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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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4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53화
253화
혁무천은 목량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떻게, 막을 방법은 없을까요?”
은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힘 있는 사람만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다. 힘없는 사람들 역시 더욱 더 어려워진다.
그 사실을 알기에 가슴이 답답했다.
“우리가 천하를 구할 수는 없다.”
“저도 알아요.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는 마라.”
“고마워요, 오빠. 오빠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요.”
“말했다시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최소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뭔가 은설에게 넘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도 힘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아버지와 가족들이 정파의 고수들에게 죽은 것도 힘이 없었기 때문 아닌가.
“대형, 내향에 계속 계실 겁니까?”
목량이 물었다.
혁무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단 금룡장으로 간다. 그곳을 정리해놓고 무원장으로 돌아가자.”
율이명은 비룡단과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공진은 양해를 구했다. 본래는 일 년간 도와주기로 했다. 하지만 사도맹의 상황을 보고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혁무천도 쾌히 승낙했다.
어차피 그의 성격상 오래지 않아서 돌아올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틀 후.
금룡장에 도착하자, 전금환이 미소를 지으며 혁무천을 반겼다.
“어서 오게. 잘 다녀왔는가?”
속으로야 욕이 한 사발 나왔지만.
‘젠장! 왜 이리 돌아와? 여기가 너희들 집이야?’
혁무천은 전금환의 마음을 눈치 채고도 모른 척했다.
마도연합이 서협에서 물러서기 전까지는 금룡장을 이용해야만 했다.
대놓고 투덜거리지만 않는다면, 속으로 하는 말쯤은 참을 수 있었다.
물론 약간의 협박은 해놓아야겠지만.
“당분간 금룡장의 창고와 인원을 사용할 생각인데, 저희 비룡장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다른 곳으로 옮기지요.”
“뭐, 마음에 안 든다는 게 아니라…….”
“장주께 드릴 한 달 비용이면 외곽에 괜찮은 장원 하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창고도 좀 짓고…….”
그건 절대 안 될 말이다.
비룡장에서 한 달에 들어오는 돈이 얼만데!
새로운 거점을 만들기라도 하면 그 돈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전금환은 곧바로 사업용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나야 비룡장과 좋은 관계가 계속되길 원하지. 내가 왜 비룡장을 싫어하겠나?”
“하하하, 장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욕심을 접지요.”
“아암, 그래야지. 구룡상단의 형제들끼리 욕심을 부리면 되겠나?”
“사실 창고 비용도 좀 비싼 감이 있고 해서 외부에 지으려고 했는데…….”
“창고사용료를 이 할 깎아주겠네.”
“역시 구룡상단의 형제다우십니다. 생각보다 조금 적긴 하지만, 금룡장도 이익이 되어야 서로 좋겠지요.”
“허허허…….”
전금환은 웃으면서도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주판알을 튕겼다.
‘제기랄, 한 달에 은자 백 냥이나 손해군.’
새파랗게 젊은 놈이 능구렁이 몇 마리는 삶아먹은 듯했다.
얼렁뚱땅 몇 마디 말로 은자 백 냥을 깎다니.
혁무천도 계산을 끝마쳤다.
‘올해 말까지 남은 물건을 정리하면 은자 오십만 냥은 남길 수 있겠군.’
***
그날 밤.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혁무천의 방에 찾아왔다.
“무슨 짓이지?”
“더는 이렇게 지낼 수 없어요.”
자화미는 혁무천의 앞에 서서 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붙잡은 적도 없는 것으로 아는데? 아니, 오히려 함께 있는 걸 싫다고 했지.”
“알아요.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려는 거예요.”
“무슨 결론을 내리겠다는 거냐?”
“그야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결론이죠.”
자화미는 그렇게 말하고 머리띠를 풀었다.
긴 머리가 풀어지며 허리까지 내려왔다.
“날 가져요.”
“뭐?”
생각지도 못한 말에 혁무천의 눈이 커졌다.
그 순간, 자화미가 가슴 옷자락을 잡아챘다.
상체가 순식간에 벗겨져 나가며 그녀의 상체가 드러났다.
속에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던 듯 상의가 벗겨지자 바로 옥처럼 하얀 살이 드러난 것이다.
“무슨 짓이냐?”
벌떡 일어난 혁무천이 돌아섰다.
스르륵.
뒤에서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봐요. 예쁘지 않아요?”
“돌아가라. 네가 가지 않겠다면 내가 나가마.”
“무슨 남자가 그래요?”
“…….”
“여자가 옷을 벗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욕심도 안 나요?”
“난 너를 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차갑게 말한 혁무천이 한쪽 창문을 향해 말했다.
“자경산. 동생을 데리고 가라.”
창문 밖에서 씁쓸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오. 나는 동생을 막을 수가 없소.”
그때였다.
푹.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흠칫한 혁무천은 홱 고개를 돌렸다.
옷을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나신으로 서 있는 자화미가 보였다. 세상 그 어느 꽃보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긴 머리카락이 교묘하게 한쪽 가슴과 아래를 가려서 더욱 매혹적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가슴에 단검이 꽂혀 있었다. 단검이 꽂힌 곳에서 피가 흘러내리며 나신을 붉게 적셨다.
“너……!”
자화미의 나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깊이 박히진 않은 듯했다. 하지만 힘을 조금만 더 줘도 심장이 뚫릴 듯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혁무천은 최대한 자화미의 눈만 바라보려고 하면서 손을 저었다.
자화미의 가슴에 꽂혔던 단검이 쑥 빠져나오더니 한쪽으로 날아가서 천장에 꽂혔다.
동시에 지풍이 상처 부위 근처 세 군데 혈을 두들겼다.
바닥까지 내려와 있던 옷자락이 거슬러 올라가서 그녀의 몸을 덮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화미가 손을 움찔했을 때는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제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죽더라도 당신을 원망할 생각은 없어요.”
“그런다고 내 마음이 바뀔 줄 아느냐?”
“그렇게 제가 미워요?”
자화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나는 너를 미워한 적 없다. 네 행동이, 말이 싫었던 것일 뿐.”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았어요. 살기 위해서. 행여나 들킬까봐. 들키면 죽을지 모르니까.”
혁무천도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화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당신한테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그냥 옆에만 있게 해줘요.”
“내가 무슨 구경거린 줄 아냐?”
“몰랐어요?”
“뭘?”
“당신, 여자들한테는 구경거리예요.”
“…….”
“물론 천화광 같은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시끄러. 자경산! 진짜 안 데리고 갈 거냐?”
혁무천이 창 쪽을 향해 말했지만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창 밖에 있을 텐데도.
혁무천은 한시라도 빨리 자화미를 내보내기 위해서 짐짓 싸늘하게 말했다.
“비룡장에 있든 무원장에 있든, 쫓아내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 이상을 바라진 마라.”
자화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봐. 가서 빨리 상처나 치료해.”
혁무천은 그녀를 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고 손만 저었다. 그런데 괜히 말했나 보다.
“어머, 지금 저 생각해 주신 거예요?”
“생각해 주긴 누굴 생각해 줘?”
“근데…….”
“또 뭐?”
“정말 저 안 예뻤어요?”
“이게 정말……!”
“아…….”
옷을 여미던 자화미가 상처 난 가슴을 부여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혁무천도 차마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게 큰소리를 치지 못했다.
“흥! 그러게 누가 그런 짓을 하라더냐?”
“다음에는 좀 더 날카로운 칼을 사용해야 할까 봐요.”
혁무천은 자화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무래도 단단히 혼을 내야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할 듯싶었다.
그런데 자화미가 교묘한 시간 차이로 몸을 돌렸다.
“갈게요.”
그때 혁무천의 시선이 방문으로 향했다.
“오빠, 들어가도 돼요?”
은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어? 어, 들어와.”
불안했지만 할 수 없이 들어오라고 했다.
곧 문이 열리고 은설이 들어왔다.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은설이 자화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언니 계셨어요?”
밖에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화미가 엉뚱한 짓을 한 순간부터 혁무천이 진기로 소리를 차단했던 것이다.
“무 공자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 이제 가보려고.”
“아, 예…….”
눈치 빠른 은설은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자화미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전에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방 안에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잠깐만요!”
바닥을 보고 소리친 은설이 눈을 번쩍 들었다.
“오빠, 저 피, 뭐예요?”
그녀는 바닥의 핏방울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직도 마르지 않은 피여서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혁무천은 당황해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응? 그게…….”
“설마…… 코피 난 거예요?”
코피?
“아니면…… 혹시 언니를 때린 거 아니에요?”
“내가 왜……?”
“언니, 잠깐 나 좀 봐요.”
당황한 것은 자화미도 마찬가지였다.
코피라는 말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가, 때렸냐는 말에는 고소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냉랭하게 보자는 말을 하니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때 자화미를 유심히 보던 은설이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울었죠. 그죠?”
“아, 그게 말이야…….”
은설이 자화미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고개를 홱 돌려서 혁무천을 째려보았다.
“때렸네, 때렸어. 그죠?”
“무, 무슨 말이야? 내가 왜 저 애를 때려?”
“오빠가 때리지도 않았는데 왜 울어요? 거기다 머리나 옷도 수상하고.”
“그건…….”
사실대로 다 밝힐 수도 없고…….
“흥, 오빠가 여자나 때리는 사람인 줄 몰랐네요.”
“아니라니까?”
은설이 혁무천을 다그치는 사이, 자화미는 슬그머니 방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재빨리 방을 나섰다.
“나 먼저 가볼게.”
혁무천이 혼나든 말든 당장은 자리를 피하는 게 나았다.
그 와중에도 방 안에서는 은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말 안 해줄 거예요?”
자화미는 오랜만에 속이 다 시원했다. 나중에 은설에게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당장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흥! 그러게 누가 나를 무시하래?’
한편, 방 안에 있는 은설은 눈을 치켜뜨고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혁무천의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 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뭐든 솔직히 말하면 봐줄 게요. 진짜예요. 대신 거짓말하면…… 제가 떠나버릴 거예요. 전 거짓말하는 사람이 진짜 싫거든요.”
혁무천은 숨을 깊이 들이쉰 뒤 입을 열었다.
“진짜지?”
“그래요.”
“내 말, 믿어줄 거지?”
“제가 오빠 말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겠어요?”
“좋아, 그럼 사실대로 말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