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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4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2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43화

143. 협곡

 

 

"그럼 어째서 여기로 돌아온 거죠?"

 

"그 이유는 하나요. 용의 현자, 아니 아까 당신이 말한 마룡에 대해서 조금 더 들어보고 싶어졌소."

 

안톤이 매몰차게 제안을 거절한지 겨우 한 시간이 지났다.

 

근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심경의 변화가 생긴걸까.

 

베니그론은 하나도 짐작 가는 것이 없었고, 그랬기에 대답을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를 안톤이 채근했다.

 

"뭘 망설이시오? 어차피 얘기만 듣겠다는 건데."

 

"미리 말해두겠지만, 통로에 대해선 알려줄 수 없어요."

 

"아까 말했지 않소. 필요 없다고."

 

안톤의 즉답에 베니그론의 고민은 보다 깊어졌다.

 

인간에 대해 깊이 어린 불신 때문일까.

 

분명 안톤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헌데 통로도 원하는 게 아니라니, 도대체 원하는 게 무엇일까.

 

"당신의 목적은 뭐죠?"

 

베니그론의 직설적인 물음에 안톤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나에게도 목적이 있소. 허나 우선 자세한 얘기부터 들어보고 말해도 되겠소?"

 

왠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목적이 있다고 말을 해주니, 베니그론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비록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일말의 불안감은 남았지만, 얘기만 하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알았어요. 일단 이 얘기를 하려면 우리들의 역사부터 짚고 넘어가야해요."

 

그렇게 베니그론의 입에서 마룡 안타리얼리니온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원래 그분은 우리 록티아의 숭배 대상 중 하나였어요. 정처없이 떠돌던 우리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이곳에서 살게 해주었고, 보호해주었죠. 그러나 처음으로 그분과 문제가 생긴 건 13년 전이었어요."

 

13년 전.

 

안타리얼리니온이 처음으로 록티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요구하는 무언가란 매번 달랐다.

 

어느 날은 단순히 공물을 원하는가 하면, 어느 날은 피를 원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그저 광기에 빠져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려움에 휩쌓인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그분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그 행동들에 무언가 의미가 있거나, 어쩌면 우리들이 잘못을 저질러서 화를 내시는 것이라고만 여겼죠."

 

허나 그러한 생각이 무작정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생활을 무려 10년이나 감읍하고 나서야, 록티아 왕가에선 확정을 내렸다.

 

"우리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요. 이제 우리들의 수호신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 있던 건 단지 영겁의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린 마룡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게 단정을 짓고도 변한 것은 없었다고 한다.

 

미치든 미치지 않았든, 용이 지닌 힘은 그들로서는 어쩔 바 없이 강력했으니까.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한창 골머리를 앓아가던 때, 한 남자가 찾아왔다.

 

"처음 보는 자였지만 크게 경계는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동족이었으니까요."

 

그 남자는 자신이 그를 원래대로 들어올 방법을 알고 있다 했고, 그들의 윤허하에 용의 협곡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나서 남자의 말대로 더 이상 마룡은 횡포를 부리지 않게 됐다.

 

록티아의 아인종들은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 사내에게 용의 현자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죠. 그 남자가 결코 순수한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님을."

 

남자는 그저 마법으로 모습을 바꿨을 뿐, 그들과 같은 종족도 아니었다.

 

그가 모습까지 감추며 이곳에 온 이유는 바로 마룡 안타리얼리니온을 지배해 강대한 힘을 손에 넣는 것 뿐이었다.

 

"그런 진의를 알았음에도,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자들도 굉장히 많았지요. 적어도 그가 마룡을 데리고 떠난다면 적어도 록티아에는 평화가 찾아 올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늘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듯,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로스와 베니그론이다.

 

그들 또한 마룡이 이곳을 떠나는 것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허나 용의 현자가 지닌 진짜 저의를 모른다는 것이 그들은 두려웠다.

 

"저는 그 사내가 더 큰 비극을 불러올 것이라는 불러올 것이란 불길한 예감이 도무지 가시질 않습니다."

 

이로써 베니그론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다행히도 그들이 바라는 점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 일치했다.

 

"날 용의 협곡으로 데려가주시오. 내가 당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겠소."

 

그 목소리에는 어째선지 믿고 싶어지는 힘이 실려 있었으나, 베니그론은 섣불리 안톤의 장담에 응하지 않았다.

 

미련하기 짝이 없게 또 용의 현자와 있었던 실수를 반복할 순 없었다.

 

"얘기가 끝나면 분명 목적을 말해준다 하셨습니다."

 

베니그론의 곧은 눈이 안톤을 향했고, 안톤은 감추는 바 없이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당신은 혹여 용의 현자가 용의 힘으로 더 큰 비극을 록티아로 불러오는 것 아니오? 걱정마시오. 내가 바라는 바는 그를 설득해 이곳을 떠나는 일이니."

 

"당신 또한 그 자와 마찬가지였군요."

 

처량한 눈빛으로 씁쓸한 미소를 내짓는 베니그론.

 

이를 보며 안톤은 미처 조소를 감출 수 없었다.

 

여러모로 다시각적으로 보아도, 이 아인종이란 종족들은 참으로 갑갑한 이들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오? 어차피 당신들이 원하는 건 하나 아니오? 그저 평화롭게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만 지켜진다면 밖에서 뭔 일이 벌어지든 상관도 안하지."

 

"...바깥은 우리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생존을 위한 전통이죠."

 

안톤의 말이 질책처럼 들렸던 것일까.

 

베니그론이 회피의 말을 내려놓는다.

 

안톤은 이 모습을 보며 이들과 길게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아졌다.

 

"탓할 생각은 없었소. 지금 결정을 내리시오. 만약 거절한다면 나 혼자 찾아볼 생각이니."

 

최종 권고처럼도 들리는 말에 베니그론이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외부의 인간이, 아인종들의 세상인 록티아에서 활개를 치고다니겠다고 면전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뿐이었다.

 

"알았어요."

 

베니그론이 분함을 미처 전부 가리지 못하며 겨우 고갤 끄덕인다.

 

어쩌면 아인종들은 용에 의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더 이상 스스로 설 수 없게 된 걸지도 몰랐다.

 

 

* * *

 

록티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용의 협곡.

 

정확히는 그 협곡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 사람이 멈춰섰다.

 

안톤과 아로스, 그리고 베니그론이었다.

 

"정말 그거면 되겠어요?"

 

"충분하리다."

 

베니그론의 염려섞인 말에 안톤은 그저 고갤 끄덕이며 허리춤에 묶인 검대를 만졌다.

 

검대에는 세 자루의 장검이 두런히 메달려 있었다.

 

이는 베니그론에게 받은 무구로 모두 하나 같이 양질의 물건이었으나, 아쉽게도 안톤의 모든 역량을 받아내기에는 부족했다.

 

그렇기에 검이 부러지면 다른 것을 쓴다는 생각으로 세 자루나 빌렸다.

 

'내 예상대로 상황이 전개된다면 검을 쓸 일도 없겠지만...'

 

"그럼 가보겠소."

 

베니그론과 아로스의 배웅을 받으며, 안톤이 험준한 절벽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고서부터 불과 몇 걸음이나 걸었다고, 주변이 대낮임에도 어두컴컴하게 변해 음침한 분위기가 풍겨졌다.

 

허나 그렇다고 안톤의 발걸음이 느려지거나 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협곡에 들어서길 얼마나 지났을까.

 

비좁던 공간이 끝이 나고 넓은 공터가 나타났을 때였다.

 

"돌아가라."

 

중후한 음성이 협곡에 메아리치며 온사방을 울려댔다.

 

안톤이 잠시 멈춰 서서 허공으로 질문을 날렸다.

 

"당신이 용의 현자인가?"

 

"죽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라."

 

질문에 대한 답은 들려오질 않고, 똑같은 소리만 해대자 안톤은 멈췄던 걸음을 재개해 계속해 앞으로 나아갔다.

 

돌아가라는 음성은 이후에도 몇 번인가 더 들려오더니 이내 멈췄다.

 

그리고.

 

솨아! 솨아!

 

바람이 찢기는 듯한 파공음에, 안톤이 고갤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태양의 역광을 받은 거대한 생명체가 날갯짓을 하며 아래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미궁에서 보았던 녀석은 이것에 비하면 그냥 참새였군.'

 

마치 산이 움직이 움직이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육중한 몸체.

 

입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 하나 하나가, 안톤의 대검을 몇 개는 합친 듯한 크기다.

 

쿠우우웅!

 

나름 살짝쿵 지면에 안착한 것 같은데도, 지면이 크게 울린다.

 

뭐, 물론 뒤에 이어진 포효에 비하면 무척이나 작은 소리였지만.

 

크롸라라라랑!

 

용이 안톤을 잡아먹을 기세로 콧김을 내뿜었지만, 안톤은 기 죽지 않으며 무심하게 상대를 살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호령이 떨어졌다.

 

"죽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라!"

 

누가 한 말인가 싶었더니, 마룡의 머리 부근에 로브로 얼굴을 감춘 인물이 서 있었다.

 

필시 저 인물이 용의 현자이리라 여긴 안톤은 신안을 통해 그를 살피다가 피식 웃었다.

 

예상대로 로브로 감춰진 용의 현자의 체구는, 남자가 아닌 여자의 것이었던 것이다.

 

'역시 당신이었나. 그래도 상냥한 면은 여전하군.'

 

안톤이 용의 앞으로 서슴없이 걸음을 내뻗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기약 없는 약속을 지킬 때가 왔군. 오랜만이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모습을 숨길 필요 없소. 펠샤인."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안톤은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펠샤인 또한 자신을 알아 보았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설령 당시의 안톤이 가명까지 쓰며 철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지냈다고 해도 말이다.

 

아무튼 그 예감이 들어맞음을 확인하는 것에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어떻게 알았죠?"

 

펠샤인이 로브를 벗고 아리따운 얼굴을 드러냈다.

 

몇 년 사이 그녀는 훨씬 더 농익은 여인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외모만으로는 안톤이 살아오며 보았던 그 어떤 미녀보다도 아름다웠다.

 

'더욱 치명적이게 변했군.'

 

허나 시간이 지나며 만개한 연꽃처럼 한껏 물오른 그녀의 외모 만큼이나, 그간 안톤의 심력 또한 더욱 고강해진 덕택일까.

 

안톤은 흔들림없이 펠샤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볼 수 있었다.

 

"사실 확신은 없었소. 그저 찔러봤을 뿐이지. 정말로 당신이 용의 정신을 조작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을 줄은 몰랐소."

 

"그게 찔러보기였다니, 완전히 당했네요. 안타!"

 

펠샤인의 부름에, 용이 고개를 조아리듯 땅에 머리를 가져다 댔고, 펠샤인은 천천히 그 위를 걸어 살포시 뛰어내렸다.

 

"있지, 그거 알아요? 수천 수만년씩 사는 용들의 정신력은 정말 형편없다는 거. 그들은 하루 하루를 버티는데 막대한 정신력을 쓰느라 늘 위태위태하죠. 그래서 다 죽고 하나 남은 거겠지만."

 

그리고 그 말이 끝났을 때.

 

펠샤인은 이미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만큼 안톤에게 다가와 있었다.

 

"이제야 당신 얼굴을 보네요. 안톤."

 

숨결이 느껴지고, 체취가 전해질 만큼 가까운 거리.

 

분명 이번엔 마법도 아닐진데, 심장이 평소보다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안톤은 슬며시 그녀에게로부터 시선을 떼 허공으로 움직였고, 펠샤인은 그런 그를 보며 이해한다는 듯 빙긋 웃었다.

 

왠지 속내가 읽힌 듯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러한 감정을 잊을 만한 말이 펠샤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블라디미르의 손에 의해 죽었다고 들었는데, 용케도 살아 있었네요?"

 

"그들에 대해 아시오?"

 

안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가 블라디미르에 대해 아는 것도 이외였는데, 그들에게 죽었단 소식을 도대체 어디서 들은 것일까.

 

그런 안톤의 반응이 다소 우스웠는지 펠샤인이 킥킥 거리며 웃었다.

 

"왕궁에서 지내던 떄에도 그들에 존재에 대해선 알았어요. 그리고 사실 얼마 전에도 한 번 보기도 했고..."

 

"얼마 전에 봤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안톤의 눈빛이 펠샤인을 향해 쏘아졌다.

 

무의식중에 무거운 기세마저 실려 있었지만, 그녀는 별반 내색도 없이 평소처럼 입을 열었다.

 

"아르토르라고 했던가? 그 남자가 얼마전에 이곳까지 찾아와서 나를 죽이려고 했었거든요. 근데 나랑 대화를 몇 번 나누더니 안 그래도 되겠다며 돌아가더군요."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알 수 있겠소?"

 

안톤의 진중한 물음에 펠샤인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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