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36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36화
은빛 털을 가진 네 명의 라이칸스로프가 숲을 질주했다.
씨족 내에 수십 명의 형제자매가 바글거린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들 네 형제는 같은 어머니를 둔 각별한 사이였다.
장남 헬기는 타고난 강함과 침착성으로 씨족의 차기 우두머리로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하지만 헬기는 결코 과신하지 않고 항상 자세를 낮추었고, 이는 아버지의 신임을 얻기에 충분했다.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똑똑히 봤으니까.’
본래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는 모두 다섯이었다. 헬기보다 세 살이 많은 형이 하나 있었다.
아주 힘이 강력한 형이었다.
아버지의 피를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조만간 우두머리가 교체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씨족 내에 돌았다. 오랫동안 지켜온 아버지의 권좌가 마침내 깨질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웬걸.
자신감이 넘쳤던 형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아버지에게 도전했다. 아버지의 지위와 아내들을 전부 차지하겠다는 욕망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일격에 목뼈가 부러져 즉사했다.
“안다.”
으스러진 형의 목을 한 손에 거머쥔 채로 아버지가 모두에게 말했다.
“너희도 나와 똑같이 가슴속에 불타는 욕망을 품고 있음을.”
형제들은 경외 어린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들과 자매들도 선망 어린 눈길을 아버지에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내게 도전하지 마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내가 신세계를 보여주마. 그때는 얼마든지 도전을 받아주마.”
누구보다도 거대한 덩치.
누구보다도 달빛을 잘 받는 아름다운 은빛 털.
가장 강력한 도전자를 일격에 부숴 버린 아버지는 그렇게 계속 씨족에 군림했다.
그때 헬기는 깨달았다.
‘아버지에게는 무언가 원대한 계획이 있다.’
씨족 내의 작은 권력다툼보다 훨씬 크고 원대한 야망 말이다.
헬기는 아버지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했다. 헬기도 죽은 형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권력과 여자가 탐났지만, 힘으로 도전해서는 능사가 아니다 싶었다.
헬기의 판단은 옳았다.
그 뒤로도 아버지에게 도전한 형제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는 생채기 하나 없이 도전자들을 물리쳤다.
그렇게 도전으로 욕망을 드러낸 형제들이 처참히 죽어나갈 때, 헬기는 아버지의 신임을 얻어 씨족 내에서 서열이 올랐다. 포상으로 배다른 누이 둘을 아내로 얻기까지 했다.
그제야 다른 형제들도 헬기의 처세를 따라 아버지에게 충성을 하기 시작했지만, 헬기는 이미 씨족 내의 2인자로서 입지를 공고히 했다.
같은 어머니를 둔 세 명의 동생도 맏형 헬기를 잘 따랐다. 헬기를 쫓아다니며 공을 세워 아버지에게 상을 받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는 중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적의 체취가 그들의 후각에 걸려들었다.
“이쪽이다!”
“이 냄새는 인간이야!”
상대가 인간임을 알게 되자 라이칸스로프들은 자신만만해졌다.
형제들에게 엘프는 미지의 경계 대상이지만, 인간은 먹이에 불과했다. 그들은 인간의 피와 살코기 맛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얕보지 마. 인간 중에는 강한 놈들도 있다고 했다.”
헬기가 충고했지만 동생들은 듣지 않고 더욱 세차게 달렸다.
서로 먼저 공을 세우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 꼴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타앙―
하고 이상한 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지더니,
퍼억!
하고 앞장서서 달려 나가던 동생의 머리통이 터져 버렸다.
헬기 일행은 깜짝 놀라 우뚝 멈췄다.
“뭐, 뭐야?!”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야?”
갑자기 형제를 잃은 동생들은 영문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뭔가가 날아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헬기는 침착하게 생각했다.
뭔가 작은 것이 날아드는가 싶더니 동생의 머리통이 터졌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가진 신종 무기 같은 것이 틀림없었다.
탕- 파직!
또 한 동생의 머리통이 터지자 헬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숨어!”
헬기는 급히 나무 뒤에 숨으며 소리쳤다. 한 명밖에 남지 않은 동생 역시 수풀 뒤에 몸을 숨겼다.
몸을 숨기자 비로소 미지의 공격은 멈췄다.
‘큰 소리가 날 때마다 한 명씩 죽었다.’
헬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첫 번째 공격과 두 번째 공격 사이에 시간차가 있었지. 빠르게 연속으로 공격하지는 못하는 모양이군.’
빠른 연속공격이 가능했다면 형제가 모두 죽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헬기는 수풀 뒤에 숨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헬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 말 잘 들어.”
헬기가 입을 열자 동생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뛰어나가자.”
“싸우자고?”
“멍청한 놈. 저런 무기를 가진 놈들과 어떻게 싸워? 달아나는 거다.”
“아, 알았어.”
“센다. 하나, 둘…….”
셋과 함께 동생이 수풀에서 뛰쳐나왔다. 하지만 헬기는 꼼짝하지 않고 여전히 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타앙- 퍼억!
동생은 머리통이 터져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지금이다!’
비로소 헬기는 나무 뒤에서 나왔다. 죽어 쓰러진 동생에게 뛰어들어 시체를 등에 들쳐 업었다.
탕!
또다시 날카로운 소음이 들렸지만, 세차게 날아온 무언가가 업고 있던 동생의 시체가 박혀들었다.
죽은 동생을 방패 삼고서 헬기는 계속 달렸다. 그야말로 꽁지가 빠지도록 필사적인 도주였다.
***
우리는 멍하니 실프가 모신나강으로 멋지게 사격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 그래도 귀여운 실프가 자기 덩치보다 큰 소총을 들고 사격을 하니, 혜수가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지혜도 그랬고, 총을 든 실프는 참 여자를 잘 홀린다.
네 차례의 사격.
그 뒤로 실프는 고개를 저으며 모신나강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어떻게 됐어?”
실프는 꼬리로 숫자 3을 만들었다.
“한마디는 놓쳤어?”
-냥…….
풀 죽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실프였다. 나는 실프를 안아 들고 어깨에 얹으며 달랬다.
“괜찮아, 그래도 잘했으니까.”
우리는 라이칸스로프들이 죽어 있는 현장으로 걸어갔다.
연구소에서 삽화로만 보았던 라이칸스로프를 실제로 보니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인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덩치에 은색의 털로 뒤덮여 있는 단단한 몸뚱이, 길고 날카로운 손발톱.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괴물이 떡하니 눈앞에 있는데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도저히 이게 현실인지 환상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이것이 현실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윽!”
총에 맞아 터져 있는 머리를 보고 혜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전보다 비위가 단련됐는지 오바이트를 하지는 않았다.
“으으, 진짜로 늑대인간이네요.”
준호는 조심스럽게 라이칸스로프 시체를 툭툭 발로 건드리며 말했다.
“하나는 어디 갔지?”
강천성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제야 우리는 시체가 두 구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처음 보는 라이칸스로프의 생김새에 놀라 미처 생각지 못했다.
-냐앙.
실프는 앞발로 앞을 가리켰다. 아마도 살아남은 한 놈이 달아난 방향을 의미하는 듯했다.
‘아!’
그제야 나는 상황이 어찌 된 건지 알아차렸다.
“남은 하나가 시체를 방패 삼고서 달아난 모양이에요.”
“똑똑하군.”
강천성이 말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라이칸스로프들 입장에서는 총이라는 무기를 난생처음 접해보았을 터였다. 그런데도 시체로 방패를 삼을 생각을 했다니, 똑똑하지 않고서는 내릴 수 없는 판단이었다.
“오빠, 이제 어떡하죠?”
“음…….”
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 놈이 달아났으니 무리를 데리고 돌아와 복수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라이칸스로프는 호전성이 강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살아남은 녀석은 소총의 위력도 충분히 보았을 터. 함부로 덤비지는 못할 것이다. 늑대와 습성이 비슷한 점을 감안해 본다면…….
고민 끝에 나는 결정을 내렸다.
“계속 가자. 어차피 놈들의 영역을 통과해야 하니까.”
“네.”
“예, 형.”
“총에 당해보았으니 아마 섣불리 덤벼들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더 어두워지면 야습을 해올 가능성이 크니까 지금은 서둘러서 안전한 장소를 찾아보자.”
우리의 발걸음이 보다 빨라졌다.
실프를 시켜서 주변을 정찰하며 동굴처럼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장소는 여의치 않았고, 우리는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늪지대를 발견했다. 본래는 작은 호수였다가 늪으로 변모한 듯했다.
“이제 날도 어두워졌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지내자.”
“괜찮을까요?”
혜수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늪을 가리키며 말했다.
“놈들도 늪을 건너지는 못할 테니 여길 등지고 다른 방면만 경계하면 돼.”
“우리도 달아날 수가 없게 되잖아요.”
준호가 이의를 제기하자 내가 답했다.
“우리가 달아나봐야 쉽게 따라잡힐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냐?”
“아…….”
“달아날 생각은 처음부터 버려야 돼. 무조건 싸워 이길 생각만 해.”
“예, 형.”
모닥불을 피우고 불침번을 정했는데, 나는 불안해서 쉽사리 잠들 수가 없었다. 실프가 아니면 놈들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알아차릴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자다가도 불안해서 깨어나기를 반복해야 했다.
도중에 깨어났을 때마다 실프를 소환해 정찰을 시키고는 도로 잠들다가, 얼마 안 가서 또 깨어나서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아, 마정!’
이곳 아레나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체내에 마정을 품고 있다고 했다. 라이칸스로프도 마찬가지일 터.
그런데 그걸 깜빡한 것이다.
‘그걸 깜빡하다니. 돈 받고 팔 수 있는 건데 아깝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시체가 있는 곳까지 돌아가 마정을 채취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다음에는 깜빡하지 말고 챙겨두자.’
***
달빛이 잘 드는 언덕 위에 백여 마리의 라이칸스로프가 집결해 있었다.
둥글게 원을 그리고 모여 있는 무리의 가운데에는 한 명의 라이칸스로프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바로 헬기였다.
헬기의 옆에는 머리가 터져 죽은 동생의 시체도 함께 있었다.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헬기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무슨 일이래?”
“마리아네 형제들이 죽었대. 헬기 빼고 전부 죽었다더군.”
“정말? 누구한테?”
“인간이라던데.”
“인간에게? 설마?”
“큭큭, 그게 사실이라면 헬기 녀석도 체면이 말이 아니겠는데.”
“먹잇감에 불과한 인간에게 형제가 모조리 당했단 말이야? 헬기 자식, 이제 보니 강한 척만 하지 별것 아닌 거 아냐?”
여기저기서 지탄과 비웃음의 말들이 들려왔다. 라이칸스로프의 예민한 청각을 가진 헬기의 귀에 그 말들이 안 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헬기는 발끈 화를 내지 않고 잠자코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쉿, 조용.”
“오셨어.”
한 라이칸스로프의 등장에 무리가 일제히 조용해졌다.
누구보다도 장대한 체격을 자랑하는 직립보행의 짐승.
빛나는 은빛 털에 덮인 몸의 여기저기에 흉터들이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는 바로 헬기의 아버지이자 씨족의 우두머리였다.
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어가 언덕 끝의 바위 위에 앉았다. 다들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그야말로 왕좌에 앉은 군주의 풍모였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헬기는 눈을 질끈 감고는 이를 악물며 답했다.
“제 형제들이 인간에게 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