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56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56화
“우린 이제 부자 된 거지?”
“얘가 어디서 은근슬쩍 우리래?”
“아앙, 오빠!”
“잠깐!”
나는 엉겨들려는 현지를 최혁에게 배운 사이드스텝으로 피했다. 수련의 효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다니.
“뭔가 착각하나 본데 이건 내 돈이 아니야.”
“응? 그럼?”
“공금! 그래, 창업한 법인의 공금이야. 그러니까 이게 내 돈이라고 착각하지 마.”
“방금 지어낸 말 아니야?”
얘는 왜 쓸데없는 데서 날카로워?
“부자 되기 쉬운 줄 알아? 내가 무슨 수로 10억을 떡하니 벌어?”
“에이, 뭐야.”
다행히 아둔한 현지는 내 말에 수긍해 버렸다. 다행이다.
“근데 무슨 쇼핑몰?”
“패, 아니, 컴퓨터 부품 쇼핑몰이야.”
하마터면 패션이라고 말할 뻔했다. 그랬으면 현지가 무진장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를 모델로 써달라는 등의 헛소리를 했겠지?
“그래? 그 쇼핑몰 모델 필요 없어?”
…봐라. 얘가 현지다.
“컴퓨터 부품에 모델은 무슨 모델이야? 필요 없어.”
“쇼핑몰은 잘되고?”
“그냥저냥 용돈벌이 수준이더라. 나는 지분이 많지 않아서.”
“그럼 오빠 진성그룹에 취업해서 받는 연봉이랑 그것까지 합하면, 대박! 오빠 진짜 돈 많이 벌겠다.”
“뭐, 그냥 먹고살만 한 정도지.”
“아이, 왜 또 빼고 그래.”
10억 쇼크에서 벗어난 현지는 다시 기운을 차렸는지 애교를 떨기 시작한다.
현지가 유독 나에게 이렇게 아양 떠는 이유가 있다.
현지에게 용돈을 주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우리 누나,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노처녀 김현주 양이시다. 누나한테는 현지가 아무리 아양을 떨어봤자 국물도 없다.
그에 비하면 난 훨씬 만만한 봉이었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현지의 앙탈에 못 이겨 내가 양보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오빠, 그러지 말고 나 좀 봐주라. 언니 눈치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단 말이야.”
“응?”
“아마 나 대학 졸업하면 용돈 끊을 생각인지도 몰라.”
정말 눈치 백단이구나.
“언니는 정말 옛날부터 나한테 너무하지 않아? 늦게까지 놀다 오면 혼내고 과자도 오빠 꺼 먹지 말라고 그러고.”
내 과자 뺏어 먹지 마 좀!
“여동생 사랑이 없어, 정말.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막내인데 귀여워해 줘도 되잖아?”
“바로 네 머릿속에 그런 계산이 있으니까 문제지.”
“아무튼 오빠 나 용돈 좀 주라 응? 내가 진짜 오빠한테 잘할게. 친구 소개시켜 줄까? 학교 친구들 중에 민정이같이 노는 애 말고 공부 잘하고 참한 애들도 있어. 오빠 차에 타고 학교 가니까 애들이 오빠 소개시켜 달라고 난리도 아니더라.”
글쎄다. 제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현지네 학교 학생이면 그 클래스는 안 봐도 뻔하지.
“아 참, 그리고 민정이 조심해. 요즘 제대로 오빠 노리고 있어.”
“날?”
“응, 내가 전에 클럽 가자고 했더니 이제 그런 데 안 간다는 거야.”
“너도 클럽 그만 가.”
현지는 내 말을 깨끗이 씹으며 제 할 말만 계속했다.
“이제 참한 여자로 살겠다나 뭐라나? 맙소사, 얼마 전부터는 한식 조리 기능사 공부도 시작했다? 양식이랑 중식도 따겠대!”
“그게 뭐 어때서? 좋은 일이지.”
“이게 다 오빠 노리는 거라니까? 여친도 아니고 아예 오빠 마누라 자리 노리고 벼르는 거야.”
“억측이야.”
“아무튼 그 여우 같은 계집애 조심해.”
“몰라. 당장은 여자 생각이 안 나.”
내가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인데 여자 생각이 날 까보냐?
“…….”
“…….”
“응? 안 나가고 뭐해? 아직 볼일 안 끝났어?”
내 물음에 현지는 대뜸 내 무릎 위에 걸터앉았다.
“오빠, 나 용돈! 응?”
“왜 나한테 용돈을 달래니? 곧 있으면 네가 나보다 더 많이 벌 텐데.”
의아해하는 현지에게 나는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닭강정.”
“꺄악! 진짜! 오빠 진짜 죽을래?!”
노발대발하는 현지였다.
현지는 아예 내 방 침대에 드러눕고 용돈 줄 때까지 안 나가겠다고 뻗대기 시작했다.
내가 쫓아내려고 하자, 골뱅이처럼 이불 속으로 들어가 셔츠와 바지를 벗어던지는 만행을 저질렀다. 강제로 끌어낼 수도 없고 도리가 없었다.
“안 주면 사업한다고 엄마랑 언니한테 이를 거야!”
“졌다, 졌어.”
나는 현지의 계좌로 50만 원을 이체시켜 주었다. 현지는 모바일뱅킹으로 계좌를 확인하고는 꺅꺅거리며 좋아했다.
“오빠, 고마워! 사랑해!”
“옷 입고 나가!”
“응!”
현지는 이불 속에서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서 비로소 내 방을 떠났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후에, 나는 그제야 다시 모바일 뱅킹 화면을 바라보았다.
10억.
현지에게 준 50만 원은 티도 나지 않았다.
“하하하.”
나는 웃었다.
적어도 내가 죽기 전에는 현지의 미래를 위한 돈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겠다 싶었다. 엄마와 누나는 알아서 잘 살 테지만 현지는 걱정이거든.
그런데 그때였다.
위잉.
스마트폰에 진동이 왔다. 민정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유민정^^*: 맛있겠죠?]
그런 메시지와 함께 고추장 양념을 바른 먹음직스러운 북어구이의 사진이 도착했다.
[나: ㅇㅇ 맛있겠다. 요즘 한식 조리 기능사 공부한다며?]
[유민정^^*: ㅎㅎㅎ 현지한테 들었어요?]
[나:ㅇㅇ]
[유민정^^*: 언제 한번 드시러 오실래요? 제 솜씨 보여줄게요]
‘헐.’
현지의 말이 옳았다.
민정은 나를 노리고 있었고, 이젠 콘셉트도 바꿨는지 대놓고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직설적으로 거절할 수도 없고, 나는 에둘러 답했다.
[나: 내가 덴마크로 출장 가서 언제 올지 모르겠네. 돌아오면 연락할게^^]
[유민정^^*: 덴마크요?]
[나: ㅇㅇ 일 때문에]
[유민정^^*: 멋져요! 저도 덴마크 가보고 싶은데 @.@]
[나: ㅋㅋ 아무튼 다녀와서 연락할게]
[유민정^^*: 언제 가시는데요?]
끄응, 에둘러 거절한 걸 알 텐데 일부러 모른 체하는 게 틀림없었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왜 갑자기 콘셉트가 바뀐 거야? 포르쉐 때문이냐?!
[나: 수요일]
[유민정^^*: ㅇㅋ! 알았어요]
그렇게 대화는 끝났다. 뭘 알았다는 건지 나는 불길함을 느꼈다.
다음 날, 덴마크로 가기 하루 전에도 나는 똑같이 산장에서 회장과 만나고 복싱을 배웠다. 너무 빨리 배웠다며 오늘은 그동안 배운 점을 스파링을 통해서 복습하는 훈련을 했다. 블로킹이 제대로 되니 한결 더 쉽게 최혁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사각 링 위였다면 최혁을 코너로 몰아서 두들겨 팰 수 있었겠지만, 링은 없었기 때문에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전보다 정타를 덜 먹었다.
“휴우, 원채 잘 단련이 되어 계셔서 저를 압도하시는군요.”
“잘 가르쳐 주신 덕분이죠.”
“물론 절 이긴다고 그만 배워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아직 기술적으로 턱없이 부족해요.”
“물론이죠.”
배운 지 며칠이나 됐다고 내가 그딴 생각을 할까.
“가장 먼저 극복해야 할 것은 상대의 공격에 의해 템포가 끊기는 문제입니다. 스토핑으로 공격을 끊거나 위빙으로 피하면서 반격해야 하는데, 블로킹밖에 모르시니까 상대의 공격에 템포를 맞춰주게 되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피지컬로 밀어붙였어도 스파링 내내 분위기를 주도한 건 최혁이었다.
“오늘은 스토핑을 하죠.”
스토핑은 주먹이나 팔로 상대의 공격 동작을 좌절시키는 동시에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기술이었다.
그날 나는 최혁의 공격을 블로킹과 스토핑으로 막는 연습을 했다. 하루 종일 연습하고 싶었는데 최혁이 너무 빨리 (사람인지라) 지쳐서 길게 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인가 싶기도 했지만, 나는 최혁에게 복싱을 배운 성과를 그날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쉬익― 뻐억!
“꽤애액!”
실프를 시켜 산을 뒤져서 찾아낸 멧돼지를 상대로 복싱이 빛을 발한 것이다.
예리한 펀치.
올바른 동작에서 뻗어 나가는 날카로운 펀치가 보다 위력적인 권풍을 만들어냈다. 바람의 가호만 사용했음에도 멧돼지는 맥을 못 췄다.
‘레벨이 낮아서 위력이 없었던 게 아니라 내 동작이 형편없었구나.’
물론 초급 1레벨밖에 안 돼서 위력이 낮은 이유도 있겠지만.
멧돼지가 돌진하려는 순간, 나는 빠르게 잽을 날려 권풍으로 앞다리를 맞춰 쓰러뜨리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스토핑을 배우면서 상대의 템포를 끊는 중요성을 깨닫게 된 덕이었다.
“불꽃의 가호.”
바람과 불꽃이 더해진 나의 공격은 보다 위력적이었다.
콰르릉!
있는 힘껏 스트레이트를 뻗자 멧돼지의 거구가 폭발에 비틀거렸다.
두려움에 질린 멧돼지가 뒤돌아 달아나려는 순간, 나는 기회가 싶어서 달려들었다.
바람의 가호로 훌쩍 도약하여 단숨에 거리를 좁힌 후, 멧돼지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뻐어억!
콰아앙―!
“꽤애액!”
안에서 뭔가가 우지직 부서지는 느낌이 발을 통해 전달되었다.
멧돼지는 쓰러져서 숨을 헐떡거리며 괴로워했다.
‘미안하다.’
나는 애도를 표해준 뒤 실프를 시켜 바람의 칼날로 마무리했다.
‘확실히 강해졌어!’
나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걸 배워 봤자 당장 효과가 있을까 불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멧돼지를 상대로 전과는 확연히 다른 공격력을 확인하게 되었다. 확신이 들었다. 이번 휴식 기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 배운다면 더 강해질 수 있겠다 싶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습에 몰두하던 나는 날이 어두워지자 슬슬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일은 덴마크 가는 날이지.’
해외여행이라고는 군대 전역 후에 북경 다녀온 게 전부였다.
내가 드디어 유럽에 가보게 되다니 기대 만발이었다. 더군다나 그냥 비행기가 아니다. 박진성 회장의 전용기다!
비행기 안이 호텔처럼 되어 있으려나?
얼른 짐을 싸야겠다 싶어서 나는 차를 타고 천안으로 돌아갔다. 운전에 익숙해지니 슬슬 포르쉐를 모는 재미가 빠져들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현지가 일찍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혼자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안녕하세요!”
활기차게 인사하는 두 여자.
한 명은 민정이었다. 그리고 또 한 여자도 전에 클럽에서 봤던 그 애였다. 현지의 클럽 친구들이 여기 다 모였구나.
“사백아, 또 놀러 가냐?”
내 물음에 현지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민정과 친구가 키득거렸다.
“민정이가 밥해주겠대.”
“밥?”
민정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빠 내일 덴마크 가신다면서요? 그래서 그 전에 보고 싶어서요.”
“오빠, 너무 보고 싶었어요. 좋은 데 취직하셨다면서요? 대박! 저도 오빠 차 태워주세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나는 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현지는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딴청을 피웠다.
아니, 민정은 안 된다며 그렇게 뜯어말리더니, 얘를 집에 데려온 건 대체 무슨 경우야?
“조금만 기다리세요. 밥은 다 됐어요.”
민정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또 다른 친구는 진성그룹은 어떻게 취직하게 된 거냐, 연봉은 얼마냐, 차는 좋으냐며 연신 속물스런 질문을 해댔다. 아, 환멸스럽다.
피곤함을 느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내일 출장 준비해야 해서.”
“네, 그러세요.”
내 방으로 들어가 내일 가져갈 여권과 옷가지 등을 챙기고 있는데, 현지가 슬그머니 들어왔다.
“오빠~”
“민정이 조심하랄 땐 언제고.”
“아잉, 그게 있잖아. 민정이가 지현이도 같이 끼고 와서는 우리 집에 놀러가겠다고 생떼를 부리잖아. 지현이도 오빠 보고 싶다고 졸라대고. 요리학원에서 배운 거 보여주겠다고 하는데 계속 거절할 수도 없어서…….”
나는 현지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현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젠 나도 몰라.
될 대로 되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