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86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8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86화
“아라크네를 손에 넣었다면 인간의 시체로 만든 좀비 따위보다 훨씬 강력한 언데드가 될 텐데, 왜 지금껏 쓰지 않았던 거냐?”
데릭이 물었다.
내가 말했다.
“그쪽도 전력을 발휘한 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아라크네들은 다른 용도로 썼고요.”
“다른 용도?”
난 거미줄을 가리켰다.
“점성 없는 거미줄을 왜 여기에 설치했을 것 같으세요?”
“…잘 모르겠군.”
“재활용이에요.”
내 말에 데릭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말을 이었다.
“이런 거미줄을 잔뜩 쳐두어서 추락하는 좀비들을 안전하게 받아낸 거예요. 시체를 온전히 보존해서 계속 공격에 써먹을 수 있도록 말이죠.”
“…일단 한번 가보자.”
데릭의 말에 콥은 다시 실프를 시켜 바람의 장벽을 거두었다.
우리는 다시 추락했다.
내 예상은 옳았다.
절벽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찢어진 거미줄이 많았는데, 그건 아마 어제 오딘의 활약으로 발생한 산사태 때문일 것이다.
“제기랄.”
데릭이 보기 드물게 욕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좀비들을 아래로 떨어뜨려 버리는 방식으로 싸워왔는데, 그 때문에 좀비 떼가 계속 공격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니까.
“우린 진즉에 절벽 아래를 탐사했어야 했나 봐.”
“그러게. 이걸 봤다면 더 빨리 조치를 취했을 텐데.”
“빌어먹을. 그동안 헛짓거리를 했어. 놈들을 기어 올라오는 족족 산산조각을 냈어야 했는데.”
엘프들이 한마디씩 자책과 탄식을 했다.
난 그런 그들을 격려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좀비들이 소모되지 않은 덕에 흑마법사가 계속 똑같은 공격을 반복했던 거예요.”
모두들 의아한 얼굴로 날 보았다.
“그렇게 번 시간 동안 제가 생명의 나무를 회복시키고 작은 생명의 나무도 각성시킬 수 있었잖아요. 우리에게 큰 이득이었어요.”
데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시간은 우리의 편이었다는 건가.”
“네.”
“옳은 말이다. 생명의 나무가 두 그루나 생겨난 덕에 우리들의 힘이 더 강해졌으니까.”
“호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로 헛수고가 아니었는데?”
“역시 킴이군.”
“우리가 생각해 보지 못한 관점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
콥을 비롯한 베테랑 엘프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나는 쑥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니까.
우리는 다시 추락해서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준비해라.”
우리는 저마다 무기를 꺼내들었다.
‘어제 했던 실험을 확인할 좋은 기회야.’
나는 잔뜩 기대했다.
잠시 후, 마침내 지상에 도달했다. 정말 엄청난 높이의 낭떠러지였다.
“크아아아!”
“크르르르!”
좀비들이 들끓고 있었다. 인간의 시체들로 만든 언데드들이 득시글거렸다.
“아라크네는 없군.”
데릭이 말했다.
내가 말했다.
“인간의 시체로 만든 좀비는 그냥 소모품이라는 거죠. 아마 흑마법사는 이미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이미 떠났다?”
“예, 보세요. 좀비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지 않죠? 어제 두 분이 좀비들을 형체도 안 남을 정도로 파괴하는 바람에 숫자가 크게 줄었을 거예요. 그 바람에 흑마법사도 더는 소모전을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떠났겠죠.”
“흐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겠군. 그럼 이 좀비들을 남긴 건…….”
“마지막까지 우리를 방심시키려는 거겠죠. 이곳에 내려왔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다른 방향에서 공격해 오겠구나, 하고 우리가 바로 눈치챌 테니까요.”
그때, 콥이 외쳤다.
“저기 동굴이 있는데?”
모두들 콥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협곡 안쪽에 동굴이 하나 있었다.
“저곳을 살펴봐야겠군.”
“잠깐만요.”
데릭을 내가 또 말렸다.
“뭐냐?”
“저 동굴, 여기 말고 다른 방면에 출구가 더 뚫려 있을까요?”
“모르겠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굳이 살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들어갔을 때를 대비해서 함정을 파놨을 가능성만 클 뿐이죠.”
“킴의 말이 옳아. 내가 실프를 시켜서 안을 살펴보지.”
콥이 나섰다.
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
콥의 실프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일단 절벽에 매달린 채로 정찰 결과를 기다렸다.
이윽고 실프가 되돌아왔다.
콥은 실프와 모종의 교감을 나눴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킴 말대로야. 언데드가 된 아라크네 9마리만 있었다는군.”
“실프와 대화를 나누실 수 있는 건가요?”
내가 묻자 콥은 웃었다.
“중급 정령과는 정신적인 교감을 통해 소통할 수 있어.”
“와…….”
내 정령들도 그렇게만 된다면 정찰이나 명령을 내릴 때 한결 편해질 텐데. 정말 메인스킬을 꾸준히 올려야겠구나.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나?”
데릭의 물음에 콥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띠더니, 결정을 내렸다.
“모두 정리하고 가자. 그래도 이것들을 그냥 놔두면 나중에 흑마법사가 또 이용할 수 있으니까.”
“동감이야.”
“저 정도야 쉽지.”
“전력으로 단숨에 해치운다.”
그러면서 데릭이 카사를 소환했다.
거대한 불의 거인이 나타나 데릭과 동화되었다. 카사가 스며든 데릭의 온몸에서 푸른 불길이 모락모락 흘러나왔다.
다른 엘프들도 무기와 함께 각자의 정령을 소환했다.
“실프, 카사!”
-냐앙.
-멍!
나 또한 귀여운 두 정령을 소환하고, 쌍권총도 꺼냈다.
“어제 연습한 것 알지? 그걸 써먹어보자.”
실프와 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데릭은 한순간에 쌍검을 휘둘러 불길을 사방에 난사하였다.
화르르르르르륵―!
“크아아!”
“아아아아!”
“으어어어!”
순식간에 화염의 강에 휩싸여 잿더미로 화하는 좀비들!
나는 데릭이 죽이지 못한 좀비 조무래기에게 쌍권총을 발사했다.
탕! 탕! 타앙! 탕! 타앙!
발사될 때마다 쏘아진 탄환은 놀랍게도 좀비 두 마리의 두개골을 일격에 꿰뚫고 그 뒤의 세 번째 좀비의 몸에 틀어박혔다.
한 발에 세 마리를 잡을 정도로 위력이 강화된 것이다!
‘좋은데?’
나는 신이 나서 사방에 쌍권총을 난사했다.
반경 10m 이내의 모든 좀비가 우수수 내 총에 맞고 쓰러졌다.
어느새 절벽 아래 협곡에 남아 있는 좀비는 없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데릭은 동굴 안을 향해 검끝을 겨누었다.
“끝이다.”
콰아아아!
검끝에서 발출된 화염이 동굴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끼이익!
끼익!
삐이이익!
안에서 스산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마도 언데드 아라크네가 불타는 소리이리라.
“이제 돌아가자.”
순식간에 청소를 마치고 데릭은 귀환을 결정했다.
“빈손으로 가기는 아쉬우니 올라가면서 전리품이나 챙기자고.”
콥의 말에 데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전리품이요?”
내가 물었다. 한 베테랑 엘프가 가르쳐 주었다.
“거미줄. 갖다 주면 여자들이 좋아할 거야. 좋은 옷감이거든.”
“아!”
우리는 콥의 실프의 힘으로 올라가면서 절벽 여기저기에 설치된 거미줄을 수거하였다.
점성이 제거된 상태라서 쉽게 수거할 수 있었다.
‘이걸로 셔츠를 만들어 입으면 끝내주겠네.’
칼이 듣지 않는 엄청난 셔츠! 목숨을 몇 번은 살려줄 대단한 방어구가 될 것이다.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모두 수거해서 절벽에 되돌아오니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와우, 이게 다 뭐야?”
“아내가 좋아하겠는데. 나도 조금 가져가도 되지?”
데릭이 손짓했다.
“다들 필요한 만큼 가져가.”
“아자!”
“다들 챙기자고.”
“너무 욕심 내지 마. 남으면 젊은 애들 것도 줘야지.”
“킴, 너도 이리 와. 아참, 넌 만들어줄 여자가 없나?”
콥의 말에 나는 나직이 신음을 했다.
민정이가 보고 싶다! 아니, 물론 민정도 이걸로 옷감을 짜서 셔츠를 만들 솜씨는 없겠지만.
“내 아내가 만들어주면 돼. 킴, 뭘 만들고 싶지?”
데릭이 물었다.
역시 데릭!
그럼 연장자 어머니가 내 것까지 만들어주는 건가? 가장 연장자이시니 솜씨도 좋겠지?
“안에 입을 티셔츠요.”
“좋은 선택이군. 알았다.”
데릭은 내 몫까지 거미줄을 챙겨주었다.
그러고도 남은 거미줄은 다른 남자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활 골무를 만들면 남자들에게 모두 돌아가겠군.”
“그 정도면 됐지.”
우리는 모두 마을로 귀환하기로 했다. 이제 이 절벽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일단 돌아가 쉬고 다시 방어선을 새로 구축하기로 했다.
나이 든 베테랑 전사 엘프들이 모두 돌아오자 어머니들이 달려왔다.
“여보!”
“다 같이 돌아오셨군요?”
“웬일로 일찍 오셨어요, 여보!”
“어서 오세요, 여보!”
그랬다.
당연하게도 그들의 반려는 200살 이상이 된 이 마을의 어머니들이었던 것이다.
연장자 어머니도 데릭에게 달려와 매달렸다.
“어머, 웬 거미줄? 그거 아라크네의 거미줄이에요?”
“그래.”
“어머머, 이리 주세요. 좋은 거 만들어드릴게요.”
“부탁하지.”
데릭이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무척 좋아하는 연장자 어머니였다.
미중년 부부의 정다운 모습에 나는 또다시 질투와 서러움이 밀려왔다.
“킴의 티셔츠도 부탁한다.”
“아, 그래요. 킴은 반려가 없으니까.”
‘크흑.’
졸지에 솔로 취급을 당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쪼르르 달려오는 자그마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몹시도 귀여운 소녀, 바로 엘리스였다.
엘리스는 연장자 어머니의 바지자락을 꼬옥 잡고 흔들었다.
“왜 그러니 엘리스?”
엘리스는 거미줄을 가리켰다.
“이거? 이건 데릭과 킴에게 옷을 지어줄 옷감인… 아하!”
연장자 어머니는 뭔가를 깨달았는지 거미줄 한 아름을 엘리스에게 주었다.
“잘 만들어보렴. 킴은 티셔츠를 원한단다.”
“헤헤헤.”
날 보며 배시시 웃어 보인 엘리스는 거미줄을 양팔로 꼬옥 끌어안고 사라졌다.
난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데릭의 중얼거림이 내 멘탈을 일깨웠다.
“그러고 보니 나이는 비슷하군.”
“네?!”
“킴, 넌 몇 살이니?”
연장자 어머니가 물었다.
“저 29세요.”
오해하지 마시라. 한국 나이는 서른인데, 아직 만으로는 29세다!
“역시 비슷하군. 엘리스는 올해 31세다.”
“컥!”
데릭의 말에 나는 신음했다.
‘그, 그렇구나.’
엘프의 수명은 인간의 3배였다. 겉보기는 어려 보여도 실제 나이는 외모의 3배쯤 될 것이다.
“그, 그럼, 제 거미줄을 가져간 것은…….”
“네게 옷을 지어주려는 것이지.”
“커억!”
보통 남자에게 옷을 지어주는 건 반려자의 역할인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내 옷을 엘리스가 지어준다는 것은…….
“아, 안 돼! 안 되는데!”
“안 될 게 뭐가 있나.”
“안 된다고요! 전 인간이고 이미 여자도 있고……!”
“문제 될 게 전혀 없다. 넌 우리의 가족이니까.”
“크아아아! 안 되는데!”
환청처럼 귓가에 들리는 철컹철컹 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나는 미친 듯이 생명의 나무 위로 달려 올라갔다.
***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듯이 생명의 나무를 기어오르는 김현호를 보며, 데릭이 말했다.
“우리 엘프들에게 옷을 지어주는 건 고마움의 표현인데, 오해를 한 것 같군.”
“호호호, 반려자에게 옷을 지어주는 걸로 착각했나 봐요.”
일반적으로 엘프들에게 있어 옷을 지어준다는 건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아내들이 남편에게 옷을 해주는 건 간단했다. 일반적으로 가장 고마운 존재는 삶을 함께해 준 반려자이기 때문이다.
“재미있으니 그냥 놔둡시다.”
“아이, 어쩜 제 마음을 그리도 잘 아세요?”
“부부잖소.”
“호호호.”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잉꼬부부는 오늘도 정다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