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죽이러 갑니다. 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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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을 죽이러 갑니다. 90화
신을 죽이러 갑니다 90화
피 무지개 숲 (15)
“인간?”
익숙한 헬-라시온 언어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저들은 하나 같이 틀에서 찍어내듯 똑같네.’
무혁은 아스펠 마을에서 고용한 하녀 마코의 얼굴이 겹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경계심을 갖고 있던 그가 이내 무혁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대검을 스르르- 늘어트리며 방어 자세를 풀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냐, 인간?”
그 물음에 무혁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상인에게 무슨 볼일이 있겠어, 오크?”
오크가 크하핫-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걸 보는 무혁으로서는 고사를 지내기 위해 올려놓은 돼지 머리마냥 그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설마 이 시간에 인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더욱이 이제 조금만 있으면 피 무지개가 뜨는 시간이 될 텐데 말이야.”
제법 용기가 있는 인간이야- 라며 중얼거린 오크 상인은 대검을 바닥에 푹- 꽂아놓고는 금빛 보따리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오크 상인이 꺼낸 것은 놀랍게도 태블릿 PC였다.
기형적으로 두툼한 손가락으로도 능숙하게 태블릿 PC를 다루던 오크 상인이 무혁에게 물었다.
“찾는 물품이 있나, 인간?”
“뭐가 있지, 오크?”
무혁이 오크 상인의 말투를 흉내 내듯 따라 반문했다.
“여기 피 무지개 숲에서 필요한 건 다 있다, 인간.”
“무기와 방어구를 제외… 아니 모든 품목을 모조리 다 보여줘, 오크!”
무혁의 요구에 오크 상인은 별말 없이 태블릿 PC를 조작하더니 이윽고 무혁에게 내밀었다.
“사용법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겠지, 인간?”
고개를 끄덕인 무혁은 오크 상인에게서 태블릿 PC를 받아들었다.
태블릿 PC에는 지구의 익숙했던 기업의 로고가 아닌 ‘헬-라시온’이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어서 무혁의 헛웃음을 유발시켰다.
‘라시온이라는 마신도 제정신은 아니야.’
무혁은 그렇게 마신 라시온을 한차례 욕하고는 목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태블릿 PC를 통해서 확인한 판매 목록들은 마치 잘 정리된 쇼핑몰처럼 정확하게 품목들이 종류별로 딱딱 분류가 되어 있었다.
오크 상인의 말처럼 온갖 것들이 다 있었다.
의복, 식재료, 기본 생활품, 등등 없는 게 없을 정도였다.
“우리 오크 상인들을 통해서 구입한 것들은 온전히 개인 소유품으로 취급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어라, 인간.”
“개인 소유품?”
무혁은 그게 무슨 뜻일까 생각하다 이내 식재료 품목에서 그 뜻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너에게 구입한 식재료는 토성의 식량 저장소로 이동되지 않는다는 뜻이야?”
오크 상인은 그렇다, 인간- 이라고 대답하며 껄껄- 웃었다.
“그렇단 말이지.”
무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선 무기류부터 확인했다.
블랙 본이라는 최고의 무구를 소유한 무혁이었기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확인은 하고 넘어가야 했기에 빠르게 목록을 살펴봤다.
중앙탑에서 판매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무기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무지개 구슬을 수백 개씩 필요로 하는 통에 무혁으로서는 구매를 할 필요성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무기류를 빠르게 살펴보다 방어구로 넘어갔을 때였다.
“어?”
빠른 속도로 목록을 휙휙- 넘기던 무혁의 손가락이 멈칫거렸다.
|카르마덴 투구 - 5등급 방어구|
· 강도 높은 카르마덴 금속으로 만들어졌다.
· 5등급 이하 무기에 대한 방어력이 우수하다.
· 내구력이 높아 수리할 일이 거의 없다.
중세 시대 기사들이 착용했을 것 같은 형태의 투구, 머리부터 얼굴 전체를 완전하게 감싸는 투구의 디자인은 여느 다른 투구들과 다를 것 없었지만 재질이 카르마덴이라는 사실에 무혁은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카르마덴 금속의 강도와 유연함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아는 무혁으로서는 살짝 흥미가 동했기에 가격을 확인했다.
“…이, 이천 개?”
무지개 구슬 2천 개라는 가격표에 무혁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카르마덴의 가치가 높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지개 구슬 2천 개라는 가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무혁이 모은 무지개 구슬은 500개를 조금 넘는다.
장담하건데 피 무지개 숲 강제 사냥을 하는 아스펠 마을 식민들 중 자신보다 많은 무지개 구슬을 모은 이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무혁이었다.
아무리 5등급 방어구에다가 카르마덴 금속을 사용한 투구라 하더라도 무지개 구슬 2천 개라는 가격은 웬만해선 구매자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구매하고 싶지도, 그럴 형편도 안 되었기에 무혁은 다시 목록을 빠르게 넘기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10여 분을 투자한 결과 무혁이 구입할 수 있는 무기나 방어구 종류는 단 하나도 없었다.
조금 쓸 만하다 싶으면 가격이 워낙 높았기에 구매를 할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킬은 없는 거냐, 오크?”
“지금은 없다, 인간.”
“지금은?”
무혁이 되물었지만, 오크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중에 생긴다는 거야 뭐야?’
말의 의미가 모호했기에 무혁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다시 태블릿 PC로 시선을 옮겼다.
‘어차피 구매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미련 갖지 말고 필요한 걸 찾아보자.’
무혁은 어떤 목록을 볼까 하다가 식재료 품목이 눈에 들어왔다.
오크 상인에게서 구입한 식재료는 토성의 식량 저장소로 강제 이동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혁은 식재료 품목에서 몇 가지를 빠르게 찾았다.
음식을 먹을 때,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양념들이었다.
‘소금, 간장, 고추장, 된장…….’
무혁은 각 품목마다 무지개 구슬 하나면 1킬로그램 이상의 적지 않은 양을 구입할 수 있었기에 종류별로 구입을 했다.
태블릿 PC를 통해 수량을 입력하고 구매라는 입력 버튼을 클릭하면 자연스럽게 장바구니로 이동되었다.
“조리 용품도 있네.”
어찌 보면 식재료만큼이나 중요한 게 조리 용품이었기에 무혁은 비싸고 좋은 것들을 제외한 세트 품목을 구입했다.
크기 별로 이루어진 프라이팬 3종 세트, 냄비 3종 세트, 그릇 세트, 은수저 세트 등등 무지개 구슬 하나면 충분히 구입이 가능한 조리 용품들이 장바구니에 쌓여갔다.
야외에서 조리를 할 때 간편하고도 그 성능이 뛰어난 부탄가스, 토치, 버너 등도 넉넉하게 구입을 했다.
‘이러니까 완전 캠핑이라도 나온 사람 같… 캠핑?’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무혁은 캠핑 용품을 검색해봤다.
놀랍게도 텐트부터 온갖 캠핑 용품들이 즐비했다.
‘사자, 모조리 다 쓸어 담자.’
헬-라시온에서 사냥을 하다보면 노숙은 일상생활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구매를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점점 목록이 늘어났다.
‘나중에 공간 주머니를 따로 하나 더 구매하던가 해야겠네.’
이러다가 집 한 채를 들고 다니는 거 아닌가 싶어 무혁은 낄낄- 웃음이 나왔다.
“조금 있으면 피 무지개가 뜬다, 인간.”
그렇게 한가하게 웃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듯 경고를 하는 오크 상인의 말에 무혁의 손길이 더욱더 빠르게 움직였다.
‘보석? 설마 여기서 무지개 구슬로 보석을 구입해 중앙탑에 판매를 하라는 뜻인가?’
환전 정도로 생각하면 꽤 나쁘지 않았다.
다만, 보석 구입은 강제 사냥이 거의 막바지에 달했을 때에나 선택할 수 있었기에 지금으로서는 쳐다 볼 가치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품목에서 또 멈칫거렸다.
‘등반?’
딱 그 두 글자 ‘등반’이라는 품목이 존재했다.
뜻 그대로 풀이를 하자면 험한 산이나, 높은 곳의 정상에 오른다는 말.
‘여기 산이 있었던가?’
숲 전체를 다 돌아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높은 산이나 절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등반이라는 품목이 따로 분류되어 있는 걸까?
무혁은 오크 상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기 피 무지개 숲에서 필요한 건 다 있다, 인간.’
피 무지개 숲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등반 품목이 있다는 건 그 역시 피 무지개 숲에서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다.
생각에 잠겨가는 무혁에게 오크 상인이 재촉하듯 마지막 경고를 했다.
“곧 피 무지개가 뜬다, 인간!”
오크 상인의 경고에 무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태블릿 PC를 건넸다.
오크 상인은 빠르게 장바구니에 담긴 품목들을 쭈욱- 확인했다.
“총 274개의 무지개 구슬이 필요하다.”
무혁은 재빨리 공간 주머니에서 274라는 숫자와 함께 무지개 구슬을 동시에 떠올렸고, 그 순간 눈앞에 274개의 무지개 구슬이 허공에서 나타나자 오크 상인이 민첩하게 둥그런 타원 형태의 금속 통에 무지개 구슬을 쓸어 담았다.
“물건들은 여기 꺼내놓으면 되는 거겠지, 인간?”
오크 상인의 말에 무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오크 상인은 손에 들고 있던 금빛 보따리의 입구를 확- 벌리더니 먼지를 털어내는 것 마냥 허공에서 흔들어 댔다.
후두두두둑- 무혁이 장바구니에 담은 물건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확인할 것 없다, 인간.”
오크 상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무혁 역시 일일이 품목들을 확인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그대로 공간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이제 피 무지개가 뜨겠군. 죽고 싶지 않다면 서둘러 토성으로 돌아가라, 인간!”
오크 상인은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는 듯 자리를 떠나려고 바닥에 꽂아 두었던 대검을 뽑아들었다.
“항상 이 시간에 오는 거냐, 오크?”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려는 오크 상인에게 무혁이 그렇게 묻자, 그가 못 생긴 얼굴로 한껏 더욱 못생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아르마카. 내 이름이다. 다음에 또 보자, 인간!”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고는 화통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오크 상인의 모습에 무혁은 그가 이 시간, 정확하게 밤 11시에 숲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
혹시나 몰라서 장소를 기억하려던 무혁은 별안간 온몸으로 느껴지는 서늘한 살기와 2배 가까이 강해진 기압에 깜짝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지막 하나 남아 있던 보라색 무지개가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무지개가 붉은색으로 변하자.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인간 본연의 아니, 생명체 본연의 본능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공포스러운 굉음이 숲 전체에 내려앉았다.
“…더럽게 무섭네.”
무혁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남쪽 토성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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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형님은 도대체 어떻게 되신 거지?”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방구름은 토성 성벽 위에 서서 새카만 어둠에 뒤덮인 숲을 바라봤다.
“색이 변한다!”
누군가의 외침처럼 보라색이었던 무지개가 서서히 붉어졌다.
그리고 누구라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을 정도의 굉음이 폭탄 터지듯 울려 퍼졌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으아악!”
“허억!”
“씨, 씨X! 깜짝이야!”
“맙소사!”
여기저기서 굉음에 놀란 사람들의 비명과 욕설 등이 쏟아졌다.
방구름 역시 저도 모르게 몸을 둥그렇게 움츠리고는 더욱더 불안해진 눈으로 숲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피 무지개가 떴다.
오늘 하루, 24시간 동안 숲의 모든 몬스터들이 네 방위에 세워져 있는 토성을 향해 공격을 해올 것이다.
문제는 전투 개미였다.
갑작스럽게 무지개를 뚫고 떨어진 전투 개미와 조우했던 많은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전투 개미가 공격을 해올 것인지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어, 엄청나게 많을 거야…….”
수백,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를 전투 개미들이 숲 전체에 떨어졌다.
각기 4방향으로 분산이 된다 하더라도 최하 2백 마리 이상의 전투 개미의 공격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로서는 벌써부터 걱정과 불안감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번 강제 사냥은 포기하는 거였는데…….”
이제 와 후회를 해봐야 무슨 소용 있겠는가?
후회야말로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
“어차피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다음에라도 죽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무슨.”
후회하는 이를 바라보며 혀를 찬 루이스가 한시도 숲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방구름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구름, 무혁은 돌아올 거야. 그는… 강하잖아.”
루이스의 말에 방구름은 여전히 시선을 숲에 둔 상태로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루이스는 묻고 싶은 것이 굉장히 많았다.
그 모든 것들이 무혁에 대한 것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많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속으로만 품고 있어야 했다.
전투 개미 두 마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웠던 무혁의 무력은 전율이 일 정도로 대단했었다.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레이나와 오를리아 역시 방구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이번 강제 사냥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무혁이라는 걸 느낀 것이다.
“저, 저기!”
새카만 어둠이 덮인 숲을 뚫고 누군가 뛰쳐나왔다.
방구름은 최대한 시력을 높이기 위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어둠에 둘러싸인 누군가를 바라봤다.
그것은 사람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저, 전투 개미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숲에서 몬스터들이 와르르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