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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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7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74화
174화, 합류
케이혼의 치료를 받은 마룡 안타리얼리니온이 전장의 상공을 가로질렀다. 다만 속도는 예전처럼 빠르지 않았다. 회복이 덜 된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처럼 갑자기 장애물이 코앞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상당히 위험했기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공간의 틈만 찾으면 짠하고 황궁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군?"
안장에 앉아 용을 몰고 있던 펠샤인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느릿느릿한 이동 속도도 갑갑한데, 자꾸만 옆에서 케이혼이 재잘거리는 탓에 짜증이 솟구친 탓이었다.
"듣고 있소?"
"...아무래도 귀찮게 하지 말라는 아까의 약속은 완전히 잊은 모양이군요."
"약속을 잊은 건 아니오. 허나 나도 일단 함께하게 됐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대충 알고 있어야하지 않겠소?"
펠샤인이 확고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일단 짚을 거부터 짚고 넘어갈게요. 우리는 그냥 잠시 같이 움직일 뿐이지, 절대 같은 목적을 가진 게 아니에요. 그러니 동료인 척 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동료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알겠다고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도중에 말까지 끊고서 살벌한 기세를 풍기자, 케이혼도 어쩔 수 없었는지 풀 죽은 낯빛으로 고갤 숙였다.
"...알았소."
이쯤 했으면 좀 조용해지리라 생각한 펠샤인은 이내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허나 그런 그런 그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근데 정말 알려줄 수 없소? 그 공간의 틈이란 건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는 것이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끈질겨질 생각인 걸까.
거듭된 질문에 지친 펠샤인이 날 선 눈초리를 쏘아내자, 케이혼이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허나 겨우 그 뿐, 별 효과는 없었다. 케이혼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뻔뻔한 남자였다.
"저, 정말 마지막이오. 이것만 답해주면 꾹 입 다물고 있겠소!"
헛웃음이 나왔다.
저 마지막이라는 말도 벌써 네 번째다.
당장이라도 공격 주문을 외울까 싶던 펠샤인이었지만, 그녀는 그를 친구처럼 여기는 안톤을 떠올리며 겨우 인내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타를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뒤늦게 후회하는 심정이 되었으나 이미 저질러지고 만 일이었다. 펠샤인이 한숨을 크게 푹 내쉬었다.
"진짜 마지막이에요. 한 마디만 더 하면 정말 아래로 던져버리겠어요."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경고에 케이혼이 양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꽉 눌러잡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의지를 내비치기 위한 그 나름대로의 표현이었다.
펠샤인도 그 사실은 알았다.
헌데 왜 이리도 속에서는 열불이 치미는 걸까.
타오르는 속을 혼자서 삭히며 펠샤인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틈이 어디있는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렇게 대책없이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는 거고요. 집중해서 살펴야 하니까 이제 정말 가만히 있어요. 알겠어요?"
"..."
입을 다문 채로 고개만 열렬히 끄덕이는 케이혼. 그를 보며 펠샤인이 입술을 질겅 씹었다.
바라던 대로 되었건만 짜증이 삭혀지긴 커녕 더욱 치밀었다. 여하튼 정말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만큼은 타고난 인간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그녀의 경고가 통했다는 것이다. 이후로 케이혼은 침묵을 지켰고, 펠샤인은 조용히 공간을 탐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조용히 있던 케이혼이 난데없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저, 저기 좀 보시오!"
펠샤인이 휙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서 소리를 질러댄 탓에 귀가 먹먹했다.
만약 별 시덥잖은 일로 이리 야단을 떤 것이라면, 아까 했던 경고가 결코 농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케이혼은 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지상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뭐길래 이리도 호들갑을 떤 것일까. 펠샤인은 일단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며 마법을 이용해 안력을 키웠다.
그곳엔 백발의 노인과 묘령의 여인, 그리고 피칠갑의 사내까지 총 세 명의 인물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케이혼은 설명을 덧붙였다.
"검성이오! 그리고 그의 등에 엎힌 여성은 아무래도 린디아스인 것 같소! 오, 신이시여. 살아있었다니 정말로 다행이오!"
린디아스의 생존을 확인한 케이혼이 가슴을 쓸었다.
허나 린디아스의 생존이 그에게 가져다 준 안도감과는 별개로, 의문스러운 것이 있었다.
케이혼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참으로 다행인 일이긴 하지만... 좀 이상하구려. 안톤과 함께 있어야 할 검성이 여기엔 어쩐 연유로..."
"그야 직접 물어보면 되겠죠. 안타!"
펠샤인의 명을 받은 용이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하강했다. 근데 그 모습이 아래서에서 보기엔 지나치게 위협적인 것이었을까.
고갤 들어 용을 본 검성이 용을 베려 검을 휘두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정신 없는 와중에도 케이혼이 우렁차게 외쳤다.
"검성! 멈추시오! 적이 아니오!"
쿠웅!
용이 무사히 지상에 안착했다. 케이혼의 외침을 듣고 공격은 하지 않은 검성이었지만, 그는 잔뜩 경계 태새를 취한 채 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또한 펠샤인의 배신 소식을 들었기에,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적의 편에 붙은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얼른 자신이 나서야 한다 생각한 케이혼이 겁도 없이 용 위에서 뛰어내렸다.
"다 설명해주겠소. 기다리시오!"
풀숲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내려 온 케이혼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흠칫했다. 바로 그의 옆에 완전히 피칠갑으로 떡이 된 테피로스가 누워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으으..."
'그 괴물을 아무렇지 이꼴로 만들어버리다니... 역시 검성이군.'
과연 이게 명인과 그냥 마스터의 차이인가. 속으로 감탄하며 케이혼이 검성에게 다가갔다.
검성은 못 마땅한 눈빛으로 케이혼과 펠샤인을 번갈아가며 훑어보고 있었다.
"저 여자가 적이 아니라고?"
케이혼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소만."
"일단이 아니라 아직까진이겠지. 자네는 너무 사람을 쉽게 믿는 구먼."
검성이 비아냥거렸지만, 케이혼은 기분 나쁜 내색조차 내지 않았다. 아니, 그는 정말 조금도 불쾌하지 않은 듯 했다.
"그게 내 장점이자 단점이오. 일단 잡담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일단 린디아스부터 먼저 치료부터 해야겠소. 어서 이리 주시겠소?"
"아, 그러고보니 자네가 사제였지?"
뒤늦게 케이혼의 신분을 상기한 검성의 얼굴이 밝아졌다.
일단 테피로스를 묵사발 내놓긴 했는데, 안 그래도 손녀의 몸 상태가 걱정됐던 그였다. 근데 이렇게 때마침 케이혼이 나타다주다니, 정말로 천만다행이었다.
아마 그가 아니었다면 앞으로 위험했을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베어 죽이는 건 자신있는 검성이었으나, 아쉽게도 살리는 것은 그의 전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늘마저 아직 내 손녀가 죽을 운명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하군! 정말 고맙네."
"감사 같은 건 필요 없소. 그녀를 이리 눕혀주시겠소."
"그러지."
케이혼이 수풀 위에 누운 린디아스에게 신성력을 뿜어냈다. 새하얀 빛에 맞닿은 린디아스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며 점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으으...!"
그러던 때, 테피로스의 신음을 들은 검성이 대뜸 검을 뽑았다.
"그러고보니 저걸 깜빡했군. 자네는 신경쓰지 말고 있게. 얼른 처리하고 오도록 하겠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케이혼이 치료마저 멈추며 일어나 그를 말렸다.
"잠깐! 죽이지 마시오! 저 자에게 죄는 없소!"
"내 손녀를 이꼴로 만들었는데 그게 죄가 아니면 뭔가? 제정신이 아니란 건 변명이 될 수 없지. 게다가 이대로 살려둬봤자 답도 없고 말일세."
"우리에겐 그녀가 있지 않소. 펠샤인! 당신이라면 칠 황자를 고칠 수 있겠지?"
누가 성자 아니랄까봐 오지랖을 부리는 케이혼을 보며 펠샤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능력은 되지만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신 지배를 거는 것보다 푸는 게 몇 배는 더 어렵다.
과거에도 펠샤인은 하루에 서너 명 정도를 고치면 완전히 녹초가 되었었다.
어떻게 거절할지 고민하는 펠샤인을 보며 케이혼이 간절히 말했다.
"이렇게 부탁하겠소. 전쟁이 끝나고 정세가 안정되려면 그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오."
"그게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후! 됐어요. 알았어요. 할게요. 뭐, 이 남자도 마스터이니 제정신이 돌아오면 나름 도움이 되겠죠."
펠샤인이 결정을 내리자, 검성도 뜻을 꺾었다.
전쟁이 끝난 후를 걱정하는 말에 설득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손녀를 치유하는 케이혼의 말을 대놓고 거절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뭐, 일단 자네 말을 따르도록 하겠네. 헌데 이 말은 꼭 해야겠네. 물론 자네 도움을 받는 와중에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모두를 구하려 했다간 아무것도 할 수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 상황이 그럴 때는 아니지 않은가."
"저분 말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 사람의 하나 뿐인 친구라면서 어쩜 이리도 다를 수가 있는 건지..."
비꼬듯 말하는 펠샤인의 사족에 케이혼이 피식 웃었다.
친구와는 영 딴판이라니, 그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지금 모두를 구하겠다고 혼자서 애쓰고 있을 안톤이 들었다면, 필시 기운 빠지는 말이었을 테니."
* * *
콰아아앙! 쾅!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폭음.
황궁으로 돌아온 안톤과 아르토르의 싸움에 의해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황궁은 빠른 속도로 부서지고 있었다.
함정이나 계략만 조심하면 별 거 없으리라고 여겼던 아르토르가 뜻밖에도 팽팽하게 그와 맞서 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끝이 없군.'
안톤이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아르토르의 호리병에서 쏟아져 나온 마리의 악마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과거 세계에서 싸웠을 땐 고작 백 마리가 한계였는데, 언제 이렇게 늘어난 걸까.
아무래도 그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한 것은 안톤만이 아닌 듯 했다.
'완전히 작정하고 시간을 끌 생각이군.'
안톤은 조급해졌다.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적어도 수 백 씩은 해치우면 뭣하는가. 쉬지않고 베고 또 베었음에도 도무지 그 끝은 보일 기미가 없는데.
이런 상황에선 우두머리를 해치우는 전략이 최선이란 건 알지만, 이리저리 날쌘 움직임으로 회피에 주력하는 아르토르를 단숨에 잡아내는 것은 어려웠다.
아무튼 그러한 격전 속에서도 안톤은 틈틈히 시선을 옮겨 한 곳을 주시했다. 바로 대전 정중앙에 그려진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은 여전히 일정한 주기로 하늘을 향해 빛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안톤은 원래 먼저 아르토르를 해치운 후, 저것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려 했다. 아까의 반탄력을 봤을 때 몸 성히 부서낼 수 없다는 것도 그 이유긴 했지만, 저 마법진이 품고 있는 수 십 만의 영혼이 못내 맘에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정이 그렇게 좋지가 않았다.
'이것적것 가릴 상황이 아니다. 어쩔 수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