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는 것은 검 172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38회 작성일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72화
172. 선악
인기척 하나 없는 황궁. 복도에는 구겨진 갑옷과 핏물들만이 가득해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
황궁에 들어선 안톤은 적당한 긴장을 유지한 채 중심부로 향했다.
두웅! 두웅!
중심부로 점점 가까워질 수록 멀리서 들리던 무언가의 고동 소리는 커져갔다. 심장처럼 일정한 간격의 울림에선 왠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안톤은 고동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암만 황궁이 넓다곤 하나 전력으로 달리니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꽤나 늦었군요."
안톤이 대전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르토르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반겼다. 그는 무엄하게도 황좌에 발을 꼬고 앉은 채 안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르토르의 모습을 쓱 훑는 것도 잠시. 안톤은 대전의 중심에 그려진 마법진을 힐끗 바라보았다.
마법진에선 고동 소리와 함께 주기적으로 빛줄기를 하늘로 쏘아내고 있었다.
'일단 저 마법진부터 해결해야겠군.'
공간 왜곡을 시키는 보라색 안개를 없애는 게 급선무라는 판단. 안톤은 일단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대전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황좌가 있는 대전은 제국에서도 특히나 의미 있는 장소다. 헌데 지금은 그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마법진이 쏘아낸 빛줄기로 인해 박살난 유리 천장과 여기저기 흩뿌려진 그 파편들. 심지어 제국의 상징인 황좌에는 엉뚱한 인물이 유유자적하게 앉아 있다.
만약 황제가 제정신으로 이 모습을 본다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쓸데 없는 의문이군.'
안톤은 문득 생겨난 잡념들을 지웠다. 그리고 조용히 검을 출수할 준비를 끝마쳤다. 그런 안톤을 보며 아르토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말이 없습니까? 아, 혹시 제가 준비한 선물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겁니까?"
시종일관 예의바른 척 하지만 대놓고 사람의 속내를 긁는 듯한 말투. 안톤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마치 부모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날뛰는 애 같군."
안톤의 직설적인 감상평에 아르토르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까드득. 어째선지 귀로는 그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반응을 내게 기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 알려주지. 네가 보낸 암살자는 죽었고, 카린은 죽지 않았다."
안톤의 이어진 말에 아르토르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였군요. 당신이 이토록 무덤덤했던 것은. 뭐, 됐습니다. 그건 처음부터 유흥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애써 아무렇지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톤은 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마법진을 향해 일보를 내뻗었다. 예상치 못한 일들에 휘말리느라 예정보다 이 장소에 늦게 도착하고 말았으니, 지금이라도 어서 서둘러 저 마법진을 박살내 버려야 한다.
그렇게 막 검을 출수하려던 찰나였다.
"그 장치를 건드시려는 생각이라면, 그만 두시는 게 좋습니다."
"허튼 수작을 또 부리려는군."
잠시 멈칫했던 안톤이 검을 어깨 뒤로 잡아당겼다. 힘을 실어 찌르기 위한 자세였다. 지켜보던 아르토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곳에 오는 동안에 평원에서 얼마나 죽었는지 아십니까?"
설득의 말을 꺼낼 줄 알았는데, 영 뚱딴지 같은 소리였기에 조금은 의외였다. 대체 이번엔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건지 궁금증이 돌기도 했으나, 그 동안 아르토르에게 당한 게 많았던지라 안톤은 그가 더 말을 이어가기 전에 앞으로 검을 냅다 찔렀다.
휘이익!
안톤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쏘아졌다. 목표지는 신안으로 미리 확인해 두었던 마법진의 핵 부분이었다. 그 어떤 마법진이라도 중심이 되는 핵이 파괴되면 무용지물이란 걸 안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
핵과 안톤의 검이 맞닿는 순간 엄청난 반발력이 검을 타고 전해졌다.
콰콰쾅!
"그러게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언제든 제 말을 듣는 법이 없군요."
뒤로 날아가 벽에 부딪친 안톤을 보며 아르토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크흡!"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안톤이 피를 한 움큼 게워내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하늘 높이서 떨어져도 멀쩡할 정도로 단단한 몸뚱이가, 고작 반발력에 이렇게까지 내상을 입다니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안톤은 신안을 통해 정확히 결을 노리지 않았던가. 원래라면 이렇게 충격이 전해지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르토르가 황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삼십 만 명."
말의 요지가 무엇인지 짐작치도 못할 만큼 뜬금없는 말. 안톤이 가만히 서서 노려보자 아르토르가 싱긋 웃었다.
"아까 제가 당신에게 했던 질문의 답입니다. 마법진이 흡수한 영혼을 보니 얼추 그 정도 되더군요. 당신이 이곳까지 오는 동안에 삼십 만 명 가량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책임감이라도 느끼며 괴로워하라 이건가? 그렇다면 한참 잘못 짚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내가 아니라 너다. 아르토르."
그런데 아르토르는 안톤의 추측이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려고 한 말이 아닙니다. 그냥 알고 있으라는 겁니다. 왜냐면 방금 당신의 검을 막아내느라 수만 명의 영혼이 공중에서 소멸했거든요."
"소멸...?"
"네. 이제 그들은 불쌍하게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환생과 윤회, 그런 건 이제 그들에겐 없다는 말이죠. 그래도 대단합니다. 고작 한 번 검을 찌른 것만으로 수 만 명의 영혼을 소멸시키다니, 역시 운명을 집어던졌다 해도 집행자는 집행자로군요?"
아르토르의 비아냥에 안톤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단순히 안톤에게 심리전을 거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다.
"설마 또 달려들려는 건가요? 무려 수십 만 명의 영혼이 응축된 데이터입니다. 자칫하다간 당신의 몸이 먼저 부서질 뿐더러... 되도 않는 대의만을 믿고 전장에 끌려온 병사들의 영혼을 정말로 당신 손으로 없애 버릴 생각입니까?"
안톤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아까의 내상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입술을 너무 꽉 깨문 탓에 상처가 생기고 만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르토르는 상대할 때면 늘 이랬다.
반드시 선택지를 앞에 두고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했다.
얼마 전 카린에게 암살자를 보냈던 것도 그러한 것 중 한 가지였고, 과거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친을 살리기 위해 친부를 두고 도망쳐야만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그 일이 반복됐다. 안톤은 선택해야 했다. 결국 아르토르가 말한 대의란 말로 포장된 그 빌어먹을 선택을.
안톤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 넣었다.
"그런 선택을 했군요. 하긴, 모든 책임은 내게 떠넘기면 되니까. 당신으로선 당연한 선택이었을까요?"
"닥쳐라."
"하하! 애 같은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인 것 같군요."
"일단 네놈의 입부터 찢어주마."
마법진이 아닌 아르토르를 향해, 안톤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눈으로 쫓기 힘들 만큼 잽싼 움직임이었고, 그렇게 안톤의 검은 문제 없이 아르토르에게 닿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때.
파지직.
하늘을 향해 뿜어지던 빛줄기가 방향을 틀어 안톤을 덥쳤다.
* * *
"정신이 들었군요. 다행입니다. 아무리 저라도 이 공간을 오래 유지할 순 없거든요."
마치 구름 위를 나는 듯한 부유감. 아르토르의 목소리를 들으며 안톤은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온통 흑색 일통인 공간. 다만 곳곳에 알록달록한 색감을 지닌 거대한 원형의 바위가 떠다니며, 저 아득히 먼 곳에선 은색의 빛이 수천 수만 개가 마치 별처럼 콕콕 점찍힌 찍혀 있다. 마치 지상에서 올려다 보던 밤하늘 같았다.
그 광활하면서도 장대한 경치에 넋을 잃는 것도 잠시. 안톤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현 상태를 점검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움직이는 것은 가능했다. 다만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이다.
애석하게도 안톤은 그 사실을 평소처럼 발을 내뻗은 후에야 깨달았다.
'젠장!'
아르토르에게 달려들기 전력을 실은 일보. 허나 이곳은 밟 디딤대 하나 없는 허공이었기에 안톤은 그대로 균형을 잃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근데 진짜 문제는 기울어진 몸체가 멈추지 않고 제자리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암만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아르토르가 안톤을 바라보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아하하! 이거 정말 진귀한 구경을 하는군요! 그렇게도 제가 죽이고 싶었습니까?"
전신을 덮는 모멸감에 안톤은 어떻게든 몸을 멈추기 위해 아둥바둥 움직였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럴 수록 가속도만 붙을 뿐이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은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으니 그대로 들으십시오. 차분히 대화를 나누기 위해 기껏 이 장소를 택한 것이니까. 아, 근데 그 꼬락서니를 보면 차분한 대화는 역시 무리려나요?"
아르토르가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순간, 안톤이 기합과 함께 몸을 크게 비틀었다. 그러자 제자리서 빙빙 돌던 그의 몸체가 정확히 멈춰섰다.
그 모습을 보며 아르토르는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그 사이에 이곳에 물리 법칙을 이해하고 정확한 힘을 주다니, 정말 어찌된 운동 신경인 건지..."
물론 그런 감탄사에 안톤의 기분이 나아질 일은 없었다. 안톤은 대꾸도 않고 매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보며 물었다.
"이번엔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차분히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안톤이 코웃음쳤다. 아르토르는 이와 같은 말을 저번에 황궁 지하 예배당에서도 했다. 기본적으로 아르토르는 절대적으로 신용할 수 없는 남자다.
"네가 여태껏 해온 일들이 있는데 내가 그걸 믿을 것 같나?"
"믿건 말건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이곳에서 당신은 내게 해를 입히지 못하니까."
"자신감이 대단하군."
안톤은 검을 들었다. 물론 그가 아르토르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거리는 충분히 안톤의 검이 닿고도 남는다.
좌에서 우로, 안톤의 검이 휘둘러졌다. 헌데 검에 실린 거대한 기세가 무색하게, 그 과정에선 어떠한 소리도 피어나지 않았다.
그것에 이상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아르토르를 향해 초승달 형태로 쏘아지던 안톤의 검격은 무언가 벽에 막힌 듯, 아니 무언가에 흡수라도 된 것마냥 사라졌다.
"소용 없습니다. 그곳과 이곳은 아예 다른 차원입니다. 지금 나누는 대화도 사실 소리로 주고 받는 대화가 아니지요."
안톤이 뭔가 질문하기 위해 재차 입을 열려던 때. 아르토르가 한발 앞서 그의 말을 사전에 끊어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 건 알겠지만, 이제 그만입니다. 아쉽게도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습니다. 그러니 어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요. 자, 제가 당신을 이곳까지 불러낸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걸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르토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발 아래의 공간이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