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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73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51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73화

173화, 신념

 

 

"가자, 안타."

 

펠샤인을 태운 용이 보라색 안개 사이를 거침없이 파고드는 순간, 불쾌한 감촉이 그녀를 덮쳤다.

 

한 치의 앞도 분간하기 힘든 것은 둘째 치고, 늪 속을 헤집는 것처럼 전신이 끈적거렸다. 마치 무언가가 그녀를 밖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째선지 숨도 제대로 쉬는 게 버거웠다. 허나 펠샤인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타, 힘내!"

 

펠샤인의 명령에 마룡 안타리얼리니온이 물 속을 헤엄치듯 안개 속을 뚫고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시야가 확 트이며 몸을 붙잡는 듯한 구속감은 봄눈 슬듯 사라졌다. 드러난 안개 속의 모습은 펠샤인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대체 여긴...'

 

펠샤인은 이곳에 대해 뭐라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수 초 간격으로 뒤바뀌는 주변의 공간이 변했다. 생전 처음으로 겪어보는 해괴한 곳. 허나 불행히도 그녀에겐 차분히 이 공간에 대해 이해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드리운 차디 찬 맨땅. 펠샤인은 앞뒤 잴 것도 없이 다급하게 용의 방향을 틀었다.

 

"피해!"

 

콰아아아!

 

다행히 빨리 궤도를 튼 덕에 정면으로 땅에 곤두박질 치는 것은 면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빠른 속도로 날고 있던 용의 몸체가 한참이나 바닥을 긁으며 서서히 지면에 멈춰섰다.

 

-크오오오오!

 

귀를 가득 메우는 용의 고통스런 울부짖음. 펠샤인은 서둘러 안장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용의 표효가 아니어도 주변은 혼잡하고 시끄러웠다.

 

병장기가 만든 철의 화음과 인간들의 날선 비명.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도 모르는 무질서의 공간 속에서 무수한 숫자의 인간들이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흡사 지옥도가 이런 모습일까.

 

펠샤인으로서도 짐짓 눈쌀이 찌푸려지는 참담한 현장이었다.

 

아무튼 거대한 용의 체구에 겁을 집어먹은 것인지, 다행히 용의 주변으로는 병사들은 얼씬도 하지 않고 있었다. 펠샤인은 얼른 지상으로 내려가 용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가 생각보다 중했다.

 

'이래선 움직이지 못하겠는데...'

 

시작부터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이제 어떻게해야 하지?

 

펠샤인은 향후 계획을 다시 짜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였다. 한 없이 무방비해 보이는 그녀를 향해 검과 화살이 쏘아졌다.

 

"마녀다! 죽여라!"

 

탁! 채챙!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부딪친 듯 허공에서 가로막힌 검과 화살. 펠샤인은 위기감 따윈 전혀 없는 얼굴로 건너편의 병사들을 쓱 훑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다들 평범했다.

 

'일단 쓸만한 자가 나타날 때까지만 쓰는 걸로 할까...'

 

결정을 내린 펠샤인의 눈이 번뜩였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병사들의 몸이 굳었다. 몇몇은 몸을 부르르 떨며 저항했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이윽고 탁한 동공으로 가만히 선 병사들을 보며 펠샤인이 미소 지었다.

 

"모두 죽이세요."

 

이지를 상실한 병사들이 그녀의 명에 따라 검을 옆으로 겨누었다. 그리고 아군을 향해 망설임 없이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한 남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나타났다.

 

"그만 두시오!"

 

사내의 목소리에는 강대한 신성력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일시적으로 병사들의 세뇌가 풀렸다. 세뇌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시간마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허나 그 이후로도 병사들이 아군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펠샤인이 일단 명을 거두고 그들을 멈춰 세운 것이었다.

 

헐레벌떡 다가온 사내, 케이혼이 헥헥 거리며 외쳤다.

 

"용을 보고 설마 했는데, 정말 당신일 줄이야!"

 

결코 이곳에서 그녀를 볼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지,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도 얼떨떨함이 가득했다.

 

"당신도 생각을 고쳐먹고 우릴 돕기 위해 온 것이오?"

 

설레발과 호들갑이 가득한 그를 보며, 펠샤인은 평소처럼 지극히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그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 있죠?"

 

마치 잔챙이를 상대하는 듯한 푸대접. 왠지 새삼스레 비참해지지만, 케이혼은 정말로 눈앞의 여인이 펠샤인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먼저 내 질문에 답하면 알려주겠소. 당신은 현재 누구의 편이오?"

 

평소완 다르게 진중한 목소리의 케이혼. 허나 펠샤인은 한심하단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거짓을 말해도 진위조차 가릴 능력이 없으면서,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중요하오."

 

펠샤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누구의 편도 아니에요. 그저 이 지긋한 이야기의 끝을 지켜보기 위해 왔을 뿐. 자, 그럼 이제 그가 어디 있는지 말해 줄래요?"

 

잠시간 펠샤인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케이혼이 입을 열었다.

 

"...안톤이라면 지금쯤 황궁에 있을 것이오. 아마 아르토르를 막기 위해 싸우고 있겠지."

 

"황궁으로 가려면 어떡해야 하죠?"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소."

 

결국 무용지물인 대답.

 

펠샤인의 눈총어린 시선을 받은 케이혼이 큰 죄를 지은 사람마냥 어깨를 움츠렸다.

 

"미, 미안하오. 도움이 못 되어서."

 

"괜찮아요. 별로 기대도 안 했거든요. 그럼 이쯤에서 작별하는 걸로 하죠."

 

펠샤인은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케이혼이 조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자, 잠깐! 나도 같이 갑시다."

 

대답조차 귀찮은지 다시 등을 돌린 펠샤인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엔 자신이 왜 그래야하느냐는 물음을 담고 있었다.

 

케이혼은 변명하듯 자신의 장점을 피력했다.

 

"결코 방해가 되는 일은 없을 거요! 게다가 나라면 저 용이 다시 움직이게 치료할 수 있소!"

 

근데 안타리얼리니온을 치료해 준단 말이 솔깃했던 것일까. 오묘한 표정을 짓던 펠샤인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미리 말해두겠는데, 절대 옆에서 날 귀찮게 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그, 그러리다! 약속하겠소!"

 

 

* * *

 

안톤은 고개를 내려 발 아래를 바라보았다.

 

보라색 안개가 지상을 덮친 후 안톤이 처음 보았던 도시가 반투명한 모습으로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각도이기 때문일까. 안 그래도 비현실적으로 거대하던 도시는 보다 웅장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아르토르는 대체 왜 이런 곳에까지 그를 끌어들이며, 이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의구심은 더욱 더 깊어만 갔다.

 

묘한 눈빛으로 도시를 내려보던 아르토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던 고도의 문명의 세계입니다."

 

늘 그렇듯 앞뒤를 다 잘라먹은 화법이지만, 안톤도 그의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했다.

 

멋진 것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 도대체 저만큼 비대한 도시를 만들려면 얼만큼 마법이 발달해야하는 걸지, 안톤으로선 감도 전혀 잡히지가 않았다.

 

물론 그러한 감상과 달리 안톤의 평은 냉정했다.

 

"그래봤자 잔재만 남은 폐허일 뿐이지."

 

암만 대단한 문명이면 뭣할까. 생명의 기운이라곤 코빼기도 느껴지지 않는데. 안톤은 아래로 보이는 도시에서 큰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저 이 세계에 드리울 미래는 결코 저 따위의 것이 되게 할 순 없다고 각오를 되새는 것, 그게 전부였다.

 

안톤이 물었다.

 

"이유가 뭐지? 왜 나에게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글쎄요. 그냥 한 번 함께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었습니다."

 

"날 설득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던 건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직시하는 안톤을 보며 아르토르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됩니다. 회유가 될 사람이었다면 이곳까지 오는 일도 없었겠지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만약 그런 생각이었다면 그 여자에게 사람을 보내는 짓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아르토르가 킥킥 거리며 웃었다.

 

점점 종말이 다가오니 외로움이라도 느낀 것일까. 그의 말투는 마치 적이 아닌 오랜 친우를 대하는 듯 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를 대하는 안톤의 태도가 변하는 일은 없었다.

 

얼굴에 구멍이 나랴 노려보는 안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아르토르는 설명조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먼 옛날, 천상인이 사라짐으로 세계는 정체됐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세계는 거의 한계점에 도달했죠. 당신에겐 츠레이바의 사막과 남다른 인연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혹시 사막의 저주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까?"

 

굉장히 뜬금없는 질문. 물론 안톤도 사막의 저주가 뭔진 알고 있었다. 신화에 나오는 얘기였다. 츠레이바의 국민들은 사막이 점점 넓어지는 게 오로지 신이 내린 저주 때문이라고 믿었다.

 

헌데 그 얘기가 왜 지금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원래 츠레이바는 더운 곳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사막이 넒지는 않았습니다. 허나 문명이 발전하고, 그로 인해 집행자가 강림해 흥망성쇠를 반복할 수록 사막은 넓어졌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에둘러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하는게 어떤가?"

 

안톤이 그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당장에 달려들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허나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토르는 아랑곳 않고 얘기를 이어갔다.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이제부터가 본론이고, 적어도 당신만큼은 이것들을 알아야 하니까. 츠레이바의 사막은 무덤입니다. 수 천 번의 윤회를 거쳐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한 데이터들이 조각조각 쪼개져 버려지는 무덤. 아마 오늘 죽은 삼십 만 명 또한 그 알갱이 중 하나가 되어가는 중이겠지요."

 

"..."

 

"영원이란 것은 없습니다. 안톤. 이 순환되는 세계도 결국 끝이 있습니다. 단지 길고 짧음이 다를 뿐이지요. 어차피 언젠가 멸망했을 세계에 너무 미련을 갖지 마십시오. 이게 옳은 결말인 거니까."

 

뭐라 말을 하려던 안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르토르의 마지막 한 마디에서 위화감이 느껴진 탓이었다. 뒤늦게 그게 무엇인지를 깨달은 안톤의 표정이 굳었다.

 

"넌... 처음부터 대통합인가 뭔가를 할 생각이 없었군?"

 

"눈치가 많이 늘었군요."

 

너무나도 쉽게 긍정하는 아르토르의 모습에 안톤은 혼란스러워졌다.

 

"어째서지? 네 목표는 관리자가 되어 대통합을 하는 것이 아니었나?"

 

"대통합이라... 원래는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게 제 원대한 소망이었죠. 혹시 관리자가 되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데이터를 멸망한 차원에서 끌어와 근시안적인 미래일 지라도 미래로 향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죠. 당신이란 방해물을 나는 넘어설 수 없었으니까."

 

자포자기하던 펠샤인과도 비슷한 사고 방식. 아르토르를 바라보는 안톤의 눈빛은 더욱 더 싸늘하게 변했다.

 

"그래서 모두 부서버리겠다 이건가? 웃기는군. 네가 생각하는 미래는 대체 뭐길래?"

 

안톤은 아르토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슷한 형태로 계속 반복되는, 언젠가 종말이 예정된 세계.

 

그게 뭐 그리도 중요한가.

 

안톤에겐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이런 세계에서도 충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고, 그 속해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는 고도의 문명이나 그런 것은 별반 중요치가 않았다.

 

하지만 아르토르의 생각은 달랐다.

 

"발전이 없는 미래는 미래가 아닙니다."

 

아르토르가 확고한 어조로 신념을 밝혔다. 그리고 이는 안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럴 리가. 그건 단지 너의 환상이다. 발전? 미래? 그 누구에게도 오늘 보다 귀중한 것은 없다. 네 방법은 잘못됐다. 과정은 물론이며 결과까지 옳지 않지. 그러니 나는 네 놈을 막을 것이다."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지어지는 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하얀 섬광이 터져나오며 빠른 속도로 공간이 수축되기 시작했다.

 

"이제 대화의 시간은 끝이군요."

 

"말하지 않아도 그래 보이는군."

 

서로의 신념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러니 이제 둘 중 누구의 신념이 옳은지를 겨눌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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