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77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7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77화
“오빠, 저 뭐 달라진 거 없어요?”
남자를 겁먹게 하려면 이 질문을 하면 된다.
근데 다행히 달라진 게 아주 확연했다.
“머리 잘랐네?”
“히히, 네.”
미정은 한 바퀴 빙 돌아보였다.
긴 생머리였던 미정은 브라운 톤으로 염색한 단발머리가 되어 있었다.
C컬 펌인지 뭔지 난 잘 모르지만, 아무튼 예뻐 보였다. 1년 만에 본 터라 뭘 해도 사랑스럽다.
“갑자기 머리는 왜? 실연당했니?”
민정은 깔깔 웃었다.
“이제 곧 대학도 졸업이잖아요.”
졸업식은 내년이지만 수업은 며칠 후에 끝나니 사실상 대학교와 작별이라고 한다.
“졸업하면 바로 올라갈 거야?”
“아직 방 알아보고 있어요. 구해지는 대로 이사하려고요.”
나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나도 독립할 생각이었는데 같은 동네로 갈까?”
“정말요?”
“응. 그럴 때도 됐잖아. 이제 돈도 충분히 있고.”
“우와! 그럼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는 거네요?”
“흐흐, 어디든 쫓아간다. 나 스토커 기질 있는 거 알지?”
“스토커 기질은 모르겠고, 살짝 공처가 기질?”
“큭, 부인할 수가 없다.”
“히히히.”
민정은 내 곁에 찰싹 붙었다.
머릿결의 향기가 너무 좋다. 1년 만에 맡는 민정의 체취였다.
근데 민정은 문득 날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뭐가?”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본 것 같지?”
“그, 그래?”
“네, 오빠 왠지 군대 갔다가 첫 휴가 나온 남친 같은 느낌이 나요.”
나는 움찔했다.
“내 어디가 그래?”
“스킨십을 되게 의식하는 점?”
“…….”
식스센스가 정말 날카롭다. 귀신이냐.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는데, 주로 이사할 지역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민정이 다닐 회사는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다고 했다.
“친척 오빠가 그러는데 부천이 살기 좋대요. 백화점이랑 대형마트도 많고 편의시설도 좋대요.”
“그래? 그럼 부천으로 당장 알아볼까?”
스마트폰으로 부동산 어플을 다운받아 부천 지역 매물을 확인해 보았다.
민정도 스마트폰을 열심히 만지작거리며 원룸 매물을 살피는 중이었다.
나는 가장 비싼 매물 순서로 보았다.
상단에 곧바로 오피스텔 최상층 펜트하우스가 나타났다. 매매가가 무려 13억짜리였다.
관리비가 많이 나오는지 월세 사는 기분이라는 등 말이 많았다.
‘뭐, 돈은 썩어나니까.’
누진세니 뭐니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지.
방 4개, 화장실 2개, 시내 정경이 병풍처럼 펼쳐진 전망.
무엇보다도 무려 60평이 훌쩍 넘는 광활한 테라스가 멋졌다. 사진을 보니 말이 테라스지 마당이나 다름없었다.
‘저렴한데, 하나 사야겠다.’
전혀 저렴하지 않지만 스위스 계좌에 잔고가 300억이 넘는 나한테야 뭐.
“오빠, 뭐 봐요?”
민정이 무심코 내가 보고 있는 매물을 봤다가 기겁을 했다.
“히익! 오빠 여기 살려고요?”
“응. 그럴까 싶어.”
“너무 비싼 데 아니에요?”
“13억밖에 안 해.”
“밖에…….”
민정은 몽롱한 얼굴로 펜트하우스의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좋지?”
“오빠, 너무 부러워요! 나도 이런 데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사이에 뭘. 언제든 놀러와.”
“정말이죠?”
“그럼.”
실은 동거하고 싶다.
일단은 놀러 오는 것으로 시작해야지.
자주 놀러오게 되면, 자기 원룸보다 내 집에 머무는 날이 더 많아질 테고, 결국은 자연스럽게 동거.
‘흐흐흐.’
12개월간 독수공방한 덕에 음흉한 쪽으로 머리가 팽팽 잘도 돌아갔다.
“이 방을 내 침실로 쓰는 게 좋겠지? 화장실이랑 드레스룸이 딸려 있으니까.”
“네! 그리고 이 방은 오빠 작업실로 쓰는 게 좋겠어요.”
“작업? 달리 작업할 게 없는데.”
“그래도 컴퓨터랑 책이랑 놓고 다용도로 쓰면 되잖아요.”
“아, 그거 좋다.”
“그리고 남은 방 하나는 손님방! 손님 오면 재워주는 방 어때요? 호텔방처럼 꾸며놓고.”
“괜찮다.”
“히히, 그죠?”
민정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며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열띠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때마다 나는 동의해 주면서 내심 미소를 지었다. 그래, 민정아. 이 집이 바로 네 집이란다.
“앙, 오빠 너무 좋겠어요. 드라마에 나오는 부자들 사는 집 같아요. 이 테라스 봐요. 완전 산책로야!”
“여기다 큰 개 한 마리 키워도 될 것 같지? 시베리안 허스키 같은 거.”
“하앙, 최고예요.”
민정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때다 싶어서 나는 은근슬쩍 말했다.
“이 방, 네 말대로 손님방으로 꾸며놓을 테니까 네가 자주 와서 지내면 되겠다. 그치?”
그런데 민정의 얼굴이 새초롬하게 변했다.
“손님방? 옆에 안 재우고 손님방에 보내려고요?”
“어? 아, 아니.”
“치…….”
민정은 삐친 척을 했다. 그렇다. 분명 삐친 척이었다.
난 얘가 왜 갑자기 삐친 척을 하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무엇 때문에?’
분명 어떤 대답을 유도하려는 여우 짓이었다.
‘음, 그건가?’
나는 내가 생각한 모범답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같이 살자고 하면 부담스러울까 봐 그랬어.”
“오, 오빠…….”
이제 민정은 의외인 척, 감동한 척을 하고 있다. 귀여운 것.
“하지만 우리 너무 빠르지 않아요?”
…이 아이 좀 보게?
원하는 말을 제시해 주었는데 덥석 안 물고 튕겨?
이럼 나도 생각이 살짝 달라진다.
“그런가?”
“네…….”
“그래, 내가 너무 내 욕심만 차린 것 같다. 부담 줘서 미안해.”
“아, 아니에요.”
민정은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원하니 우리 밀당이나 한번 하자꾸나.
남친의 으리으리한 펜트하우스를 봐놓고도 원룸 매물이 눈에 들어오나 보자.
그렇게 동거 얘기가 끝나버리자 민정의 얼굴에 후회가 가득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서며 민정이 말했다.
“오늘 우리 집으로 가요. 밥해줄게요.”
뭔가 투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래, 맛있는 거 해줄 거야?”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거 해줄게요. 가는 길에 같이 장 봐요.”
“오케이.”
우리는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돼지갈비와 당근, 양파 등을 장바구니에 척척 넣는다. 민정의 얼굴에 결의가 어려 있었다.
‘힘내렴.’
나는 그저 흐뭇할 따름이었다.
집에 돌아와 민정은 바쁘게 부엌을 누비며 달콤한 돼지갈비찜을 푸짐하게 차려주었다.
‘이게 얼마만의 고기냐.’
엘프들과 채식만 하며 1년을 보낸 나는 감격하여 마구 먹었다. 밥을 두 공기나 비웠다.
“배불러요?”
“응, 진짜 맛있다.”
“그럼 우리 같이 씻을까요?”
“…엑?”
민정은 내 손을 붙잡고 욕실로 향했다.
그날, 잘못 튕긴 대가로 민정은 푸짐한 요리부터 잠자리까지 풀코스로 나를 만족시켜야 했다.
알몸으로 내 품에 안긴 민정이 속삭였다.
“좋았어요?”
“응.”
오늘 하루는 정말 천국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헤헤, 우리 이러니까 부부 같죠?”
알았으니까 그만 좀 보채렴.
“우리 같이 살자, 민정아.”
“아이, 또 그러신다.”
또 버릇처럼 한 번 튕기고 보는 민정. 너 그거 습관이지? 조건반사지?
“휴, 미안. 안 그러기로 해놓고 또 이러네.”
“예?”
당혹에 찬 민정.
“이제 다신 이런 말 하지 않을게. 정말 미안.”
그러자,
“이씨!”
발끈 화가 난 민정이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
일단 결심을 했고, 돈은 많으니 일사천리였다.
가족들을 모아놓고 독립하겠다니까 다들 찬성했다.
백수 짓 하던 예전과 달리 이젠 번듯한 직장이 있으니 독립해도 상관없는 나이라 여긴 것이다.
“집은 구했고?”
엄마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원룸이 있더라.”
당연히 내 재산 규모는 우리 가족에게는 비밀이었다. 돈의 출처를 추궁할 게 뻔하니까.
바보인 현지와 달리 엄마와 누나는 내가 꾸며낸 스토리가 먹히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가족들에게 통보한 뒤, 다음 날 곧장 부천으로 달려갔다.
미리 연락해 놓은 부동산 업자와 만나 함께 펜트하우스 매물을 실사하였다.
“괜찮네요.”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멋진 집이었다. 호화롭다는 느낌이 팍팍 들어서 마음에 들었다.
“이만한 매물이 없죠. 돈만 있으면 다들 살고 싶은 딱 그런 집 아닙니까.”
“근데 현금 일시불로 계좌이채 할 수 있는데 12억 3천까지 깎을 수 있나요?”
“어휴, 지금도 싸게 나온 거라…….”
“그럼 아무것도 없다 이거죠?”
내 물음에 부동산 업자가 말했다.
“으음, 제가 잘 말해봐서 최대한 깎아보겠습니다.”
바로 현금을 쏜다니까 주인으로부터 12억 5천을 제안받았다.
돈이 아쉬운 건 아닌데, 그래도 깎을 수 있으면 깎는 게 미덕이거든.
바로 계약하고 돈을 송금시키면서 펜트하우스는 내 소유가 되었다.
“적당한 원룸 하나 따로 알아봐 주실래요?”
“원룸은 왜요?”
“여러 용도로 쓰게요.”
엄마와 누나의 방문, 민정의 부모님의 기습, 민정과의 이별 등 여러 가지 상황을 대비한 용도였다.
펜트하우스에는 기본 옵션으로 있는 냉장고,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오븐, 드럼세탁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텅 비었다.
하루 만에 초스피드로 사서 그런가, 이게 내 집이 되었다는 실감이 들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중얼거렸다.
“일단 침대부터 살까?”
이왕이면 킹사이즈로 사야겠다.
스마트폰 메모 어플로 필요한 것을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침대, 책상, 컴퓨터, TV, 식탁, 소파.
또 뭐가 있더라?
나는 메모 내용을 붙여넣기해서 민정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민정이 답장을 보내왔다.
[유민정^^*: 취사도구, 식기, 세면도구, 목욕용품, 책꽂이, 아참 옷장은 있나요?]
[나: ㅇㅇ 방마다 벽장 설치되어 있고, 드레스룸 있잖아.]
[유민정^^*: 가구 같이 고르면 안 돼요?]
[나: 왜 안 돼, 같이 살 집인데]
[유민정^^*: 꺄앙♡]
그렇게 나는 독립을 했다.
***
다음 날, 민정과 함께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거액의 쇼핑을 했다.
킹사이즈의 침대.
모던한 스타일의 책상과 식탁, 소파 등.
민정을 위해 화장대도 구매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도 머리 만지고 얼굴에 뭐 바를 때 필요할 듯했다.
“아흥, 행복해!”
민정은 돈을 펑펑 쓰는 맛에 흠뻑 취했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에 드는 최고의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달콤한 것이었다.
전자제품 매장에서는 우선 85인치짜리 TV부터 질렀다.
“이걸로 드라마 보면 완전 극장이겠어요.”
“극장이라…….”
그럼 빵빵한 사운드도 필수지.
홧김에 오디오도 질렀다.
컴퓨터는 큰 욕심이 없어서 적당한 올인원PC를 구매했다.
지름신의 대행진!
하루 만에 필요한 것을 전부 사버렸다.
“우리 미친 것 같아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민정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뭐, 어차피 다 필요한 것들뿐이잖아.”
하나같이 비싼 것들이라 그렇지.
그날 집에 가서 대기하고 있으니, 주문했던 물건들이 하나둘 이삿짐처럼 배송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주문한 물건을 가져와 설치하고 갈 때마다, 텅 빈 펜트하우스는 사람 사는 집답게 변모하였다.
“우와! 이건 사진 찍어야 해!”
대화면 TV와 오디오가 배치된 거실을 보며 민정이 셀카를 찍고 난리도 아니었다.
“잠깐, 현지한테 보낼 건 아니지?”
“아참, 안 보낼게요.”
방심할 수가 없군.
현지도 내가 돈 많다는 걸 유럽여행을 통해 대충 눈치챘지만, 이 정도로 부자라는 건 아직 모른다.
내 계좌 잔고를 보면 얼마나 집요하게 매달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