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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것은 검 164화

무료소설 내가 믿는 것은 검: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986회 작성일

소설 읽기 : 내가 믿는 것은 검 164화

164. 여심

 

 

예리한 검날이 목의 살갗을 찢으며 멈춰섰다.

 

약 한 치 가량만 더 깊게 파고들었다면 그대로 절명했을 상황이었으나, 페르트는 침착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러한 대검을 쓰는 자라면 내가 알기로 한 명 뿐이지. 생각보다 늦게 왔군."

 

페르트의 붉은 동공이 안톤을 직시했다.

 

그의 눈은 세뇌를 당한 여타 병사들과는 명백히 달랐다. 탁하지 않고 생기가 느껴졌다. 즉 그가 세뇌를 당하지 않았다는 뜻.

 

그런데도 이와중에 이렇게도 침착할 수 있다는 게 안톤은 이해할 수 없었다.

 

"펠샤인은 어디있지?"

 

"역시 공주님을 뵈러 온 건가? 그럼 일단 이 검은 치우지."

 

안톤의 질문에 페르트가 손을 들어 검면을 잡고 앞으로 밀어냈다. 허나 안톤이 꽉 쥐고 있는 검은 밀려나지 않았다.

 

안톤은 오히려 검을 목에 더 갖다대며 입을 열었다.

 

"말 장난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페르트의 목덜미를 타고 또르르 핏물이 떨어진다.

 

제법 쓰라릴 법도 한데, 페르트는 그저 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헌데 이 상태로 안내를 할 순 없는 노릇이지 않나."

 

"..."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보며 잠시 고민하던 안톤이 결국 검을 거두었다.

 

뭐, 사실 제압을 하던 그렇지 않던 별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이미 이 거리에 있는 이상, 안톤이 마음을 먹는 순간 그는 죽는다.

 

"부디 쓸데 없는 짓은 하지 않길 바란다."

 

"그거야 말로 쓸데 없는 질문이군. 어서 가지. 공주님께서 한참이나 기다리셨다."

 

그 말에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기에, 안톤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기다렸다고? 도대체 왜지?"

 

"글쎄. 그건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군."

 

이를 끝으로 페르트는 안톤에게서 서슴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

 

안톤도 어쩔 수 없이 일단 그를 따라갔고, 이내 도착한 곳은 페르트의 집무실이었다.

 

면적은 넓지만 별 가구나 집기가 없어 한적한 분위기가 흐르는 방.

 

이를 둘러보던 안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분명 펠샤인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 말은 반드시 지켜진다. 그러니 앉아서 잠시 기다리겠나?"

 

"..."

 

잠시 상황을 더 지켜보자 결정한 안톤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페르트는 책상 서랍에서 수정구를 하나 꺼내 안톤의 앞에 내려두었다.

 

이게 뭔가 싶던 안톤이 뒤늦게 이 수정구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건가?"

 

"오히려 그건 당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설마 내가 당신같은 괴물을 공주님께 데려갈 거라 생각했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군."

 

"분풀이로 날 죽이겠다 해도 상관없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암만 그래도 내가 공주님께 널 데려갈 일은 없으니까."

 

등을 돌리고 태연하게 찻물이나 우리고 있는 페르트의 목소리엔 고저도 떨림도 없었다.

 

죽음 따윈 아무렇지 않다는 초연한 저 태도가 정말로 그의 진심이었다.

 

안톤의 표정이 구겨졌다.

 

죽음에 대해 달관한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다른 한 가지는 도무지 그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펠샤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거지?"

 

안톤의 물음에 페르트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게 내 운명이니까."

 

사도도 아닌 주제에 운명을 논하다니, 집행자의 운명을 갖고 태어나 갖은 일을 겪은 안톤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어느새 찻물을 다 우린 페르트가 찻잔에 따라 이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그래서 날 죽일 건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쉰 안톤이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당신을 죽여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어서 펠샤인과 연결이나 해라."

 

"그러지."

 

페르트가 수정구를 만지고 뭔가 조작을 하자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무리가 잦아들자 텅 비어있던 수정구 안에서 펠샤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네요. 안톤."

 

차분하면서도 어째선지 고혹스럽게만 들리는 목소리.

 

수정구 속의 펠샤인은 초승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안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안톤이 문득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잠시 까먹을 정도였다.

 

"후! 그래... 당신 말대로 오랜만이긴 하지."

 

"꽤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이네요?"

 

천연덕스러운 태도의 펠샤인을 보며 안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오?"

 

"으음. 그럼 역시 직접 만나지 않은 건 잘한 선택이였네요. 내심 고민을 많이 했었는..."

 

"잡설은 집어치우고 이만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어떻소?"

 

안톤이 목소리를 내리 깔며 펠샤인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그러자 펠샤인도 장난스런 태도를 버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안톤을 훑었다. 어째선지 그녀의 눈빛엔 희미한 적대심마저 실려있는 듯 했다.

 

"본론이라... 그러고 보면 당신은 항상 이런 식이었죠. 좋아요. 그럼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본론으로 넘어가 봐요."

 

안톤은 그녀를 만나고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질문을 날렸다.

 

"대체 왜 날 배신했소?"

 

"그냥 서로의 목적이 달랐다고 해두죠."

 

딱 잘라 말하는 펠샤인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모순이 존재했다.

 

"그렇다기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말이오. 애초에 목적이 달라서 처음부터 날 배신할 작정이었다면, 왜 그동안 나를 도운 것이오? 겨우 신뢰를 쌓으려고 그런 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집요함이 느껴지는 안톤의 물음에 펠샤인이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이제와서 그게 중요한가요?"

 

안톤이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주 중요하지. 펠샤인, 대체 당신의 목적은 무엇이오?"

 

"...여인의 비밀을 맨입으로 들으려는 건가요?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뻔뻔한 건 매한가지군요."

 

"괜히 말 돌리리지 마시오. 내가 멍청이로 보이오?"

 

펠샤인이 코웃음 쳤다.

 

"항상 타인에게 관심없이 살아와 놓고선 이제와서 왜 그게 궁금해진 건데요? 아, 이젠 내가 적이니까? 그래서 정보가 필요하니까?"

 

비아냥이 가득 실린 말에 안톤이 입을 꾹 다물었다.

 

펠샤인의 목소리와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했고, 그 이유를 안톤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침묵하는 안톤의 태도가 더욱 맘에 들지 않았는지, 펠샤인은 계속해서 비난의 말을 쏘아냈다.

 

"정말 내가 봐도 당신은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사람이에요. 세상을 구하겠다는 그 잘난 목적이 사라지면, 그땐 당신에게 남는 게 뭐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나를 그렇게까지 증오하는 것이오?"

 

"당신을 증오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갖고 싶은 것 만큼은 절대 손에 쥐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이 미운 거지."

 

"그게 무슨 소리요...?"

 

"아까 내 목적이 뭐냐고 물었죠? 간단해요. 난 이 세계가 부서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르토르를 돕기로 한 것이오?"

 

"네. 어차피 거짓된 세계라면서요? 그 얘기를 들으니 나는 왜 이런 가짜 세계에서 이렇게까지 고통 받으며 살아가나 싶더군요."

 

"근데 왜 날 도우려 한 것이오? 아르토르마저 처음에 당신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었소. 이는 적어도 그전까지는 그에게서 마음을 돌려 날 도우려 했다는 뜻이지. 헌데 그런 당신의 심경은 변했소.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소."

 

격해진 감정에 떠밀려 거침없이 속내를 쏟아내던 펠샤인이 처음으로 대답하길 망설였다.

 

"그건... 당신은 말해봤자 몰라요.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말해주어야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난 당신을 돕고 싶소. 그러니 당신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시오."

 

안톤의 진심이 가득 담긴 눈길이 펠샤인을 향했다.

 

서투르고 무뚝뚝하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 만큼은 진짜였다.

 

그렇기에 펠샤인은 아까 안톤이 그랬듯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침묵은 한동안 이어졌고, 안톤은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마침내 펠샤인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늘 비겁해요."

 

내용은 비난을 싣고 있었으나, 체념한 듯한 목소리에서 안톤은 그녀가 마음 속 응어리를 어느 정도 털어냈음을 눈치챘다.

 

따라서 안톤도 내심하고 있던 긴장을 풀었다.

 

"사실 나도 최근 들어 그런 생각을 자주하고 있었소."

 

넉살 좋게 말하는 안톤을 밉다는 듯 째려 본 펠샤인이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물어본 것들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을 거예요. 난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게다가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로웠는지 당신에게 말하는 건 내겐 더 괴로운 일이에요."

 

"정 그렇다면... 당신의 결정을 존중하리다. 대신 볼-메이르에서 하려던 일들은 모두 그만둬 주지 않겠소? 그런 방식은 결국 스스로의 삶을 망가트리는 일 밖에는 되지 않소."

 

"알았어요. 어차피 난 이제 이 일에서 발을 뺄 생각이었으니까. 왠지 당신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갑자기 모든 게 부질없게만 느껴지네요."

 

"잘 생각했소. 그럼 나와 같이 가겠소?"

 

"아까 내가 한 말을 못 들었어요? 나는 완전히 떠날 거예요. 아마 오늘이 지나면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흐르든 당신과는 만날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선물을 줄 게요."

 

"...선물?"

 

"터놓고 말해요. 당신이 날 찾아온 건, 궁지에 몰린 아르토르의 향후 계획이 궁금해서였잖아요?"

 

어딘가 씁쓸하게만 들리는 말이었지만, 안톤은 반박할 수 없었다.

 

 

* * *

 

이윽고 시간이 더 흘러 길었던 대화가 끝이 났다.

 

펠샤인의 모습을 비춰주던 수정구에서 불빛이 꺼졌고, 그 즉시 훈련소 밖으로부터 기괴한 함성 소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자유를 되찾은 병사들의 외침 소리였다.

 

'이렇게 약속을 지킨 걸 보니 다시 배신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속으로 안도하던 안톤을 향해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페르트가 다가왔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고맙다곤 하지 않겠다. 대신 더 이상 당신을 부러워하는 일도, 미워하는 일도 없을 거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안톤의 반문에 페르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속에서 끓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만큼 대화를 나누고도 공주님의 마음을 못 알아 챈 건가? 눈치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당신은 정말 형편 없는 남자군."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집무실을 떠나려는 페르트를 안톤이 잡아 세웠다.

 

"잠깐, 어디로 가려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닌가? 공주님에게로다."

 

"아까 그녀와 나눈 대화를 듣지 못하기라도 한 건가? 어차피 내가 실패하면 세계는 끝장 난다."

 

"그러니까 더더욱 공주님의 내가 옆에 있어하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게 아니라면 이만 보내주겠나? 한시라도 빨리 곁에 모시러 가야만 한다."

 

"그렇군."

 

"왜, 여전히 이런 날 이해 할 수가 없나?"

 

페르트의 물음에 안톤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안톤이라도 이젠 알 수 있었다.

 

펠샤인을 향한 페르트의 감정이 결코 충성 따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런 안톤을 보며 페르트가 피식 웃었다.

 

그것은 안톤이 처음으로 목격하는 그의 미소였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나처럼 그저 다른 것에 눈이 멀었을 뿐이었나? 어쩌면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남자는 아니었을지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려 안톤을 바라본 페르트가 문을 열고 떠나갔다.

 

혼자 남은 안톤은 생각해 보았다. 방금 그가 말한, 자신의 눈을 멀게한 것이 무엇이었을 지를.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난 안톤이 앞으로 걸음을 내뻗었다.

 

아주 홀가분한 일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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