 대검이 고고하게 지면에 박혀 서 있었다.
안톤이 검자루에 손을 가져다댔다.
무려 4년 만에 다시 잡게된 대검이었지만, 손 안에 촥 감기며 안정감을 주는 것은 여전했다.
스윽.
검신의 절반이 파묻혀 있었음에도, 검은 굉장히 부드럽게 딸려나왔다.
이렇게 1년 내내 안개가 가득한 환경에서도, 검에는 녹이 슬거나 무뎌진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아마 칸타타가 일찍이 조치해둔 마법각인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멀쩡하진 않았으리라.
'칸타타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군.'
검의 점검을 끝마친 안톤은 이를 팔찌 속으로 집어넣고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용의 발치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던 펠샤인은 이를 보고는 영차하며 일어났다.
"그럼 이제 앉아서 갈래요?"
"안장은 하나이지 않소."
"그렇죠. 애초에 두 명이서 탈 거라곤 상정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뭐 방법은 있는 거아니겠어요?"
펠샤인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내지었다. 뭔가 보는 것만으로도 슬그머니 불안해지는 얼굴이었다.
"자, 이리 와봐요."
펠샤인이 안톤의 손을 손수 잡고 데려다가 안장에 앉히더니, 그 위에 살포시 몸을 얹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물컹한 감촉에 안톤의 얼굴에 당혹감이 물씬 어렸다.
"이, 이게 무슨..."
"뒤에서 잘 잡아줘요. 혹시 떨어질 지도 모르니까요."
펠샤인은 대뜸 안톤의 말을 끊더니 능청스레 세세한 주문까지 요청했다.
떨어질지 모르니 잘 잡아달라니.
수직으로 솟았다가 내리떨어지면서도 멀쩡해놓고선,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아니,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안톤이 어이없음을 감추지 않으며 무언가 말하려는 때.
"안타!"
용이 날아올랐다.
* * *
그리고 그로부터 조금 전.
안톤이 들어가 있던 용의 협곡 입구.
하늘을 역으로 솟아 오르는 용의 날갯짓을 보며, 록티아의 공주 베니그론이 중얼거렸다.
"성공한 걸까요. 아니면 실패해서 그의 화를 돋군 걸까요?"
"금방 알게 되겠지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충직한 신하 아로스는 어느 것에도 확답을 내리지 않았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이제서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베니그론은 문득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 팔춤을 부여잡으며 몸서리쳤다.
"그저 누군가에게 운명을 맡겨야 할 뿐이라니... 우리들은 끔찍할 정도로 무력하군요."
"송구합니다."
처참한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한탄에 아로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고개를 든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제 내려오는 것 같군요."
베니그론의 중얼거림에 아로스도 긴장 섞인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아득히 높은 창공에서 용이 아주 빠르게 활강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운명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일 것이라는 걸.
솨아아아!
침을 삼키는 것도 잊은 채 이를 지켜보던 그들은, 용이 록티아를 지나쳐 대륙 아래로 향해가는 것을 보고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마음 속 한가득하게 내려앉은 안도감 만큼이나 묵직한 이 감정이 바로 굴욕감이라는 것을.
한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고 아로스가 허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들을 지켜줄 건 이 벽 뿐이군요."
그랜드 게이트.
피로 물들은 대륙의 난세 속에서도 평화를 지킬 수 있던 수호의 성벽.
허나 베니그론은 더 이상 이것만 믿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로스 님. 깨어나세요. 지금 비상하는 용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곳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마룡 안타리얼리니온이 있다면, 저들은 언제든 그랜드 게이트를 넘어올 수 있다.
아니, 애초에 그들의 전력으로는 마룡 하나만 보내진다쳐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굳이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의 평화는 처음부터 그런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고작 누군가의 마음에 따라 천차만별로 운명이 바뀌는 그런 허상의 것 말이다.
"그러니까 기뻐하세요."
역설적인 한 마디에 아로스가 걱정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훑었다.
허나 그녀는 그의 염려와 다르게 미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떠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을 뿐.
그녀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드디어 우리들을 얽매던 사슬이 떠나간 것이니까."
솨아아아아.
폐쇄적인 환경에서 현상유지만을 추구해오던 아인종들의 사회.
그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남색 하늘에 만월이 가득찬 어느 밤.
조각 배를 이끌던 한 남자가 바위 섬 위로 올라섰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게 연회복을 입은 사내였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숨 돌릴 새 없이 바빴지만, 이렇게 가끔씩 시간을 내어 이곳을 찾곤했다.
파바바바밧!
낮밤과 관계없이 상시 내리치는 폭포 소리를 들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져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기에 적당하단 것도 있긴 했다마는, 그가 바쁜 와중에 이곳을 꼬박꼬박 찾아오는 것에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확인을 하는 작업이다.
사내는 익숙하게 바위들을 건너가며 섬의 중앙부로 향했다. 4년 전 그날, 차원의 균열이 벌어졌던 그 장소였다.
지난 몇 년 동안 그 장소는 늘 처참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헌데 오늘, 그 장소에 처음으로 달라진 점이 생겼다.
"검이... 없어졌군."
원래 저기 파여 있는 구멍에는, 검이 꽂혀져 있었다.
주인을 닮아 고결하게 우뚝 서 있는 대검이 말이다.
사내는 이곳에 들릴 때마다 한참이나 그것을 바라보다가 돌아가곤 했었다.
그에게 있어 그것은 계획이 차근차근 잘 진행되는 중이라는 증거였다.
그래서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에 위안이 찾아왔다.
그런데 오늘, 그것이 사라졌다.
"설마 돌아온 건가."
아르토르의 입가에 생겨난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한껏 뒤틀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