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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이계사냥기 58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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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58화

 

박진성 회장으로부터 오전 11시까지 김포공항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덕분에 아침에 여유가 생겨서 현지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오빠!”
차를 세우고 내려주자마자, 문 열고 불쑥 들어와 조수석에 떡하니 앉는 여자가 있었다.
긴 생머리에 쌍꺼풀이 인상적인 발랄한 23세의 여대생.
이제 나와 사귀게 된 유민정이었다.
“오늘 덴마크 가시죠? 히잉, 한동안 못 봐서 어떡해요!”
귀염을 떠는 민정을 보니 어젯밤에 함께 보냈던 달콤한 시간이 떠올라서 마음이 흐뭇해졌다.
“아주 잘들 논다, 놀아!”
현지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우리를 노려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뻔뻔하기로는 만만치 않은 민정은 도리어 내게 찰싹 붙었다. 현지는 부아가 치민다는 표정이었다.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겠네. 귀국하면 가장 먼저 연락할게.”
“가서 바람피우거나 하는 거 아니죠?”
“설마. 그럴 재주도 없어.”
“유럽에 갔다고 들떠서 금발 백인이랑 로맨스 찍으면 안 돼요?”
“걱정 마, 난 금발 싫어.”
“그럼요?”
나는 대답 대신 민정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민정은 생글거리며 나에게 더욱 엉겨 붙었다.
“수업 늦겠어, 이년아!”
보기 눈꼴 시렸는지 현지가 짜증을 부렸다. 그러자 민정은 문을 확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창문을 열고 말했다.
“나 오늘 오전 수업 빠질게, 대리출석 해줘!”
“뭐?”
“부탁해요, 시누이! 자자, 오빠 출발! 빨리 출발!”
나는 시키는 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로 노발대발하는 현지의 모습이 보였다. 민정은 옆에서 깔깔거렸다. 나도 피식피식 웃었다.
“오빠, 우리 뭐 할까요?”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이제 9시였다.
“밥은 먹었어?”
“아뇨. 9시부터 강의인데 늦게 일어났어요.”
“그럼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잘 아는 데 있어?”
“학교 앞에 파스타 전문점 있어요.”
“그래, 그리로 가자.”
학교 앞 상점가의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내렸다.
지나가던 학생들의 시선이 운전석에서 내린 나에게 쏠렸다. 포르쉐 카이엔의 위력이었다. 화려한 스포츠카는 아니었지만, 대학교 앞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차이긴 했다.
잽싸게 내린 민정이 보란 듯이 내 옆에 찰싹 붙었다. 자기가 임자라고 영역표시를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의 얼굴이 눈꼴 시림으로 일그러졌다. 아침부터 정신적인 데미지를 받은 가여운 학생들은 더욱 빠른 걸음걸이로 지나갔다.
“너 그러다 왕따 된다.”
“상관없어요. 곧 졸업이지롱.”
약이라도 한 것처럼 활기찬 민정은 나까지 기분이 좋게 만들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민정이 문득 내 손목을 보며 말했다.
“오빠 시계 없어요?”
“응.”
“일하는 남자 손에는 손목시계가 있어야 해요.”
“그래? 하나 사야겠다.”
사실 집에 군대에서 쓰던 낡은 전자시계가 하나 있긴 했다. 훈련소 앞에서 1만 원에 팔던 건데 보기 싫어서 안 차고 다녔다.
“오빠, 제가 하나 선물할까요?”
“괜찮아. 마침 해외 나가니까 공항 면세점에서 사면 돼.”
내 통장에 10억이 있다. 곧 졸업하는 여대생의 돈을 축낼 이유가 없지.
“얼마짜리 사시게요?”
“글쎄. 돈은 충분하니까 큰맘 먹고 좋은 거 사야지.”
“예산을 말해보세요. 제가 골라줄게요!”
“네가?”
“네, 인터넷 검색해 보고 멋진 거 몇 개 골라서 메신저로 알려드릴게요.”
“으음, 글쎄.”
“안 돼요?”
민정이 귀여운 표정을 짓는다. 토끼처럼 반짝거리는 애처로운 눈빛이라니. 자신의 쌍꺼풀이 예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고민되네. 얼마를 부르지?’
수천만 원짜리 시계도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거금을 말하면 기절초풍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왕 돈도 많은데 싼 것을 사고 싶지도 않고…….
“5백?”
“진짜요?”
“응. 평생 차고 다닐 거니까 큰맘 먹고 질러야지.”
“평생 오빠 손목에 감겨 있는 걸 제가 고르는 거예요?”
“그렇지. 그러니까 잘 골라야 돼.”
“헤헤, 맡겨주세요.”
역시 여자는 쇼핑인지 민정의 눈에 의욕이 넘쳐흘렀다.
식사를 하고서 옆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눴다. 민정은 한도 끝도 없이 이야깃거리가 샘솟는 듯 말을 멈추지 않았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 차를 타고 학교로 바래다주는데, 문득 민정이 말했다.
“오빠, 소원 하나 말해봐요.”
“소원?”
“뭐든지 딱 하나는 들어줄게요.”
“뭐, 뭐든지. 정말로?”
“네, 기운 내서 잘 다녀오라는 뜻에서요. 가서 바람피우지 말라는 의미도 있고요.”
“바람은 무슨. 아무튼 소원이라…….”
소원.
뭐든지 들어준다.
온갖 야릇한 상상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었다. 민정의 도발적인 눈웃음 때문에 더욱 음란마귀가 날뛰었다. 마침 학교 앞이라 민정의 오피스텔이 코앞이었다.
‘안 되지, 안 돼.’
나는 필사적인 자제심으로 참았다. 사귀기로 한 날에 관계까지 가졌다. 가뜩이나 진도가 빠른데 여기서 또 그러면, 민정을 너무 함부로 대한다는 인상이 든다.
“키스해 줘.”
“풋, 겁쟁이.”
나는 울컥했다.
“지금이라도 소원 바꿀까?”
“안 돼요.”
깔깔 웃은 민정은 키스를 해왔다. 서로 입술을 맞대고, 숨결을 나누며, 서로의 혀를 정답게 애무한다. 점차 몸이 뜨거워졌지만, 나도 민정도 아쉬운 마음으로 참고 떨어졌다.
“저 이제 학교 가볼게요. 현지가 화낼 것 같아요.”
“그래, 돌아와서 보자.”
“영상통화랑 매신저 해요.”
“오케이.”
민정이 학교로 떠나자 나도 집으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고 짐을 꾸려 넣은 보스턴백을 들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

김포공항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회장님, 덴마크로 출국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시 일선에 복귀하시는 겁니까?”
“건강 이상설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회장님!”
“회장님! 답변 좀……!”
득시글거리는 기자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어 질문 공세를 해왔다.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가 박진성 회장의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경호원들은 벌 떼처럼 모여드는 기자들을 가로막고 길을 뚫었다.
그들이 간신히 마련한 길로 박진성 회장은 유유히 걸었다. 그 옆에는 제3비서실장 이정식과 내가 따르고 있었다.
박진성 회장 옆에 있는 탓에 기자들이 들이대는 카메라에는 내 얼굴까지 나올 터였다.
‘엄마, 나 9시 뉴스 출연할 것 같아.’
어디 뉴스뿐일까.
이러다 신문 1면에도 떡하니 내 얼굴이 나오게 생겼다.
박진성 회장의 전용기인 보잉 737에 올라탔을 때, 나는 비행기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화려한 내부시설에 감탄할 틈도 없이, 아무 자리에 주저앉고 탈진했다.
탁자 앞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댔다.
난생처음 경험한 기자들의 공세는 충격적이었다.
박진성 회장에게 한 질문인데도 옆에 있는 내가 더 떨렸다. 마치 집단 린치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늘 이런 일을 겪으며 살아왔다니.’
나는 기자들 앞에서도 표정 하나 안 바뀌는 박진성 회장의 굳은 심지가 경탄스러웠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큰 압박인지 잠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물론 박진성 회장도 피곤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아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휴우, 피곤하구만. 그거나 하나 줘봐.”
박진성 회장이 원하는 ‘그거’가 뭔지는 뻔했다.
“예.”
나는 생명의 불꽃을 만들어 건넸다. 불꽃을 한 입에 삼킨 박진성 회장은 이내 힘이 솟는지 기분 좋게 웃었다.
“내가 이래서 아침에 봤을 때 달라고 안 하고 참은 거야. 고생한 다음에 먹어야 더 극적이거든.”
“하하…….”
“어이구, 목 탄다. 마실 거나 좀 가져와 봐.”
박진성 회장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하자 스튜어디스가 금세 오렌지주스를 가져다주었다.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단정한 외모에 귀여운 인상을 가진 스튜어디스는 나에게 물었다.
“드실 것을 가져다드릴까요?”
“네, 커피요.”
“어떤 커피로 드릴까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스튜어디스는 금방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갖다 주었다. 커피를 마시며 나는 감동에 젖었다.
‘비행기 안에서 이렇게 편하게 지낼 수 있다니.’
오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진성그룹 회장 전용기’를 검색해 봤다.
‘듣자 하니 내부에 침실과 업무실은 물론이고 헬스장까지 있다던데.’
한번 구경해 보고 싶다.
그런데 그보다 일단은 옷부터 편한 걸로 갈아입어야겠다. 지금 입고 있는 슈트는 역시 불편해.
“회장님, 저 옷 좀 갈아입어도 되죠?”
“마음대로 해. 그런데…….”
박진성 회장은 스윽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왜 그런 싸구려 슈트를 입어? 돈도 많이 번 놈이.”
“옷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손목에 시계도 없고,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젊은 놈이 외모에 신경을 안 써?”
“그렇게 이상해요?”
핀잔을 받은 나는 멋쩍어서 머리를 긁적였다.
박진성 회장이 말했다.
“넌 지금 공적인 업무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거야. 상대에게 하찮게 보이고 싶은 게야?”
“아, 아니요.”
“가뜩이나 3회차밖에 안 된 시험자라니까 그네들 눈에는 가여운 놈으로 보일 텐데, 외모까지 그래서는 안 되지. 코펜하겐 도착하면 쇼핑부터 해.”
“알겠습니다.”
“너 영어도 못하지?”
“네…….”
“으음!”
박진성 회장은 자기 뒷목을 잡았다.
“어구구, 자넬 보면 가끔 성질이 나. 내가 네 나이 때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죄, 죄송합니다. 진정하세요.”
“하여간 자넨 존재 자체로 병 주고 약을 준단 말이야.”
그러면서 박진성 회장은 또다시 손가락을 딱딱 튕겨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네.”
아까 그 스튜어디스가 다가왔다.
“아가씨 이름 뭐야?”
“이수현입니다, 회장님.”
“코펜하겐에서 이놈 데리고 쇼핑 좀 해. 머리 스타일서부터 발끝까지 싹 고쳐 버려, 알아들어?”
스튜어디스 이수현의 시선이 나를 스윽 살핀다.
쪽팔림에 고개를 푹 숙이는 나. 그런 내가 웃겼는지 이수현은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못난이로 낙인찍힌 나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청바지와 셔츠, 카디건, 블레이저, 스니커즈 차림으로 갈아입었는데 이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지 혀를 차는 박진성 회장이었다.
‘그러는 자기는 얼마나 옷을 잘 입는… 아, 시계 좋아 보인다.’
뭔가 번쩍거리는 손목시계를 보며 나는 내심 감탄했다.

***

약 12시간 정도 비행한 끝에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시각으로 오후 4시경이었다.
박진성 회장은 대외적으로 보여야 할 공식 일정을 위해 따로 움직였다.
홀로 공항에 남겨진 나는 미아가 된 기분을 느끼며 불안해하다가 스튜어디스 이수현의 안내를 받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네.”
나는 병아리처럼 쭐레쭐레 이수현을 쫓아다녔다.
이수현은 나를 이끌고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움직였다. 중년의 택시기사에게 뭐라고 하는 그녀의 말을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생소한 풍경의 생소한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하였다.
코펜하겐.
난생처음 밟아보는 유럽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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