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나, 이계사냥기 113화
무료소설 아레나, 이계사냥기: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876회 작성일소설 읽기 : 아레나, 이계사냥기 113화
나는 거의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생명의 나무를 올랐다.
그럼에도 꼭대기가 안 보일 정도로 생명의 나무는 컸다.
‘정말 이렇게 자라다가 대기권 뚫고 우주까지 자라는 거 아냐?’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나는 전파송수신기를 설치했다.
붉은 스위치를 누르자 LED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2년간 구동된다고 했던가?’
전파송수신기의 동력원은 마정이었다.
다량의 마나가 함유된 마정을 쓴 덕에 2년은 너끈히 버틴다고 했다.
2년 뒤에는 새로운 마정으로 갈아 넣지 않으면 안 되지만.
가공간에서 교신기 두 개를 꺼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말을 해보았다.
“아아.”
-아아.
내 목소리가 다른 교신기에서 들렸다. 가까워서 그런지 음질이 상당히 깔끔했다.
‘일단 교신기 하나는 엘프들에게 줘야겠지.’
갈색산맥 세 마을의 최고 어른인 연장자 어머니에게 주면 되겠지 싶었다.
생명의 나무에서 내려와 곧장 연장자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들은 늘 그렇듯 생명의 나무 아래에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머, 킴. 무슨 일이니?”
나이답지 않게 고운 외모를 가진 연장자 어머니가 물었다.
“일단 이걸 받으세요.”
나는 교신기 하나를 연장자 어머니에게 건네주었다.
“어?”
“저게 뭐지?”
“신기하게 생겼네.”
호기심이 가득해진 어머니들이 벌 떼처럼 모여들었다.
내가 설명해 주었다.
“붉은 스위치를 누르면 켜집니다. 그리고 밑에 숫자키패드가 있는데…….”
나는 교신기의 사용법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연장자 어머니는 내 설명을 들으며 교신기를 사용해 보았다.
윙, 윙, 윙.
내가 가진 교신기가 진동했다. 정말 진동까지 폴더폰과 똑같군.
폴더를 열고 받았다.
“들리시죠?”
“어머나!”
교신기를 통해 내 목소리를 들은 연장자 어머니는 탄성을 터뜨렸다.
한동안 교신기 때문에 난리가 났다. 어머니들이 너도나도 교신기를 써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모든 어머니들과 교신기로 통화를 해본 뒤에야 나는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이게 있으면 제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떠날 생각이니?”
“예.”
“안 돼!”
“우리랑 같이 살아야지 어딜 간다는 거야?”
“맞아, 맞아.”
“반려를 찾으러 가는 게 아닐까?”
“그런가? 하긴, 킴도 인간의 나이로 치면 결혼 적령기가 지났으니까.”
어머니들이 왁자지껄 떠들었다.
결국 나는 혼인할 여자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좀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장자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 떠나야 한다니 붙잡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짝을 찾으면 반드시 돌아오렴.”
“예, 무슨 일이 생기시거든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좋아.
이걸로 유사시에 엘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떠난다는 소식이 퍼지자 소나무 마을과 측백나무 마을에서도 엘프들이 찾아왔다.
“킴, 당신 덕에 우리가 보금자리를 얻었습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꼭 돌아오세요.”
내게 고맙다고 연거푸 인사하면서, 그들은 말린 과일을 한가득 싸주었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갈색산맥을 떠났다.
길은 모르지만 길잡이 스킬로 오딘이 있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이 울펜부르크 백작가일 터였다.
갈색산맥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즈음이었다.
윙, 윙, 윙.
진동이 울리는 교신기.
‘응?’
나는 교신기를 받아보았다.
-킴이냐.
중후한 목소리.
바로 연장자 어머니의 남편이자 엘프 최강의 전사인 데릭이었다.
“데릭!”
-먼 곳에 나가 있느라 널 배웅하지 못했군.
“그러게요. 이렇게라도 인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래, 이건 참 신기한 물건이군.
“울펜부르크 백작가에도 교신기를 하나 둘 생각이에요. 위험한 일이 발생하면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그래, 이런 귀한 보물을 선물해 줘서 고맙다.
“별말씀을요.”
-네가 우리에게 준 은혜는 내 남은 평생을 다 바쳐도 갚지 못할 정도다. 그래서 약소하나마 한 가지 약속을 하마.
“……?”
-도움이 필요하거든 이걸로 내게 연락해라. 아무리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도 기필코 들어주겠다.
데릭의 약속에 나는 감동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시 보자. 여보, 이건 어떻게 끄는 거지?
-이리 줘 봐요.
연장자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리더니 이윽고 교신이 끊겼다.
나는 피식 웃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슬슬 속력을 내볼까?’
바람의 가호를 사용하여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람의 가호와 인공근육슈트의 근력 증폭까지 합쳐지자, 한 번 뛸 때마다 무려 20m가량을 껑충껑충 날았다.
바람의 가호가 적용되는 50분간 미친 듯이 달렸다.
바람의 가호가 끝나면 쿨타임 25분간 쉬었다가 다시 달렸다.
그렇게 무서운 속도로 오딘을 향해 질주했다.
간혹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보였지만, 귀찮아서 그냥 지나쳐버렸다.
쓸데없이 사람과 엮이기 싫었다. 라이칸스로프 때 은둔마을에서 겪은 일이 트라우마가 된 탓인지도 몰랐다.
일주일째에 접어든 날 밤, 나는 울펜부르크 백작가에 도착했다.
사방이 탁 트인 들판.
흐르는 강물을 등진 커다란 성채.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말로 중세 서양의 영주가 기거할 법한 저택이었다.
“정지!”
철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오딘님, 아니, 울펜부르크 백작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영주님을?”
병사들은 몹시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본다.
“갈색산맥에서 왔다고 하면 아실 겁니다.”
“일단 말은 전하겠소.”
한 병사가 소식을 전하러 들어갔다. 다른 병사들은 계속 의심어린 눈초리로 나를 훑었다.
기다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현호 씨!”
오딘이 뛰어나온 것이다.
날 반갑게 맞이하는 오딘의 태도에 병사들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 일대를 통치하는 군주가 직접 뛰어나와 반기니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시험은 어떠세요?”
“골치 아픈 시험을 받았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그러죠.”
오딘은 직접 내가 머무를 숙소로 안내해 주었다.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실크 커튼 등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방이었다.
“귀빈을 모시는 방이오. 이곳에서 머무르시오.”
“감사합니다.”
“옷도 필요하시겠군. 이곳에서는 그런 옷을 입고 다니면 눈에 띄오.”
“아무래도 그렇겠죠?”
“옷도 마련해 주겠소.”
오딘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들어왔다.
“재단사를 부르고 간단한 식사거리를 가져와라.”
“예, 영주님.”
시녀는 공손히 인사한 뒤에 물러났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내 시험은 갈색산맥의 엘프들을 공격한 흑마법사들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오.”
“그 흑마법사 조직 말인가요?”
“그렇소. 이리저리 사람을 풀어 조사를 시키긴 했는데 아무래도 시일이 걸릴 것 같소.”
“갈색산맥을 습격한 흑마법사의 이름은 존 오멘토였습니다.”
“존 오멘토?”
“예, 하지만 그 이름 가지고는 뭔가를 알아내기 힘들겠죠.”
“쯧, 그럴 테지.”
그런데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시겠어요?”
“여기 있소.”
오딘은 아이템 백팩을 소환해 노트와 연필을 꺼내 주었다.
“실프.”
-냐앙.
허공중에 나타난 실프가 내 어깨 위에 올라와 뺨을 비벼댔다.
나는 애교를 부리는 실프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존 오멘토 기억하니? 날 공격했던 흑마법사 말이야.”
-냥.
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실프에게 연필을 내밀었다.
“이 노트에다 그놈 얼굴을 그려볼래?”
실프는 꼬리로 연필을 스르륵 휘감았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훌쩍 뛰어내려와 노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슥슥. 슥슥.
사각거리는 소리가 마구 울려 퍼졌다. 실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스케치를 했다.
“허!”
오딘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도 놀랍다. 언제 봐도 대단한 솜씨였다.
순식간에 깡마른 중년 흑마법사 존 오멘토의 얼굴이 그려졌다.
나는 완성된 그림을 오딘에게 줬다.
“이름은 의미가 없어도 생김새를 알면 도움이 되겠죠?”
“이 그림을 복사해서 널리 유포해야겠소.”
“복사가 되나요?”
“마법이 있잖소. 비슷해 보여도 지구의 중세시대와는 다르오.”
“아.”
하인들이 간단한 식사거리를 가져왔다. 부드러운 하얀 빵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스한 스프, 그리고 포도주였다.
오딘은 그림을 하인에게 주며 마법사에게 100장 복사를 의뢰하라고 시켰다. 하인은 그림을 공손히 받아 들고 나갔다.
“귀족이라 편하시겠어요.”
그 모습을 빤히 보던 내가 말했다.
오딘은 껄껄 웃었다.
“편하지. 자잘한 일은 아랫사람을 시키면 되니까. 아, 말이 나온 김에 김현호 씨도 귀족이 되시겠소?”
“그럴 수 있나요?”
오딘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이래 봬도 이 나라에서는 명성을 떨치는 무인이자 대영주요. 준남작 정도의 작위는 수여할 수 있소.”
“준남작?”
오딘의 설명에 의하면, 준남작은 상급 귀족인 오등작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는 작위였다.
휘하에 소영주들을 거느릴 만큼 강력한 영주가 주요 가신에게 칭호인데, 지위는 높지 않아도 세습이 가능한 작위였다.
같은 준남작이라도 누가 수여했느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오딘은 아레나에서 엄청난 명성을 떨치는 터라 그가 수여한 준남작 작위는 상당한 지위라고 한다.
“당신이라면 어느 나라에서나 왕의 눈에 들어 작위를 얻을 수 있을 테지만, 그건 번거롭잖소.”
“그렇죠. 작위를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마법사에게 신분증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의뢰해야겠군.”
귀족 계층 이상은 신분 위조를 막기 위해 마법사가 특수 제작한 신분증이 필수라고 한다.
오딘은 다시 하인을 시켜서 신분증을 만들어오라고 지시했다.
저렇게 남에게 이것저것 시키니까 참 편해 보인다.
“그런데 교신기는 가져오셨소?”
“예, 전파송수신기를 느티나무 마을의 생명의 나무 위에 설치했죠. 지금 당장에라도 연장자 어머니와 연락이 가능한데, 하시겠어요?”
“좋소.”
나는 교신기 하나를 오딘에게 건네주었다.
“번호는?”
“저는 1번, 엘프들은 2번이요.”
“난 3번이군. 알겠소.”
오딘은 키패드에서 숫자 2를 누르고 통화를 시도했다.
-킴이니?
연장자 어머니의 목소리.
오딘이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울펜부르크 백작 오딘입니다. 킴은 1번이지요.”
-아,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군요.
설명을 충분히 해줬는데 헷갈렸던 모양이군.
-아무튼 반가워요. 이렇게 연락할 수 있어서 좋군요.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도요. 그런데 킴도 거기에 있나요?
“예, 옆에 함께 있습니다.”
오딘이 교신기를 바꿔주었다. 나는 연장자 어머니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서 통화를 끊었다.
오딘은 교신기를 보며 웃었다.
“이곳에서 전화를 쓸 수 있다니 정말 편하구려.”
“그러게요.”
나도 따라 웃었다.
차지혜가 이곳 울펜부르크 백작가를 찾아온다면 그녀와도 아레나에서 통화를 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전파가 닿는 범위 내에서지만, 송수신기 하나가 무려 반경 1850㎞를 커버하니 문제없었다.
“그런데 김현호 씨는 어떤 시험을 받았소?”
“저도 좀 골치 아픈 시험을 받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