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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이계사냥기 20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조회 792회 작성일

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20화

 

“첫날 박고찬이랑 강천성이랑 싸울 뻔했을 때 기억해요?”
“어떻게 잊겠어요.”
“그때 강천성이 한 말 기억나세요?”
“아, 그 눈알을…….”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거요.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누구나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고 그랬잖아요.”
“네.”
“혜수 씨도 결국은 하셔야 할 거예요. 언제까지나 보호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
“겁나는 거 알아요. 저도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래도 조금만 더 힘내서 그 선을 넘으세요. 한 번 넘고 나면, 누구보다도 잘하시게 될 거예요. 혜수 씨는 능력 있는 분이잖아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가볼게요.”
“아……!”
이혜수가 놀라 벌떡 일어나 뭐라고 만류하려 했지만, 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협곡을 나섰다.
협곡에서 나와 숲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전장식 마법소총과 탄알집 혁대로 무장하고 실프를 소환했다.
“이제부터 내가 내는 모든 소리를 차단해 줘.”
-냥.
한 번 걸음을 내딛어 보았다.
신기하게도 풀을 밟는 사박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좋아.’
이 정도면 9마리밖에 안 되는 감시는 충분히 피할 수 있다.
“우두머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줘. 되도록 깨어 있는 놈들을 피해가자.”
-냥.
실프는 알았다면서 내 어깨 위에 앉아 앞발로 방향을 가리켰다. 나는 귀여운 길잡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석판을 소환해 놓고 실프의 남은 소환시간을 실시간으로 체크했다.
소리를 차단시키니까 시간이 두 배가량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내가 큰 소리를 낼수록 그 소리를 차단하는 데 드는 힘의 소모가 커진다.
되도록 살금살금 소리 내지 않으며 걸었을 때,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정도. 그래서 한 시간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도망치라고 당부해 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다들 무진장 고생하겠네. 안 봐도 훤하지.’
식량 확보는커녕 불 피우는 것부터 쩔쩔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박고찬조차도 나를 그리워할 거라고 생각하니 뜬금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이혜수…….

‘현호 씨는 저를 보호해 준 유일한 사람이에요.’

한 여자에게 내가 정의롭고 용감한 남자로 보였다는 것이 기쁘다.
물론 그녀 입장에서는 살기 위해 내 도움이 절실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런 계산으로 나를 이용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렇게 계산적인 여자였다면 진즉에 내게 꼬리를 치지 않았을까?
그러지 못한 걸 보면, 이혜수는 그저 좋은 집안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착한 여자다.
사실 나는 전혀 꾸미지 않았는데도 예쁜 이혜수에게 한 눈에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박고찬이 더욱 괘씸했고. 그녀를 챙겨준 것도 그런 사심이 없지 않다.
내가 없어지면 박고찬이 마음대로 성추행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라고 영웅적 희생을 하려고 나선 줄 알아? 기필코 살아 돌아가고 말겠어.’
이번 일에 성공하면 두 번째 시험 클리어에 가장 큰 공헌을 하게 되어 높은 카르마를 획득할 수 있다. 이혜수에게 나를 더 어필하는 계기도 되고 말이지.
그런 일거양득의 모티베이션이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내 목숨.
나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숲으로 진입하자 얼마 되지 않아 레드 에이프들이 보였다. 여기저기에 무리지어 곯아떨어진 모습이었다.
실프의 인도로 감시에 들키지 않고 놈들 사이를 유유히 누비고 지나갔다.
자고 있는 놈들 바로 옆을 지나가려니까 살이 떨린다. 심장이 쫄깃쫄깃해지는 기분이었다. 발 한 번 잘못 디뎌서 놈들 몸이라도 밟으면 끝장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실프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무슨 일이야?’
내가 쳐다보자 실프는 왼쪽을 가리켰다. 왼쪽에서 깨어 있는 레드 에이프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즉시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수풀 뒤에 몸을 숨기고 계속 움직였다.
실프는 내 어깨에 앞발로 숫자를 썼다.
50.
레드 에이프 우두머리까지 50미터 남았다는 뜻이었다.
40, 30, 20…….
거리는 점점 좁혀졌다.
15미터에 이르자 나는 납구슬탄을 꺼내 총구에 넣었다. 실프를 시켜서 조용히 목을 그어버리는 게 가장 좋지만, 혹시 모르니 장전해 둔 것이다.
그리고 9미터.
굵직한 나무 뒤에 숨어서 앞의 상황을 엿봤다.
‘저놈인가?’
레드 에이프의 우두머리는 덩치가 엄청난 녀석이었다. 키는 강천성과 비슷할 정도고, 근육이 대단했다. 체중이 다른 녀석들의 3배는 족히 나갈 것 같았다.
‘돌연변이인가?’
저쯤이면 아예 태어났을 때부터 우두머리로 예정되었을 정도다. 태생부터 우월했으니 집단을 지배하는 통솔력이 강력할 수밖에.
아무튼 이제 죽이는 일만 남았다.
강자로 태어난 놈답게 아주 큰 대(大)자로 퍼지고 잔다. 자는 모습이 참 호방하기도 하지. 영원히 자게 해주마.
다만 걸림돌이 있다면, 그 곁에 깨어 있는 레드 에이프가 2마리나 있다는 점.
우두머리, 감시자 2마리.
셋을 단숨에 죽여야 한다.
“실프, 저 세 마리의 목을 동시에 벨 수 있겠니?”
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베어버려.”
-냥.
실프가 바람처럼 쇄도했다.
촤악! 촤악! 콰직-!
세 마리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됐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희했다. 이제 왔던 것처럼 조용히 빠져나가면 그만…….
“키르륵!”
“어?”
나는 깜짝 놀랐다.
레드 에이프 우두머리 녀석이 피가 쏟아지는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깨어난 것이다. 죽은 거 아니었어?
우두머리는 한 손으로 피가 쏟아지는 목을 붙잡아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놈의 거구가 비틀비틀 위태롭게 흔들렸다.
“실프, 죽여!”
난 실프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때였다.
“키에에엑-!!”
거세게 고함을 지르는 우두머리. 그와 동시에 ‘푸학!’ 하고 목에서 피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뒤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최후에 내지른 고함은 이미 모든 레드 에이프를 깨운 뒤였다.
“키에엑!”
“끼엑?”
“끼이익!”
여기저기서 들리는 동요한 레드 에이프의 목소리.
‘이런 지랄!’
목을 베여서 피가 쏟아지는데도 고함을 내질러서 모두를 깨우다니! 뭐 저딴 놈이 다 있지?
이제 난 잠에서 깨어난 레드 에이프 수백 마리의 한복판에 있게 되었다.
“석판 소환, 스킬 확인!”

-정령술(메인스킬): 현재 바람의 하급 정령 실프를 소환 중입니다.
*초급 1레벨: 2시간 소환 가능.(남은 시간 31분) 소환 시간이 만료되면 10시간 뒤에 재소환 가능합니다.

소환시간이 31분밖에 안 남았다.
‘이젠 어쩌지?’
공포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위기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대책, 대책, 대책!
‘그딴 게 어디 있어, 씨발! 일단 튀고 봐야지!’
나는 뛰기 시작했다. 실프의 힘으로 여전히 소리는 내지 않은 채 나는 조용히 달렸다.
아직 놈들이 완전히 잠에서 깨지 못했고, 상황파악도 안 된 상태.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명령 내릴 놈도 없어 우왕좌왕할 것이다.
그러니 이 틈에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게 최선이었다.
“키에엑!”
한 놈이 나와 딱 마주쳤다.
‘뭘 봐 씨발.’
나는 장전이 된 마법소총으로 한 방 갈겨주었다.
퍼억!
실프의 능력 덕에 총성을 울리지 않고, 납구슬탄에 맞고 머리가 터지는 둔탁한 소리만 들렸다.
달리면서 또 한 발을 꺼내 장전했다.
“비켜!”

***

숲에서 레드 에이프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이혜수는 겁에 질렸다.
‘어떡해!’
레드 에이프가 일제히 잠에서 깨어난 모양이었다. 김현호가 발각되지 않았으면 저 소란이 일어날 리 없었다.
…아마도 김현호는 살아 돌아오지 못하리라.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이혜수는 문득 김현호가 당부한 말이 생각났다.
“석판 소환.”
석판을 소환해 시간을 확인해 보니 한 시간 가까이가 지난 상태였다. 그녀는 동굴에 들어가 다른 일행을 모두 깨웠다.
“무슨 일이에요?”
“그, 그게…….”
준호의 물음에 이혜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더듬거렸다.
“혀, 현호 씨가 당장 도망가랬어요.”
“네?”
“뭔 소리야, 그게?”
박고찬이 재차 묻자, 이혜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현호 씨가 죽은 것 같아요.”
경악에 빠진 일행에게 그녀는 간신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새끼는 지가 뭐라고 혼자 들어갔다가 뒈지고 지랄이야. 에이, 그 새끼 하여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
“그런 말씀 하실 때가 아니잖아요. 일단 어서 피해야 하지 않을까요?”
준호의 말에 박고찬은 손사래를 쳤다.
“저렇게 소란을 떨고 있는데 밖으로 기어나가면 그게 더 위험하지.”
“하지만 현호 형은…….”
“콱, 씨발. 말대답 한 번만 더 해라?”
자신의 주장이 반박되는 걸 참지 못하는 박고찬이었고, 준호는 찔끔 입을 다물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일행들. 실질적으로 그들을 이끌던 김현호가 사라지자 벌써부터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가지.”
조용히 한 마디 꺼낸 것은 침묵만 하던 강천성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도망치랬다. 그럼 도망쳐야지.”
강천성은 김현호의 당부를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들을 잘 이끌어온 것은 김현호의 판단력이었으니 말이다.
박고찬은 찍 소리 못하고 그 뜻에 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협곡을 떠났다.
“어디로 가죠?”
준호가 물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방향을 결정한 것 역시 김현호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 살 수 있을까? 앞장 선 사람은 그런 선택을 매순간 내려야 한다.
앞장서서 걷는 것과 그 뒤만 따르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큰지 비로소 깨닫게 된 그들이었다.
“아가씨, 김현호 그 새끼 어느 쪽으로 갔었어?”
박고찬이 묻자 이혜수는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럼 반대방향으로 가야지!”
박고찬은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세 사람도 딱히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 뒤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맨 뒤에서 따라 걸으면서 이혜수는 불길함을 느꼈다.
가야 할 방향을 박고찬이 정했고, 일행은 그 말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 김현호에게 억눌려 있던 박고찬의 주도적인 욕구가 다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제어할 수 있는 강천성은 전혀 자기주장을 관철할 의욕이 없었다. 타인에게 상관하고 싶어 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이준호는 힘도 마음도 약했다.
‘현호 씨, 제발 살아 돌아오세요. 죽지 말아주세요.’
이혜수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

우두머리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선지, 레드 에이프들은 나를 쫓아오지는 않았다.
덕분에 간신히 살아서 빠져나왔지만, 일행들이 있는 협곡으로는 갈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일행의 위치가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실프, 녀석들은 이제 안 쫓아오지?”
-냐앙.
실프는 내 어깨 위에서 꼬리를 슬렁슬렁 흔들며 대답했다. 이제 실프의 소환시간은 채 5분도 남지 않았다. 그 안에 탈출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됐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어두운 밤하늘. 그러나 한 줄기의 햇살이 등줄기를 찌르며 아침을 부르고 있었다.
“됐어! 내가 해냈다, 크하하하!”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믿겨지지 않았다. 수백 마리가 모여 있는 한복판으로 혼자 숨어 들어가 우두머리를 암살하고 탈출했다.
내가 해낸 일이다!
서른을 앞둔 백수 김현호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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