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2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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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6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216화
216화
마룡성에 있던 혁무천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전서를 받아 읽었다. 풍마문과 개방에서 보낸 전서였다.
그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태연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혁무천의 방에 모인 사람들 모두 무거운 표정이었다.
“이거 싸움 규모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은데?”
송비가 고개를 내두르며 말하자, 동대안이 반문했다.
“이러다 진짜 전쟁이 벌어지는 거 아닙니까?”
혁무천이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미 전쟁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디까지 굴러가느냐, 얼마나 커지느냐 하는 것만 남았지요.”
조용히 앉아서 듣고만 있던 홍택이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당장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은 남양의 상인들이 대줄 거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물량들이 점점 줄어들어서 구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나는 그때를 대비해서 무원장으로 돌아가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상황을 주시할 거요.”
“남양 쪽에 가볼 건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 했는데, 호랑이가 그곳에 있다면 못 갈 것도 없지요.”
“너무 위험하네.”
“위험이 담보되었을 때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정체불명의 복면인들. 그들을 직접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대신 손해를 볼 확률도 커지네.”
홍택의 걱정스런 말에 혁무천이 이를 드러내며 빙그레 웃었다.
“너무 걱정 마시오. 손해 볼 짓은 하지 않을 거니까요.”
“…….”
홍택은 그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혁무천이 웃으니 남자인 그조차 가슴이 뛰어서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후우, 하늘은 너무 불공평해.’
하물며 사공미미는 어떻겠는가.
“침 떨어진다.”
혁무천이 째려보며 하는 말에 사공미미는 재빨리 소매로 입술을 닦았다.
‘쳇, 꼭 그걸 말로 해야만 하나? 슬쩍 알려주기만 해도 알 텐데.’
그래도 어쨌든 혁무천의 웃는 모습을 정면에서 봤다는 것에 만족했다.
‘한번 여장을 시켜보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그녀는 여장을 한 혁무천을 상상하고 큭큭대며 웃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게 생각하든 말든.
그때 한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룡성의 순찰당주 임호라는 자였는데,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성주, 사도맹 분들이 오셨습니다.”
홍택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는 다급히 물었다.
“그래? 지금 어디 계시느냐?”
“영빈각의 삼관으로 모시라 했습니다.”
사공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를 찾아왔나 봅니다.”
사도맹에서 온 손님은 모두 열두 명이었다.
장로인 추혼신마 영고와 면산일마 규화동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장은 그들이 아닌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었다.
짙은 눈썹에 알맞게 자란 흑염, 날카롭게 뻗은 깊은 눈, 갸름한 얼굴.
가히 꽃중년이라 불러도 될 만큼 잘생긴 자였다.
그런데 영빈각으로 간 사공곽과 사공미미가 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도맹의 이인자이자, 두 사람의 숙부인 광마룡(狂魔龍) 사공진.
무위로는 맹주인 사공헌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 그가 직접 온 것이다.
두 사람도 설마 그가 왔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숙부님께서 어떻게……?”
“미미가 숙부님을 뵈어요.”
사공진은 차가운 표정으로 사공곽을 바라보았다.
“지금이 어떤 때인 줄 잘 알 거다. 그런데 후계자인 네가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으면 형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느냐?”
“죄송합니다, 숙부님.”
“듣자 하니 무천이란 자 때문이라 하던데, 그자의 뭐가 그리 대단해서 네가 이리 행동하는지 알아봐야겠다.”
사공곽은 규화동을 돌아다보았다.
규화동이 슬쩍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피한다. 아마도 그가 말한 듯했다.
사공곽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무 형 때문에 남은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덕분에 많은 걸 배웠지요.”
“훗, 기껏해야 이십 대 젊은 놈이라 하던데, 사도맹의 후계자인 네가 그런 놈에게 뭐 배울 게 있다고 빨빨거리며 쫓아다닌단 말이냐?”
사공곽은 한마디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제멋대로 세상 돌아다닌 걸 따지자면 숙부인 사공진도 자신 못지않았다.
얼마나 많이 말썽을 피워서 조부와 조모의 속을 썩였는지,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숙부가 벌인 일은 사도맹의 전설로 남아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정말로 착실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 말을 해봐야 숙부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대신 사공미미가 말했다.
“솔직히 숙부님도 젊을 때는 말썽을 많이 피우셨잖아요.”
“뭐?”
사공진이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그 이상 화를 내지는 않았다. 화를 내기는커녕 변명하기에 바빴다.
“내가 언제? 미미 네가 어디서 헛소리를 들은 모양인데, 절대 남 말 믿지 마라.”
천하에 두려울 것 없는, 맹주인 사공헌에게도 검을 들이대며 대드는 그가 세상에서 딱 세 사람에게는 꼼짝을 못했다.
사공미미와 부인. 그리고 이제 열여섯 살이 된 딸.
“나는 그저 여행을 다니면서 세상을 배우려 노력했을 뿐이야.”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많이 팼다면서요?”
“팬 게 아니라, 교육을 시킨 거지.”
“이상하네, 제가 듣기로는 그게 아니던데.”
“아아, 어디서 이상한 말을 들었나본데, 그건 이 숙부를 음해하려고 누가 퍼뜨린 말이니라.”
“그럼 아버지가 숙부를 음해하려 했나 보죠? 저는 그 말을 아버지에게 들었는데.”
“그게 아니라…….”
사공진이 진땀을 흘리며 변명하다가 갑자기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아무래도 무천이란 놈이 너희들에게 못된 것을 가르친 모양이구나. 이 숙부가 그놈을 만나서 단단히 혼을 내줘야겠다.”
“안 될 텐데요?”
“안 되긴! 그런 놈은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다.”
“그게 아니라, 숙부님이 안 된다고요.”
“글쎄, 안 될 것 없다니…….”
짐짓 목에 힘을 주고 냉랭하게 말하던 사공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냐?”
“숙부님이 이길 수 없다고요, 무 공자님을.”
사공진은 사공미미의 아름다운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사공미미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홀렸군.”
“맞아요.”
“그놈, 어디 있지? 아무래도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다. 감히 내 조카를 홀리다니!”
“제가 홀린 것도 맞고, 숙부님이 무 공자님을 이길 수 없는 것도 맞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사공진이 버럭 소리치고는 사공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공에 대해서라면 아무래도 사공미미보다 사공곽의 눈이 더 정확했다.
그런데 고민하는 표정이던 사공곽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숙부님의 실력을 믿긴 합니다만, 저도 내기를 한다면 미미의 말에 돈을 걸겠습니다.”
“……!”
그래도 숙부의 체면을 생각해서 한마디 덧붙였다.
“밀리지는 않겠지만, 이기는 것도 힘들 겁니다.”
하지만 사공진에게는 이 말이나 저 말이나 차이가 없었다.
그의 잇새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놈을 만나야겠다. 만나서 그놈의 얼굴을 땅바닥에 짓이겨 놓으면, 너희들도 너희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을 거다. 앞장서라.”
“숙부님…….”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내가 이곳을 뒤집어 놓으면 놈도 나타나겠지.”
사공곽은 슬쩍 눈을 돌려서 사공미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힘으로는 숙부를 막을 수 없지만, 여동생이라면 가능했다.
그런데 사공미미는 눈을 피하며 딴청만 피웠다.
‘미미가 왜……?’
곤혹스런 표정이던 사공곽은 뒤늦게 그 이유를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과 여동생이 사공진에게 끌려가지 않고 강호에 남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사공진의 기를 꺾는 것.
“후우, 알겠습니다, 숙부님.”
***
혁무천은 사공곽이 데려온 사공진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 형, 제 숙부님이신…….”
사공곽이 소개를 시키기도 전에 사공진이 말했다.
“나는 사공진이라 한다. 네가 무천이란 아이냐?”
혁무천은 쏘아붙이듯 말하는 사공진의 말투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어쨌든 친구로 지내기로 한 사공곽의 숙부 아닌가 말이다.
“그렇습니다. 제가 무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지나가지도 않았다.
“그런데 저에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습니까?”
사실 사공진도 무천에게 불만은 없었다. 그저 진실을 알려주고 싶은 것뿐.
“네가 미미를 홀렸다고 들었다.”
“제가 미미를 홀려요? 그 애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 애를 홀릴 이유가 없습니다.”
“흥! 왜 홀릴 이유가 없어? 어떻게든 미미를 얻어 보려고 홀린 것 아니냐?”
“제가 왜 미미처럼 철없는 아이를 욕심냅니까? 설아 하나만으로도 충분한데.”
사공진은 속이 울컥 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자신에게 대들 듯 말하다니!
하지만 그보다는 사공미미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가 더 마음에 안 들었다.
“네깐 놈이 감히 미미를 무시하다니, 참으로 건방진 놈이구나!”
사공진이 으르렁대며 몰아붙였다.
그런다고 고분고분할 무천도 아니었다.
“나이 좀 드신 것 같은데, 입은 아직도 파릇파릇한 청춘이시군.”
“뭐라?”
“제가 사는 곳에 말 더럽게 안 듣고 말썽만 피우는 어린놈이 하나 있었지요. 그놈이 하는 말투와 귀하가 하는 말투가 비슷해서 한 말입니다.”
“…….”
사공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했다.
말 더럽게 안 듣고 말썽만 피우는 놈.
꼭 자신을 알고 하는 말 같았다.
그러나 곧 혁무천의 말이 뜻하는 의미를 깨닫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어린 놈. 그놈.
자신을 빗대서 한 말이 분명했다.
“지금 나를 놀리겠다는 거냐?”
“상대에게 무례를 범한 건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기분 나쁜 말 한 것만 생각하시는군요.”
“이……!”
눈을 치켜 뜬 사공진의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공력을 끌어올린 듯했다.
하지만 혁무천은 신경 쓰지 않고 사공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사공곽은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자신이 끼어들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은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게 나을 듯했다.
그때 사공진이 말했다.
“이놈! 나와 내기를 하자!”
“내기요?”
혁무천의 시선이 다시 사공진에게로 향했다.
사공곽이 아차 하며 말리려 했지만, 사공진의 말이 한발 빨랐다.
“네가 내 공격을 십 초식만 막아내면, 내가 함부로 말한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마. 하지만 네가 지면, 내 발 밑에 무릎을 꿇고 세 번 외쳐라! 앞으로 사공진 님의 그림자도 하늘처럼 모시겠습니다! 라고.”
혁무천은 그 말에 화가 날 법한데도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저야 패하면 해야 하는 행동에 비해서 제가 이겼을 경우에 대한 대가가 너무 작군요.”
“그럼 뭘 원하느냐?”
“저도 세 번을 외쳐야 하니, 귀하도 제 부탁을 세 가지만 들어주시지요.”
사공진은 이마를 찌푸렸다.
세 번의 약속을 들어준다는 건 무척 위험한 대가였다.
무천이란 놈이 무슨 부탁을 할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이 먼저 내기와 조건을 제안했으니 무작정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혁무천이 한마디 덧붙였다.
“물론 들어드릴 수 있는 것만 부탁하지요. 들어드릴 수 없는 부탁은 들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패하지도 않을 테니, 사실 상대의 조건은 처음부터 무의미했다.
“좋다! 네 제안을…….”
“안 됩니다, 숙부님!”
사공곽이 화들짝 놀라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