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죽이러 갑니다. 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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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을 죽이러 갑니다. 40화
신을 죽이러 갑니다 40화
시간의 탑 (24)
은신이라니.
무혁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배영철의 스킬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은신은 굉장히 까다로운 스킬이다.
보이질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기 마련이니까.
만약, 배영철이 이토가 아닌 자신의 목을 노렸다면?
생각만으로도 무혁은 뒷목이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죽였어야 했어.’
무혁은 기회가 되었을 때, 배영철을 죽이지 못한 것을 이렇게 후회하게 될 줄 몰랐다. 물론, 지금 이런 후회를 하는 건 당장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코우 신지와 하가세가 더욱더 컸다.
‘세상 근심 걱정은 다 짊어지고 있네.’
무혁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코우 신지와 하가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그 개자식을 진즉에 죽였어야 했어!”
하가세가 분통을 터트리며 그 책임이 코우 신지에게도 있다는 걸 분명히 전달했다.
“내 잘못이다.”
절대적인 우군이었던 이토마저 없는 이상 코우 신지는 하가세와 더 이상 감정을 상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기에 무조건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현실이 그렇기도 했거니와, 지금은 하가세와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배영철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를 의논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제 어쩔 셈이지?”
코우 신지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며 책임에 대한 큰 죄책감을 보이는 이상 하가세도 구태여 그와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없다 여겨 대책 마련에 나섰다.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계단을 찾아야지.”
우선은 계단부터 찾는 것이 급선무다.
배영철의 기습이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계단 찾는 일을 뒤로 미룰 순 없었다.
“젠장! 시간을 끄는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빠르게 계단을 찾았다면 이토가 죽지 않았을까?
장담할 순 없지만, 하가세는 지금보다는 상황이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결국 또다시 무혁과 안소영으로 하여금 계단을 찾으라며 전방에 세웠던 코우 신지의 계획이 이런 사달을 일으켰다고 확신한 하가세의 누그러들었던 화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그것도 내 잘못이군.”
코우 신지가 살짝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계획을 세웠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하가세였다.
그런데 이제와 모든 탓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으니 짜증이 살짝 치밀어 올랐다.
코우 신지는 하가세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이제와 누구 탓이네- 하는 책임론은 그만 하자는 의미의 눈빛을 보냈다.
“젠장! 빌어먹을!”
하가세가 거칠게 고성을 터트리며 화를 삭였다.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코우 신지가 무혁과 안소영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 둘은 후방을 맡는다. 배영철…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쉽사리 기습을 할 수 없도록 쉬지 않고 허공에 무기를 휘두른다.”
“뭐라고?”
무혁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코우 신지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사납게 치켜뜨다가 이내 작게 숨을 토해내고는 대꾸했다.
“우리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그땐 너희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걸 알 텐데?”
배영철과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걸 꼬집어 말하는 코우 신지였기에 무혁도 크게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부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배영철이는 주적이 생겼기에 코우 신지는 최대한 무혁과 안소영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 대가로 코우 신지는 무혁과 안소영에게 빼앗았던 탑의 증표를 다시 돌려주었다.
“무사히 계단을 찾기만 한다면 이토의 몫을 너희에게 나눠주마.”
확실한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코우 신지에게 무혁이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줄 거라면 지금 줬으면 하는데?”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탑의 증표부터 챙기려는 무혁의 모습에 코우 신지는 참 한결같이 뻔뻔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죽은 이토가 모아 둔 탑의 증표를 순순히 건넸다.
설마 진짜로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무혁은 의외라는 듯 입을 동그랗게 말아 보이고는 이천 여개에 가까운 증표가 담긴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단단히 허리춤에 매달았다.
“반으로 정확하게 나눠줄게.”
안소영은 알아서 하라는 듯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충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야 코우 신지와 하가세가 좀비들을 쓰러트리며 빠르게 길을 열기 시작했다.
무혁과 안소영은 후방에서 애먼 허공에 도끼와 칼질을 해댔다.
은신은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무작위로 허공에 무기를 휘둘러대면 배영철이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다.
무기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무언가를 투척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피해를 입을 순 있지만, 단숨에 목숨을 끊어버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 그 정도의 피해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이런 개고생을 하게 될 줄 알았다면 배영철 그 새끼한테 위치 추적 스킬을 걸어 놓는 거였는데…….’
사냥꾼 포지션인 무혁으로서는 애초에 배영철에게 위치 추적 스킬을 걸어두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래서인지,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해서 무혁은 코우 신지와 하가세, 안소영에게까지 위치 추적 스킬을 걸어두었다.
‘그나저나 배영철 이 새끼라면 분명 어디선가 보고 있을 텐데.’
무혁의 생각처럼 배영철은 멀지 않은 곳에서 숨죽인 상태로 무혁과 안소영 등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아… 저 병신 새끼가 끝까지 말썽이네!’
제아무리 배영철이라 하더라도 무혁과 안소영을 뚫고 코우 신지나 하가세에게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손쉽게 죽일 수 있는 하찮은 벌레 같은 존재라 여겼던 무혁과 안소영이 자신의 계획을 막고 있자 짜증이 일었지만, 어차피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는 걸 알기에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 저렇게 있을 순 없을 테니까.’
오히려 저런 행동으로 체력이 고갈되면 그땐 더 쉽게 죽일 수 있었으니 배영철은 오히려 좋게 생각하기까지 했다.
배영철의 생각처럼 무혁과 안소영의 체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졌다.
의욕적이었던 처음과 다르게 30분이 지나고, 1시간, 2시간에 가까워지자 숨소리도 거칠어졌고 무기가 허공을 가르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고, 그 간격도 넓어졌다.
코우 신지가 몇 차례나 지적했지만 소용없었다.
“이게 쉬운 줄 알아? 우리가 무슨 기계도 아니고 이젠 정말 더 이상 못 해.”
무혁이 끝내 쉬어야 한다며 바닥에 주저앉자, 코우 신지도 그것이 단순한 엄살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하가세와 함께 주변을 경계하며 어느 정도 휴식을 갖기로 했다.
“탑에 들어서기 전부터 배영철과는 꽤 인연이 있는 것 같던데?”
하가세가 침묵이 싫은지, 무혁에게 배영철과의 관계를 물었다.
“더러운 악연이지.”
무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침을 퉷- 하고 뱉었다.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헬-라시온이라는 낯선 곳에서 똑같은 극한의 공포를 맛보며 생존 하나에만 매달리다 보니 알게 모르게 서로 끈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서로 다른 국적인 코우 신지나 하가세와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일주일 동안 함께 생존하며 같은 감정을 공유했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연이라도 있었던 건가?”
딱히 궁금하진 않았지만, 어색한 침묵이 싫은 건 코우 신지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렇게 물었다.
누구라도 조잘거리는 사람이 있어야 그나마 딱딱한 긴장감이 풀어진다 여겼다.
“사연이야 있지. 그 개자식이 그런 짓거리만 안했어도 이렇게 더럽게 엮일 일은 없었으니까.”
안소영도 관심을 드러내자 무혁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배영철과의 관계가 뒤틀어진 일을 말해주었다.
“5일째 되는 날이었나? 경계를 서고 있던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고. 처음에는 몬스터인가 싶어서 굉장히 긴장했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까 몬스터는 아니고 사람 말소리더라고. 말소리를 들으니까 긴장은 풀렸는데 뭐, 누구나 그렇듯 호기심이 들것 아냐. 그래서 조심스럽게 가봤지.”
무혁의 말에 코우 신지 등은 악몽과도 같았던 일주일간의 생존 기간을 떠올렸다.
5일째였으면 어느 정도 몬스터와의 싸움에 익숙해지면서 더 이상의 희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서서히 달아올라가면서 생존자들 사이에서 또 다른 공포심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오히려 심리적으로 더욱더 압박을 받으며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가보니까 배영철이 있더라고. 뭐 예상하다시피 혼자는 아니었지. 여자가 한 명 있었는데 지켜주네 어쩌네 하면서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같더니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끝내는 강제로 덮치더라고.”
무혁의 말에 안소영이 가장 먼저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다.
“그걸 보고만 있었다고?”
“설마 눈앞에서 여자가 강간을 당하고 있는데 보고만 있으려고? 사람이 있다는 인기척만 보이면 지레 놀라서 그만두지 않을까 싶어서 요란하게 움직이면서 소리를 냈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인기척에 놀라서 꽁무니를 뺐겠지만, 배영철은 전혀 아니었다.
내렸던 바지를 주섬주섬 끌어 올리고는 누구냐고 물었고, 무혁도 더 이상은 빠져 있을 수가 없다 여겨 모습을 드러냈다.
무혁의 얼굴을 확인한 배영철은 욕설을 진하게 내뱉으며 꺼지라고 하고는 다시 여자를 범하려고 했다.
상황이 그쯤 되자 무혁도 배영철이 아무리 무서워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무혁은 배영철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고, 여자도 배영철의 폭력에 잔뜩 겁을 먹어 순순히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엿같았지.”
흔한 말로 떡실신이 되도록 얻어맞은 상태로 여자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무혁은 그날 이후 배영철 앞에만 서면 기가 죽어서 흔한 말로 ‘밥’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그날 이후, 배영철에게 강간을 당했던 여자가 오히려 그의 곁에 딱 붙어서 생존 기간을 버텨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무혁을 비참하고 허탈하게 만들었던 건, 배영철이 무혁을 무시하며 괴롭힐 때마다 곁에 달라붙어 있던 여자가 오히려 더 신이 나서 같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여자가 마우티 부락으로 들어선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도 무혁으로서는 자신과는 관계도 없는 여자로 인해 배영철과 악연으로 얽히고 말았다는 점이다.
“자존심보다는 살겠다는 욕구가 더 컸던 모양이군.”
코우 신지의 말에 무혁은 굳이 짚어주지 않아도 되는 걸 짚어줘서 참 고맙다고 인상을 썼고, 하가세는 대놓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혁을 경멸하다시피 쳐다봤다.
안소영은 의외로 무혁보다는 여자를 욕했다.
“아무리 살고 싶어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다른 여자들까지 같은 취급을 당하는 거야.”
힘 앞에 치욕을 당할 순 있다.
하지만, 그것에 굴복해서 오히려 순종하는 여자라면 가장 혐오스러웠고, 그런 여자들로 인해 일부 남자들이 여자는 힘으로 굴복시키면 끝이라 생각하는 것 때문에 안소영은 같은 여자라 하더라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여자가 한 가장 잘못된 행동은 자신의 치부를 지우기 위해 타인에게 더한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헬-라시온에서 힘없는 여자가 살아남는 가장 유용한 수단인 건 사실이지.”
코우 신지의 말에 안소영은 그를 노려봤지만, 딱히 반박을 할 순 없었다.
실제로 헬-라시온에서 미모를 무기로 강한 남자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는 여자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육가문의 보호를 박차고 나온 안소영이 특이 케이스인 셈이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움직이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여긴 코우 신지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무혁과 안소영도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 없다는 걸 알기에 억지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계단을 찾기 위한 걸음이 이어졌고, 또 한 번의 휴식을 갖고 나서야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던 계단을 찾을 수 있었다.
“찾았다!”
하가세의 외침에 무혁은 재빨리 시계를 확인했다.
10D [ 17 : 51 ]
대략 6시간을 남겨둔 상황에서 지난 열흘 동안 지긋지긋하게 맴돌았던 시간의 탑을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눈앞에 둔 것이다.
“지금 바로 올라갈 거지?”
무혁은 말과 함께 은근슬쩍 앞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코우 신지가 무혁을 향해 그리 말하며 싸늘하게 쳐다봤다.
하가세 역시 계단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창을 꼬나 쥔 상태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무혁은 교묘하게 안소영의 앞을 가로 막아서며 코우 신지를 바라봤다.
“아직은 계단을 오를 수 없다.”
“뭐?”
무슨 소리냐는 듯 무혁이 되묻자 코우 신지가 확고한 어조로 대답했다.
“여기서 배영철을 기다린다. 그놈을 잡은 후에 계단으로 오른다. 너희에겐 선택권이 없어. 함께 배영철 잡아야만 계단을 통해 시간의 탑을 나갈 수 있다. 이제부터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돌아서서 배영철이 나타나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