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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68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847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68화

168. 택일

 

 

"뭐, 뭐야 저건!"

 

"으아아아아! 도망쳐!"

 

보라색 안개가 아트렌 평원을 뒤덮은 후 거대한 혼돈이 도래했다.

 

화산구, 초원, 밀림 등등. 뒤틀린 차원 왜곡으로 인해 몇 걸음마다 뒤바뀌는 공간.

 

허공에서 눈먼 화살과 칼이 난무했고, 수 많은 병사들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병기에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 병사만이 아니었다.

 

마나를 수련한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암만 그들이라곤 해도 갑자기 눈앞에서 튀어나온 서슬퍼런 날을 피하진 못했다.

 

이 해괴한 공간에선 개개인의 실력은 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이곳에서 이들의 생사를 결정 짓는 것은 오로지 운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린디아스는 운이 좋았다. 보라색 안개가 평원에 내려앉고 머지않아 케이혼을 만나 합류할 수 있었으니까.

 

"하아아앗!"

 

케이혼의 축복을 받은 린디아스는 보다 쉽게 적을 해치웠고, 설령 부상을 당한다 해도 신성력으로 인해 금세 치료됐다.

 

"이제 여기가 어떤 곳인지 좀 알겠어요. 사람들을 더 모아야 해요."

 

어느 정도 적응을 끝낸 린디아스는 닥치는 대로 아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병사들에게 방패를 쥐어주고 대형을 짜 함께 움직인다면 이 끔찍한 곳에서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리란 판단이었다.

 

그 판단은 옳았다.

 

한 구역을 점거해 이를 중심으로 수비 진형을 트니 한결 버티기가 수월해진 것이다.

 

"다들 힘을 내요! 버티다 보면 모두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언제 이런 경험을 해봤는지는 모르겠다만, 능숙하게 병사들의 기를 복 돋아주는 린디아스를 보며 케이혼이 중얼거렸다.

 

"부디 말처럼 잘 됐으면 좋겠는데..."

 

그는 불안했다.

 

총합 백 만 명이 모인 전투다. 당연히 그 중에는 마스터도 다수 껴 있다.

 

이런 혼잡한 전장 속에서도 그들이 애먼 칼에 목숨을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 그들은 제각기 홀로 남아 호랑이처럼 학살을 벌이는 중일 터.

 

아무리 이렇게 잘 버티고 있다곤 해도, 마스터가 한 사람만 있어도 이런 진형 쯤이야 금방에 박살나리라.

 

"후! 결국 마주치지 않길 바라는 수 밖에 없는 건가."

 

설령 마스터가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이 아군이길 바라며 케이혼은 계속해서 기도했다.

 

이에 부상을 입은 아군들의 상처가 낫는 기적은 있었으나, 결코 신은 그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마스터다! 도망쳐!"

 

콰콰쾅!

 

단 일격으로 붕괴된 수비 진형.

 

굉음이 피어난 곳으로 케이혼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그가 안면 있던 자가 연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테피로스 혼트 파이오니아.

 

제국의 7황자이자 마스터.

 

'아넨. 당신은 늘 제게 큰 시련을 주시는군요.'

 

케이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신이 자신에게 이 시련을 무사히 넘길 힘도 함께 주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 * *

 

인기척 하나 없이 적막한 도시.

 

벽이고 땅이고 진득한 피가 덕지덕지 붙어 흐르고 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사람의 옷가지들은 피와 함께 널브러져 있으나, 시체는 단 한 구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

 

"..."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코를 찌르는 피 비린내에 안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현재 오르메넨을 안고서 황궁을 향해 질주하는 중이었다.

 

"...정말로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죽은 걸까요?"

 

품에 안긴 오르메넨이 참담함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고, 안톤은 대답하지 않았다.

 

"..."

 

비록 시체는 없지만 피는 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분명 그녀의 질문처럼 되었을 것이다.

 

문득 입술이 쓰게 느껴졌지만 그럴 수록 안톤은 묵묵히 발길에 힘을 실었다.

 

저기 앞에 황궁에서 쏘아진 빛줄기는 여전했고, 계속해서 하늘에선 보라색 안개들이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그러니 지금 안톤이 해야할 일은 희생된 자들을 향한 애도가 아니라, 어서 저것을 막아 더한 희생들을 막아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가던 안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앞에서 누군가가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거대한 도끼를 양손에 집어든 2m는 훌쩍 넘는 거구의 남성. 쟈카론이었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금방 끝내리다."

 

오르메넨을 땅에 내려주고서 쟈카론을 지그시 바라보던 안톤은 조용히 검을 치켜들어 그에게 겨누었다.

 

예전에 그를 대적할 때와 같은 긴장감은 손에 맴돌지 않았다.

 

"정말로 너 혼자서 왔나?"

 

안톤의 질문에 쟈카론이 실소를 내뱉었다.

 

"크큭. 나도 어지간히 얕보인 모양이군. 아무튼 질문에 답해주자면 혼자는 아니다. 탈티온!"

 

쟈카론의 부름에 중무장한 기사가 나타났고, 그의 얼굴을 확인한 오르메넨이 크게 소리쳤다.

 

"성주님!"

 

탈티온 베니체른. 이제는 쟈카론의 종이 되어버린 오르메넨의 옛 주군.

 

안톤이 염려스런 눈빛으로 오르메넨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그녀의 눈망울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만약 안톤이 제때 팔목을 잡아챈 것이 아니라면 당장에라도 달려 나갔을 지도 몰랐다.

 

"괜찮소?"

 

안톤의 질문에 오르메넨이 이를 악 물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일을 그르칠 생각은 없으니까. 대신 성주님은 제가 맡을게요. 꼭 그렇게 해주세요."

 

"...그렇게 하리다."

 

고개를 끄덕인 안톤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겨우 이게 끝이라면, 넌 오늘 이 자리서 죽는다."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를 듯한 살벌한 기세가 안톤의 몸에서 풍겨나왔다. 허나 쟈카론은 능청스럽게 귀를 후벼팔 뿐이었다.

 

"알고 있으니, 귀 아프게 그만 말하겠나?"

 

그런 그를 보며 안톤도 깨닫는 것이 있었다.

 

"너... 죽을 작정으로 이곳에 왔군."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르토르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했고, 널 상대로 시간을 끌려면 목을 몇 개는 더 걸어도 모자라니까."

 

안톤이 입술을 깨물었다.

 

도무지 이러한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설마 이 와중에도 아르토르의 목적이 뭔지 모르고 있는 건가?"

 

"시간을 끌어야 되는 나로선 좋은 일이지만 생각보다 말이 많군."

 

"질문에 대답해라."

 

쟈카론이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대체 뭘 확인하고 싶나? 사실 그 자식이 동료들을 해쳤고, 이제는 단지 세계를 무너뜨릴 생각 밖에 없다는 걸 아느냐고 묻고 싶은 건가?"

 

"그걸 알면서도 왜..."

 

쟈카론이 안톤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왜냐면 그딴 건 상관없으니까. 난 그저 이 무료한 세상이 조금 더 재밌어졌으면 좋겠다 싶을 뿐이다. 그러니 더 지루해지기 전에 슬슬 시작해 보자. 자! 와라!"

 

쟈카론이 양손에 쥔 도끼를 교차되도록 자세를 잡았다. 시간을 끌겠다는 아까의 말처럼 수비에 집중할 생각인 듯했다.

 

'어쩌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는데, 모두 시간 낭비였군.'

 

대화를 나누느라 버린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첫 수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맘 먹은 그 순간, 안톤의 검면에 비친 빛이 번쩍였다.

 

휘잇!

 

직선으로 찔러진 검이 쟈카론의 도끼 날을 꿰뚫으며 그의 왼쪽 어깨에 틀어박혔다. 허나 살이 짓물리는 통증에도 쟈카론은 포효하듯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크하하! 좋구나!"

 

쟈카론이 오른손으로 도끼를 내리쳤고, 안톤은 검을 그대로 위로 빼내며 뒤로 물러났다.

 

슈웅!

 

허공을 가르는 도끼날과 함께, 쟈카론의 왼팔이 공중에 치솟았다. 뒤로 물러났던 안톤은 잠시의 틈도 없이 당겨진 활의 시위처럼 잽싸게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푸슉.

 

"설마 이 정도까지 격차가 벌어졌을 줄이야... 커헉!"

 

복부에 검이 틀어박힌 쟈카론이 피를 한움큼 게워냈다. 그리고 그 순간, 황궁 방향에서 노란색 신호탄이 쏘아올려졌다.

 

이를 본 쟈카론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크흐흐... 크핫! 하하하하!"

 

"이런 게 그렇게 즐겁나?"

 

"크하핫! 즐겁다! 너무나 즐겁다! 길었던 생애 중에 이토록 즐거웠던 적이 언제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즐겁다!"

 

환희에 물든 쟈카론은 몸까지 바르르 떨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안톤이 중얼거렸다.

 

"완전히 미쳤군."

 

"크하하하! 이 세상에 미치지 않은 악당이 어디 있을까! 근데 그래서 묻는 말인데 안톤! 혹시 영웅이란 늘 희생과 선택을 강요받기 마련이란 걸 알고 있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쟈카론이 실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방금 전 신호탄은 아르토르가 보낸 암살자가 장소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암살자라고?"

 

안톤이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신안을 열고 곳곳을 살폈지만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런 안톤을 비웃듯 쟈카론이 고개를 저었다.

 

"키킥. 너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름이 뭐였더라? 카린이라고 했나... 크헉!"

 

카린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안톤은 복부에 박혀있던 검을 뽑은 뒤, 쟈카론의 목에 겨누었다. 안톤의 눈은 무시무시한 불길을 담고선 타오르고 있었다.

 

"혹여 카린에게 뭔 일이 생긴다면..."

 

"그럼 뭐 죽여버리겠다고? 언젠 아니었나? 크크큭."

 

'젠장!'

 

협박할 수단이 없음을 깨달은 안톤의 표정이 굳었고, 이를 본 쟈카론이 낄낄 거리며 물었다.

 

"아마 당장 트릭씰을 타고 이동한다면 무사히 구해낼 수 있겠지. 허나 대신... 아르토르를 막진 못한다. 자, 네놈은 이제 무슨 선택을 할 테냐?"

 

양자택일.

 

안톤은 다시 이 갈림길에 서고야 말았다.

 

마치 운명처럼.

 

 

* * *

 

그 시각.

 

해린 왕궁 실내 정원에는 핫산과 카린이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주 화제는 지금 한창 벌어지고 있을 대전투에 관한 것이었다.

 

"안개가 퍼진 후부터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으니 갑갑하군."

 

"너무 걱정 마세요. 언제나 그렇듯 그 사람은 잘 해낼 거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후! 이 역사적인 순간에 이렇게 혼자만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하다니, 왜 내가 검을 더 수련하지 않았는지가 후회되는구려."

 

핫산의 칭얼거림에 카린이 처연하게 웃었다.

 

사실 그녀도 핫산과 어느 정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그녀지만, 안타깝게도 이제는 소중한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근데 서로의 분야가 다른 걸 어쩌겠어요. 그저 믿고 기다릴 수 밖에요..."

 

"믿고 기다린다라... 하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겨우 그 정도 뿐이겠지..."

 

핫산이 말꼬리를 흐리며 대화가 잠시간 끊겼다.

 

우중충해지려는 분위기를 감지한 카린은 자연스레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오늘은 궁이 유난히 조용한 것 같은데, 뭔가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딱히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최소 인원만 둔 채 나머지는 오늘 하루 푹 쉬라고 일러두었소. 만약 우리들이 실패한다면 오늘이 마지막 날인 셈인데... 이런 날엔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야하지 않겠소?"

 

"소중한 사람이라... 그건 그렇네요. 잘 하셨어요."

 

"하하! 이런 날에 카린 경 앞에 있는 것이 안톤이 아닌 나라 미안하게 됐구려."

 

"아니에요. 오늘이 최후의 날일리도 없는데다가... 핫산 님도 제겐 소중한 사람들 중 하나니까요."

 

말을 내뱉고 나서도 다소 멋쩍었는지 카린이 찻물을 호로록 들이키며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이는 핫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또 침묵의 시간이 이어지던 때였다.

 

실내 정원으로 이루어지는 외문이 소란스럽게 열렸다.

 

적막함이 길었던 만큼, 그 소란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국왕 전하 얼른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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