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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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2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44화
244화
미시(未時:오후1시~3시) 무렵.
금룡장에 손님이 찾아왔다. 삼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 사내 둘이었다.
삼십 대로 보이는 자는 짙은 감청색 장포를 입었는데, 날카로운 눈매와 뾰족한 턱이 그의 성격이 까다롭다는 것을 짐작케 해주었다.
반면 갈의를 입은 사십 대인 중년인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눈 깊숙한 곳에 서리처럼 차가운 기운이 잠들어 있어서 외모와 성격이 같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전금환은 금룡장의 고수들을 대동하고 그들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리고 손님의 질문에 상세히 대답해주었다.
혁무천이 말해준 대로.
“그들은 오늘 아침에 떠났소. 칠리평 쪽으로 간다고 했던 거 같던데.”
이들은 떠나면 그만인 사람들이고, 혁무천은 언제든 돌아올 사람이었다.
그것도 다음 달에 온다고 했다. 다음 달이라고 해봐야 이제 열흘도 남지 않았다.
더구나 거짓말도 아니기 때문에 조금도 부담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천기회의 삼대령주 중 한 사람인 웅패령주 적상천은 전금환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정말이오?”
적상천이 전금환의 두 눈을 직시한 채 물었다.
전금환은 태연한 신색으로 대답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하루 이틀이면 밝혀질 일인데.”
그의 말과 태도에서 아무 이상을 찾지 못한 적상천은 함께 온 옥귀정을 돌아다보았다.
옥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전금환의 말에서 수상함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오면서 수집한 정보와도 어느 정도 일치했다.
적상천은 떠나기 전에 전금환을 노려보았다.
“만약 우리를 속인 것이 밝혀지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요.”
그 말에 옆이 서있던 금룡대주 기목승이 눈을 치켜떴다.
“말이 심하오. 장주께서 천기회와 천화상단의 체면을 봐주어 예의를 다해 대답해주었다는 걸 모른단 말이오?”
금룡장의 다른 간부들도 눈에 힘을 주고 적상천과 옥귀정을 노려보았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급박하게 긴장되었다.
적상천이 눈을 치켜뜨고 코웃음 쳤다.
“흥! 회주님의 아들이자 본 회의 영검령주를 살해한 자들을 머물게 한 것만으로도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걸 모르오?”
그 말에 전금환의 표정마저 굳어졌다.
그가 비록 무공이 강한 고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가 약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금룡장을 삼십 년 동안 이끌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 금룡장은 천기회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소. 하지만 죄도 없는데 계속 몰아붙인다면 살기 위해서라도 싸울 거요.”
“잘못한 걸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요?”
“그 일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다면, 표행을 공격한 잘못부터 따져야 하지 않겠소?”
“뭐요?”
“우리는 상거래를 위해서 장소만 빌려주었을 뿐이오. 그걸 문제 삼는다면 천하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소?”
적상천이 발끈하려 하자, 옥귀정이 손을 들어 말렸다.
“아아, 적 령주. 참으시게.”
그러고는 전금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장주의 말씀은 잘 알았소이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두셔야 할 거요.”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서는 단 한 점의 웃음기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서늘해진 전금환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역시 자식 가진 부모로서 그 마음을 이해하오. 그래서 사실대로 말해준 것이오.”
옥귀정은 차가운 시선으로 전금환을 바라본 뒤 몸을 돌렸다.
“그만 가세.”
적상천도 전금환을 노려본 뒤 입을 꾹 닫고 돌아섰다.
전금환은 전각을 나서는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그들이 밖으로 사라지자, 콧등을 씰룩였다.
‘건방진 놈들이 어디서 협박질이야?’
과연 천기회, 천화상단이란 말이 나올 만큼 대단한 놈들이었다.
하지만 혁무천에게 단련된 그를 흔들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무천에 비하면 발바닥밖에 안 되는 놈들이 어디서…….’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낸 전금환은 명령을 내렸다.
“무천에게 놈들이 왔다 갔다는 걸 알려라.”
기목승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천이 다른 건 몰라도 계산 하나는 확실하게 하더군. 빚을 하나 얹어놓아서 나쁠 것 없어.”
***
여행자들의 기분을 한껏 들뜨게 하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오후.
복우산에서는 격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마도연합이 정파에서 펼쳐 놓은 팔문금쇄진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반경이 무려 이십 리나 되는 거대한 진세였다.
들어선 자들은 자신들이 진세 안에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가장 먼저 진세 안으로 들어간 혈왕동 무사들이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진세에 발을 디딘 지 한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먼저 옅은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릿했다.
그렇다고 해서 앞을 못 볼 정도는 아니었고, 고수들은 그 정도 시야 방해에 크게 영향 받지 않았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려면 정파 놈들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와서 공격을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추적을 하려고 하면 또 다른 기습을 받고, 그 기습을 해결하고 나서 돌아보면 처음 공격받았던 곳에서 기껏해야 몇 십 장 정도 전진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한 과정이 서너 번 반복되다 보니 눈치 빠른 사람 몇몇이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했다.
얼마 전진하지도 못했는데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적에게 큰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분명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혈왕 능전평을 비롯한 수뇌부는 치고 빠지는 정파의 기습에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 있었다.
처음에만 해도 함정인가 했지만, 딱히 함정처럼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정파 놈들을 나타나는 대로 모조리 죽이면서 전진하라!”
“물러서지 말고 놈들을 밀어붙여!”
능전평은 이를 갈며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
선봉에 선 혈왕동 무사들도 전진을 망설이지 않았다.
기습하는 놈들에게 당해서 죽어간 놈이 멍청할 뿐이었다. 자신들은 정파의 무사들보다 강했다. 시간이 흐르면 이 싸움은 이길 수밖에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한 시진…….
죽거나 부상당한 무사들의 숫자가 삼 할을 넘어가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그들이 전진한 거리는 채 오 리도 되지 않았다.
정파 놈들은 도대체 어디로 숨는지 여전히 기습한 후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쯤에서야 진세에 조금이나마 지식이 있는 자가 경악해서 외쳤다.
“맙소사! 주군! 팔문금쇄진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팔문금쇄진의 마지막 경계선을 넘어간 후였다.
혈왕 능전평이 이끄는 선봉뿐만이 아니었다.
그들과 별 시간 차이 없이 팔문금쇄진 안으로 들어간 나머지 칠로(七路)의 마도연합 무사들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뒤로 물러나려 해도 후퇴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길이 보이긴 하는데 자꾸만 맴돌았다.
그리고 또 기습을 받고, 물리치고, 물러서고, 또 기습을 받고…….
몇 번 반복한 후에야 결국은 후퇴하는 것조차 미루고 상황파악에 들어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들이 무식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진세에 들어왔다는 걸.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정파 놈들 역시 피해가 커서 그런지 전격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령을 보내서 다른 곳의 상황을 알아봐라!”
천양묵이 명령을 내리고는, 옅은 안개가 낀 전면을 노려보았다.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조심했거늘 또 정파 놈들의 술수에 말려들다니.
“팔문금쇄진입니다, 주군.”
옆에 서 있던 사야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문금쇄진?”
“예. 이 일대 계곡 전체에 펼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천화광이 그 말을 듣고 이마를 좁혔다.
“그럼 도대체 얼마나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다는 거요?”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선, 반경 이십 리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천화광의 눈이 커졌다.
“반경 이십 리? 그 넓은 지역에 진이 펼쳐져 있다는 거요?”
천화광뿐만이 아니었다. 천양묵과 다른 만마성의 간부들도 일제히 사야를 보며 답을 기다렸다.
“그렇습니다, 소성주.”
“하지만 그렇게 큰 위협은 되지 않던데…….”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이 있어요. 지금까지 겪은 일이 하루 종일 이어진다면 피해가 얼마나 될 것 같나요?”
“그야…….”
이마를 좁히고 계산을 해보던 천화광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아마 하루 종일 지금과 같은 피해가 이어진다면, 이곳에 있는 인원은 잘해야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놈들이 펼친 진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천양묵이 사야에게 물었다.
그의 표정도 만근 바위를 어깨에 진 사람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일단은 전진을 멈추고 이곳에서 상황을 파악하며 적의 빈틈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문제는 적의 빈틈을 찾아낼 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식량도 다 떨어져서 하루만 지나도 기력이 쇠할 겁니다.”
“으음……”
천양묵의 입에서 절로 침음이 흘러나왔다.
자신들이 언제 식량 걱정하면서 싸웠던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사람을 벤 이후 삼십 년이 다 되어감에도.
“이 진세를 벗어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운이 좋으면 오늘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물론 큰 변수가 생긴다면 또 달라지겠지만요.”
“결국은 얼마나 빨리 진세를 벗어냐느냐, 하는 것에 승패가 달린 셈이군.”
“예, 주군.”
***
유시 초, 혁무천 일행은 내향을 삼십 리쯤 남겨둔 곳에서 풍마문 사람을 만났다.
그자는 복우산 쪽에서 오던 길이라고 했다.
혁무천은 그자에게 두어 가지 중요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는 표행에 대한 것이었다.
“앞서 간 표행이 지금쯤 내향에 들어가고 있을 겁니다.”
예상했던 시간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소식이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마도연합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마치 고립된 지역에 갇힌 것처럼 움직임이 더딥니다. 전서구만으로는 모든 소식을 전할 수 없어서 직접 보고하려고 가던 중입니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얼마 전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팔로로 진입했던 마도연합이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전진만 못하는 게 아니라, 후퇴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마도연합이 정은맹의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혁무천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지도를 보고 콕 짚어냈던 은설의 지적과 목량의 추측이 옳았다.
정은맹과 정파는 드넓은 복우산에 거대한 팔문금쇄진을 펼쳐 놓았다.
마도연합은 귀신도 가둘 수 있다는 그 진세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중이고.
“도대체 어떤 자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만나면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군.”
혁무천의 담담한 말투에서 감탄의 심정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십면매복진으로 충격을 안겨주더니, 이제는 팔문금쇄진으로 마도연합을 곤경에 빠뜨렸지 않은가 말이다.
더구나 그들이 진세를 펼친 공간이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복우산의 그 넒은 곳을 이용해서 진세를 펼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식량 때문에라도 마도연합은 결국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할 겁니다. 엄청난 피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뚫고 들어갈 것이냐, 아니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든 진세를 빠져나오느냐.”
목량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느 쪽이든 마도연합은 수천 명의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이들의 절규와 비명이 귓전에서 울리는 듯했다.
“만약 식량이 공급된다면?”
혁무천이 툭 던지듯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