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4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42화
142. 변심
안톤이 한 걸음을 내딛자, 베니그론이 두눈을 질끈 감는다.
아마 아로스가 죽었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안 죽었소."
"그 어떤 수작을 부려도 제 각오는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조금은 억울했다. 굳이 알아서 간다는 걸 편한 길이 있다고 꼬시면서 여기까지 데려온 건 아로스가 아니었던가.
"후우... 내가 무슨 살인귀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이오? 아, 됐소.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하시오. 어차피 금방 알게 될 테니. 그럼 난 가보리다."
그냥 이들과 엮이면 피곤해질 것만 같다던 예감이 들었기에 안톤은 재빨리 왕궁을 벗어났다. 그것은 탈출이라고 할 것도 없이 간단한 일이었다.
그저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간 후, 달리기만 하면 됐다.
사방면 중 어디를 선택하든 보이는 벽으로 다가간 안톤이 다짜고짜 맨손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제법 상당한 높이긴 했다. 허나 밖에서 올려다보았던 그랜드 게이트와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낮았고, 틈새같은 손에 잡을 만한 것들도 많았기에 오를만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나서일까.
'손을 뻗으면 하늘이라도 닿을 것 같군.'
솨아아아아.
이마를 쓸며 위로 솟구치는 바람을 맞으며, 안톤은 지상을 바라보았다.
그랜드 게이트의 정상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동그란 모습이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츠레이바의 사막이 보였고, 왼쪽으로 돌리면 펭 제국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숙이면, 4년 전 블라디미르와 격전을 벌였던 그 섬도 보였다.
아주 콩알만하게 말이다.
'그냥 떨어지면 나라도 무사하진 못하겠는데.'
암만 초인이고 괴물이라 한들.
땅을 밟고, 숨을 쉬며 살아가는 생명체라면 결국 세계를 이루는 물리법칙을 초월할 수는 없다.
뭐, 그렇다고 내려갈 방법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태초의 세계에서 힘을 잃은 몸뚱이로도 산맥을 헤집고, 화산구 속을 미친 사람처럼 뒤지고 다니지 않았던가. 이는 그것에 비하면 한결 쉬웠다.
'그럼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가 볼까.'
그렇게 잠시 넋을 잃고 경치를 감상하던 중이었다.
안톤은 한 가지 잊어먹은 일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보니 카린에 관해 더 물어본다는 걸 까먹었군.'
아로스에게서 카린이 남부에서 활동 중이란 건 들었다.
허나 남부에 있는 국가가 어디 한 두갠가?
안톤은 마지막으로 품에서 위스퍼 스톤을 꺼내들었다.
"산을 덮는 파도."
만약 이번에도 카린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면, 일단 남부로 이동하면서 생각해볼 생각이었다.
위잉. 위잉.
일정한 간격의 울림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안톤도 슬슬 미련을 접고 이를 품에 집어넣으려던 찰나였다.
"...안톤? 설마 안톤인가요?"
위스퍼 스톤으로부터 특유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난 4년 만에 듣는 카린의 목소리였다.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톤은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하고 싶던 말도, 해주고 싶던 말도 많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맨 처음에 꺼내야 할 지를 모르겠어서였다.
안톤은 평소에는 어떤 인삿말을 던졌었는지,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떠올려 본 이후에나 입을 열 수 있었다.
"오랜만이오. 카린."
"아, 신이시여..."
어떤 역경 속에서도 신을 찾지 않던 그녀가 신을 부른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그렇게 감격할 일이었는가 싶어 어째선지 살짝 가슴이 들뜬다.
허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안톤은 우선 사과의 말을 전했다.
어쩌면 사실 가장 먼저 해야했을 말은, 오랜만이니 뭐니 그런 게 아니라 이것이었을지도 몰랐다.
"미안하오. 금방 돌아온다고 했는데, 벌써 4년이나 지났구려."
"아니에요.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정말..."
"그건 당신또한 마찬가지요. 살아 있어서 다행이오."
"..."
이후 카린은 말이 없었다.
위스퍼 스톤으로는 오직 불규칙하고 거친 숨소리만이 전해지고 있었고, 이는 시간이 갈 수록 격해졌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이나 서럽게 흐느꼈고, 안톤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서 그랬다.
헌데 계속 듣고 있자니 지난 날 동안 카린이 겪은 고난과 힘듬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듯해, 문득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나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서로의 숨결만이 전해지던 시간은 한참이나 계속 됐다.
이윽고 감정을 추스린 카린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내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왜 이제서야 연락이 닿는 거에요. 혹시 크게 다치거나 그랬던 건가요?"
"다치진 않았소. 난 멀쩡하오. 다만... 아주 골치 아픈 일을 겪었소."
안톤은 그들의 수작에 의해 어디론가 갇혀 버렸고, 오늘에서야 겨우 그곳을 탈출했다고 말해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없었으나, 카린은 안톤의 성정이 어떠한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굳이 말로 내색을 하지 않더라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느 누구보다 노력하고 고생했을 것이 안톤이란 걸 알기에, 카린은 그를 질책할 수 없었다.
단지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 순간을 그 누구보다도 감사하게 여기는 것 뿐이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우중충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겠지만, 분위기가 한도 끝도 없이 가라앉는 것도 사실.
약간의 환기가 필요하다고 여긴 안톤이 대화 주제를 바꿨다.
"...아! 그나저나 카린, 당신에게 청백상인이란 별명이 붙었단 걸 들었소. 해린에 있을 땐 내 제안에 그렇게 약한 소릴 하더니, 어느새 유명인이 됐더군?"
"4년 동안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보니, 어쩌다가 그렇게 됐네요."
머쓱한 듯한 대답에 안톤이 피식했다.
예전에 안톤의 무호를 갖고 놀려댔던 카린이 떠올랐던 것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녀 또한 그때 안톤이 짓던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근데 준비라니?"
"...제국을 무너뜨릴 준비요."
별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상상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당신이 그걸 왜?"
제국과는 별 연고가 없던 카린이 갑자기 왜 그들을 적대시하는 것인지,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안톤의 생각이었을 뿐, 그녀에게는 합당한 이유가 존재했다.
"당신이 실종됐던 그날. 세로게트님에게서 블라디미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세로게트님께선 제국도 그들과 한패일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죠. 적어도... 당신의 복수는 해야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랬군."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안톤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애써 밝아진 분위기가 또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 하자, 이번에는 카린이 나서서 이를 무마했다.
"그래도 제국에 있는 근거지를 옮기는 건, 7황자 님이나 클린턴 경이 많이 도움을 주셔서 수월했어요. 그리고 새로이 정착한 해린이야 뭐, 말 안 해도 알잖아요?"
"이거 핫산에게 또 빚을 졌군."
"또는 아니에요. 당신이 전에 졌던 빚은 제가 갚았거든요."
"그럼 당신에게 빚을 또 진 걸로 해둡시다. 그래서 당신은 어디오? 지금도 해린에 있는 것이오?"
"네. 맞아요. 아마 오면 깜짝 놀랄 걸요? 저 말고도 당신이 보면 반가워할 사람들이 꽤나 많이 모여 있거든요."
"기대 되는군. 금방 가리다."
"아, 근데 이걸 묻질 않았네요. 지금 어디에요?"
"나는 지금은 록티아에 있소. 눈을 떠보니 이곳이더군. 이것저것 일이 좀 있긴 했지만, 이제 막 떠나려는 참이었소."
"자, 잠깐 록티아요? 혹시 아인종들과도 만나보셨나요?"
화들짝 놀라는 카린의 반응에, 안톤이 실웃음을 내지었다.
아인종들이란 실제로 만나본 이가 극히 드물었고, 이를 안톤이 직접 만나봤다고 하니 카린이 놀란 것이라 여긴 것이다.
"아인종 뿐만 아니라 공주도 만났소. 다짜고짜 나보고 마룡인가 뭔가를 처치해달라더군. 별로 그럴 이유가 없기에 거절했소."
득의양양하게 말한 안톤이었으나, 돌아온 반응은 내심 하던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아, 마룡! 그냥 소문인 줄 알았는데 사실이었나 보군요! 어쩜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안톤! 잠깐만 기다려봐요. 일단 몇 가지만 물을게요."
"그, 그러시오."
다급함까지 느껴지는 카린의 목소리에 안톤이 적잖게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는 걸까 괜한 걱정까지 들었지만, 이어진 카린의 질문은 완전히 뚱딴지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몸은 어때요? 멀쩡해요? 아프거나 다친 덴 없고요?"
"그렇소."
"예전만큼 힘도 세구요?"
"...그럴 것이오만?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것이오?"
분명 카린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테지만, 전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안톤은 카린이 대답하길 귀를 집중하며 기다렸다.
"록티아에 용의 현자가 있어요. 그 자를 사로잡아야만 해요."
느닷없이 용의 현자의 이름이 카린의 입에서 나오다니.
지난 4년 동안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 * *
그래도 나름 왕궁이라는 건지, 아니면 안톤이 난리를 부리고 떠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왕궁 주변에는 병력들이 상당수 배치가 되어 있었다.
허나 수만 많았지, 안톤의 움직임을 쫒을 만한 자들은 없었기에, 안톤은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왕궁에 들어설 수 있었다.
'결국 다시 여기로 돌아오게 됐군.'
안톤이 민망함을 애써 감추며 창문을 넘었다.
아까 아로스와 베니그론, 그 둘과 한바탕 소란이 있었던 그 방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공주나 아로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별로 기대는 안했지만... 귀찮게 됐군.'
안톤이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얼마 전에 카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용의 현자가 록티아에서 마룡을 길들이는 중이란 정보를 얻었어요. 꼭 이를 막을 필요는 없지만, 그 사람을 포섭해야만 해요.
-왜지?
-블라디미르에 아르토르란 사람은 사람을 세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성국의 교황, 지아누의 국왕, 츠레이바의 지도자까지 이에 당했죠. 용의 현자는 그들이 걸린 정신 지배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에요.
카린은 그들과의 전쟁에서 이기려면 용의 현자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고, 안톤은 일단 자신이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용의 현자라니... 정말 뜬금없군.'
펠샤인의 스승이었던 그 노파는 죽었다.
때문에 이번 생에 용의 현자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허나 용의 현자는 이번 생에서도 대륙에 나타났다.
'설마 펠샤인인가?'
어쩌면 처음부터 그 노파가 용의 현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진 모르겠지만, 직접 보면 확실해 지겠지.'
이런 고민을 할 시간에 차라리 공주를 찾으러 다니는 게 더 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카린은 용의 현자가 록티아에 있단 정보만 알았지,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던 게 아니었다. 때문에 안톤은 반드시 아까의 공주와 만나서 위치를 알아내야 했다.
안톤은 숙달된 암살자처럼 모습을 숨겨가며 궁전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운이 좋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찾던 이를 발견했다.
록티아의 공주. 베니그론은 침대에 누워 의식을 잃은 아로스 앞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앉아 있었다.
"크흠."
안톤이 뒤에서 인기척을 내자, 조용히 책을 읽던 베니그론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하지만 놀란 것은 아주 잠시일 뿐.
그녀는 어느새 냉정을 되찾고 안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붙였다.
"아무래도 그랜드 게이트를 그냥 내려가겠다는 오만은 고쳐졌나 보군요. 왜, 직접 보니 역시 무리겠던가요?"
"...지레짐작하는 건 아인종들의 특성인가?"
"그럼 아인종이니 뭐니, 싸그리 묶어 깔보는 건 인간들의 특성인가요? 아로스를 살려준 건 고맙지만, 통로는 알려줄 수 없어요."
안톤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친절히 대해줄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으나, 생각보다도 훨씬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이대로라면 쓸모없는 언쟁이 이어질 거란 생각에 안톤은 서둘러 본론으로 넘어갔다.
"먼저 오해부터 짚지.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온 게 아니오. 직접 보니 확실해지더군, 통로가 없어도 문제는 없었소."
"...허세가 심하군요."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안톤의 뻐팅김에 베니그론이 눈쌀을 찌푸렸다.
그러고보면 아까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안톤은 그때도 알아서 생각하라 말했고, 그의 말대로 아로스는 정말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가 사실만을 얘기했다고 믿기엔,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