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64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57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64화
메인스킬 정령술 덕분에 나는 손쉽게 엘프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내게 이런 시험이 주어진 게 아닐까 싶다.
시험의 목적은 시험자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닐 터였다. 어떤 최종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각 시험자마다 적합한 역할을 부여한다고 보면 이치에 맞다.
어쩌면 그 율법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는 내가 3회차에서 라이칸스로프의 영역을 지나 이곳에 이르도록 예정한 것이 아닐까?
“당신은 우리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라 할지라도 꼭 친한 친구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요.”
어머니들이 말했다.
“우리는 아직 당신을 모르니까요.”
“귀여운 정령들을 가졌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안 돼요.”
‘기, 기고만장이라니?’
난 댁들이 정령의 귀여움에 그토록 열광할 줄은 예상 못했다고!
황당함을 느꼈지만 나는 침착하게 교과서적인 대답을 했다.
“당연히 관계에는 순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계심을 풀고 서로 다가갈 기회를 마련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천천히 여러분의 신뢰를 얻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어머니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난 엘프들의 친구가 되어 마을에 머무는 걸 허락받았다.
어린 엘프들은 내 소환시간이 고갈될 때까지 정령들과 놀다가 뿔뿔이 흩어졌다.
“따라와라, 머물 곳을 마련했으니까.”
“고맙습니다.”
“그냥 말을 편히 해도 좋다.”
“그래도 될까? 그런데 제이크 넌 나이가 얼마나 되지?”
“102살.”
“…정말 말을 놓아도 될까요?”
“엘프의 수명은 인간의 3배가량이지.”
그렇구나.
제이크의 나이를 3으로 나누면 34세 정도니 나와 비슷한 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난 아직 아슬아슬하게 30대가 아니지만 말이지!
“그럼 어머니들께서는 보통 연세가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엘프의 여성은 200세를 넘기면 누구나 어머니들이 되지.”
“허…….”
그 아줌마들이 전부 200세를 넘긴 고령 엘프들이었다니.
나이 들었어도 다들 빼어난 미모였고 노인은 없어 보였는데, 엘프는 인간과 달리 노화(老化)에 강한 모양이었다.
제이크가 마련해 준 거처는 천막이나 다름없는 집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떤 직물로 짰는지 천막의 천이 벽처럼 튼튼했고, 낙엽과 지푸라기를 모아 엮은 침대도 푹신하고 좋았다.
다만 램프도 촛불도 없어서 너무 어두웠다.
촛불이 없냐고 묻자 제이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그런 게 필요했지. 엘프는 어둠 속에서도 앞을 잘 본다.”
오래 살고 잘생겼고 동안이고 밤눈도 좋고. 정말 나도 엘프이고 싶다.
“그럼 편히 쉬어라.”
제이크는 날 두고 훌쩍 떠나버렸다.
불을 피우면 어떻게 생각했지만 민폐 같아서 관뒀다. 엘프들은 불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불이 나무를 태우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천막 입구가 걷히면서 웬 여성의 실루엣이 어둠 속에 나타났다.
“이봐, 인간!”
낮에 보았던 제이크의 연인 엘라의 목소리였다.
근데 왜 화난 음성이지?
“무슨 일이시죠?”
“왜 우리 엘리스와 안 놀아준 거야!”
“예?”
“다른 애들이 네 정령과 놀고 있을 때 우리 가여운 엘리스만 훔쳐보기만 했단 말이야!”
“아, 그랬나요? 죄송해요, 몰랐네요.”
누가 숨어서 훔쳐보는지 내가 무슨 수로 알아챈단 말인가.
하지만 엘라의 신경질적인 성격을 알고 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엘라는 수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엘리스와 놀아주도록 해. 너 오고 나서 집밖으로 나오지를 못한단 말이야! 내일도 엘리스가 집밖으로 안 나오면 다 네 탓인 줄 알아!”
“…….”
엘라는 할 말만 하고는 휙 하니 떠나 버렸다.
제이크는 대체 어디가 좋다고 저런 여자랑 사귀게 됐을까. 하긴 제이크도 성질이 좀 더럽긴 하지. 천생연분인가.
***
다음 날은 엘리스란 소녀도 집밖으로 끌어내서 놀아주었다.
쉬웠다.
실프가 엘리스가 있는 천막 안으로 꼬리만 집어넣고 살랑살랑 흔들며 유인했다.
실프를 쫓아 밖으로 나온 엘리스는 나와 맞닥뜨리고서 공포로 굳어버렸지만, 카사가 내 머리 위에 소환하자 다소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
다른 어린 엘프들과 함께 정령과 놀며 시간을 보냈다.
과연 엘프들인지 어린애들도 정령을 소환할 줄을 알았다.
애들이 소환한 정령이 사방팔방에서 날아다니니 내가 헛것을 보나 싶을 정도로 정신 사나웠다.
‘근데 대체 뭘 도와줘야 하는 거야?’
문득 떠오른 의문이었다.
-성명(Name): 김현호
-클래스(Class): 7
-카르마(Karma): 0
-시험(Mission): 제한시간 동안 갈색산맥의 엘프를 도와라.
-제한시간(Time limit): 28일 15시간 42분
아니, 엘프들이 어떤 문제에 처했는지를 알아야 도와줄 게 아닌가.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시험을 냈을 리는 없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알아내는 것 또한 시험의 일부일 것이다.
나는 가장 만만한 제이크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길잡이 스킬로 제이크가 동쪽에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나는 동쪽으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이크는 마을에 없었다.
밖으로 나간 모양인데, 얼마나 멀리 갔을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찾아 나설까 갈등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가까이에 있는 여성 엘프를 하나 붙잡고 물어보았다.
“제이크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평소처럼 순찰 갔겠지.”
“그래요? 감사합니다.”
“근데 아침에 보니까 엘라도 몰래 마을을 떠나더라, 히히히.”
“가, 감사합니다.”
음흉하게 웃는 여성 엘프에게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대로 마을을 벗어나 제이크가 있다고 느껴지는 방향으로 향했다.
“바람의 가호.”
스킬 바람의 가호를 펼치고서 나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스킬 지속 시간이 15분밖에 되지 않으니 최대한 빨리 달렸다.
파앗, 팟! 파앗!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내 몸이 5, 6미타씩 쭉쭉 앞으로 날았다. 깃털처럼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너무 유쾌해서 나는 신 나게 달렸다.
“실프!”
-냐앙?
“제이크를 찾아봐!”
-냥!
실프가 빠르게 쏘아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냥!
돌아온 실프가 앞을 가리켰다.
‘좋아!’
가까워졌다 싶어서 나는 최대 속도로 달렸다.
마침내 제이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제이크의 얼굴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고, 그 옆에는…….
엘라가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있었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엘라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피부가 창백한 엘프들이라 안색의 변화가 아주 잘 드러난다.
“뭐냐?”
제이크가 짜증난 목소리로 물었다.
“…근무태만 아냐?”
“뭐가 근무태만이냐! 순찰 중에 뭘 하든 내 자유다!”
아, 그래. 엘프답게 참으로 자유분방한 군기다. 우리나라였으면 바로 영창행일 텐데.
“근데 무슨 일이냐?”
“아, 그게…….”
잠깐 머리를 굴린 나는 질문을 했다.
“왜 순찰을 하시는 거야?”
“왜냐고? 영역 관리 차원에서 당연한 거 아니냐?”
“마을에 보니 남자들이 전부 사라져 있던데 원래 다들 제이크처럼 순찰을 도는 거야?”
“원래는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순찰을 하지는 않지.”
제이크가 말했다.
“최근 들어 주변의 동향이 이상해져서 순찰을 강화했다. 일전에 엘리스가 납치될 뻔했던 일처럼 인간의 침입도 잦아졌고, 동쪽 숲에 사는 라이칸스로프 놈들도 자주 인근을 기웃거리다가 사라지고.”
“라이칸스로프?!”
내가 놀라 묻자 제이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 뭘 그렇게 놀라느냐?”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보통 그런 식이오. 한 번의 시험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시험으로 연계되는 경우가 많지. 마치 인연과도 같소.’
오딘이 그랬고,
‘힌트는 이미 받지 않았던가요?’
라고 아기 천사가 그랬다.
게다가 실버 씨족의 수장 레온 실버!
놈은 정령술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인간 목장을 구축하고 씨족의 규모를 짧은 시간에 5배로 불렸다. 왜? 무슨 목적으로?
‘그랬구나.’
모든 것이 율법의 안배라는 것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나에게 정령술을 메인스킬로 선택할 수 있게 했을 때부터, 아니, 죽은 나를 시험자로 임명했을 때부터 지금의 상황이 정해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제이슨이 물었다.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제이크에게 말했다.
“라이칸스로프에 대해서라면 내가 해줄 이야기가 있는데.”
“뭐? 그러고 보니 넌 동쪽의 숲에서 왔었지. 아는 게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이칸스로프 실버 씨족과 충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내가 시험자라는 사실은 숨겼고, 동료를 잃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제이크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이건 어머니들께 알려드려야 하지 않아?”
애정행각을 치르다 말아서 표정에 욕구불만이 섞인 짜증 상태였던 엘라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라이칸스로프들은 숫자가 많지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건 예상 밖이군. 확실히 어머니들께 알려야겠어.”
‘좋아!’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사실을 알려주었으니 확실히 엘프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4회차 시험을 시작하기 전에 오딘에게 받은 약속도 있었다. 군대를 보내 실버 씨족을 토벌하겠다고 말이다.
‘이번 시험은 손쉽게 해결되겠구나.’
엘프 마을에서 남은 제한시간 28일을 보내면 클리어 될 듯했다. 내가 달리 힘을 써야 하는 일은 없어 보였다.
***
순찰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간 제이슨은 어머니들에게 내가 들려준 말을 보고한 모양이었다.
그날 오후 무렵, 나는 어머니들의 부름을 받았다.
“제이크에게 얘기는 들었다.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상세히 들려다오.”
“예.”
나는 다시 한 번 적당히 각색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확실히 레온 실버라는 라이칸스로프는 정령술에 대해 잘 아는 편이구나.”
“초보적이긴 하지만 라이칸스로프치고는 정령술에 잘 대응했어.”
“20년간 씨족의 숫자를 5배로 늘렸다는 것은 우릴 공격하기 위해 힘을 모은 것일 수도 있겠어.”
“20년이라는 말이 조금 걸리는데?”
어머니들 중 한 여인이 말했다.
다른 어머니들도 뭔가가 떠오른 모양인지 한마디씩 한다.
“그러고 보니 그 시기에 라이칸스로프와 싸운 적이 있었지?”
“그래, 나이든 라이칸스로프가 무리를 이끌고 우리 영역을 침범한 적이 있었어.”
“그게 아마 24년 전이었을 거야.”
어머니들의 두서없이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대략 상황이 짐작되었다.
24년 전, 도전자에게 실버 씨족의 수장 자리를 빼앗긴 나이 든 라이칸스로프가 자기 가족을 이끌고 실버 씨족의 영역에서 추방되었다.
바로 그 추방된 무리가 갈색 산맥에 발을 들였다가 엘프들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다고 한다.
“그때 나이 든 라이칸스로프를 놓쳤다고 했어. 마지막까지 뒤쫓다가 끝내 놓친 게 내 남편이거든.”
“그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한 번 추방된 라이칸스로프가 다시 자기 씨족에게 돌아갈 줄은 몰랐어.”
한마디로 가족을 전부 잃고 오갈 데가 없어진 라이칸스로프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실버 씨족에게 되돌아갔다.
그런데 실버 씨족은 돌아온 그를 받아주었고, 레온 실버가 그에게서 엘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강한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설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