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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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4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71화
171화
혁무천은 욕설에 가까운 비아냥거림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뒤에 서 있던 일행들도 태연히 듣기만 했다.
그 정도의 반응은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 칼을 들이대는 대신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해도 괜찮은 흐름이었다.
돌아가는 판을 보아하니 곧 터질 것 같긴 하지만.
물론 이곳에 올 때부터 작정하고 있었기에 상대가 칼을 뽑는다 한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수룡방은 구룡상단의 율법에 따를 의향이 없으신가 보군요.”
“율법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고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네. 그건 그렇고, 그걸 묻기 위해서 이 먼 곳까지 온 건 아닌 것 같네만?”
“물론 아니지요.”
“그럼 말해보게. 나도 바빠서 자네하고 길게 말할 시간이 없군.”
“그러지요.”
<만에 하나, 어떤 일이 벌어져서 천룡방이 무너질 경우, 천룡방의 상권을 공과에 따라 공정하게 나눌 생각입니다.>
갑자기 던져진 폭탄 같은 전음에 남교청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고, ‘뭐 저런 미친놈이 있어?’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방주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혁무천의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천룡방을 무너뜨리고 나누어 먹자!
얼굴을 씰룩인 남교청이 대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내가 지금 이 아까운 시간에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수룡방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대화를 하고 있지요.”
뒤에 서 있던 일행들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대형이 언제부터 저렇게 능구렁이처럼 말했지? 그런 표정들.
하긴 혁무천조차도 자신이 이렇게 능구렁이처럼 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상가의 물을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하지만 남교청은 감탄하기보다 속이 끓었다. 아마 혁무천이 사자의 자격으로 온 것이 아니라면 당장 목을 쳤을 것이다.
“백리궁이 헛된 욕심을 부리고 있군.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하긴 주판알이나 굴리던 상인 나부랭이가 뭘 알겠냐마는…….”
“싫으신가 보군요.”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지.”
남교청이 냉랭히 말했다.
하지만 혁무천은 조금 전 남교청의 동공이 찰나 간 흔들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흔들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이 처음과 같지 않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뛰어난 상인이라면 정보와 상황판단이 빨라야 한다고 들었는데, 아쉬운 판단이군요.”
“충고 하나 하지. 비룡장이 최근 컸다고 들었지만, 아직은 천룡방의 상대가 아니네.”
“그거야 한 달 전 이야기지요.”
“그리고 우린 적이라 생각한 자들을 상대할 때는 무척 냉정하다네.”
“그나마 마음에 드는 말이군요.”
“과연 그럴까? 자네 입장에선 좋아할 말이 아닐 텐데?”
남교청의 그 말과 동시에 좌우의 수룡방 간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혁무천 일행은 모두 여덟.
수룡방 간부들은 남교청을 비롯해서 열셋.
게다가 수룡방 간부들은 모두 절정고수들이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몸이라도 보전할 수 있을 거네.”
“지금의 상황을 수룡방의 뜻이라 생각해도 되겠지요?”
혁무천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와 달리 표정은 무심했다.
남교청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렇다면…… 피를 봐도 서운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군.”
“음?”
“미리 말해두는데, 나중에 기회를 한번 줄 거요. 그때가 마지막 기회니 잘 생각해서 대답하시오.”
남교청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스산함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지?”
“귀하가 수룡방의 주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란 말이오.”
“뭐라? 푸하하하! 정말 듣던 대로 오만한 친구군.”
대소를 터트린 남교청이 두 눈에서 분노의 불길을 쏟아냈다.
수왕전 안의 수룡방 간부들도 분노에 찬 눈빛으로 혁무천 일행을 노려보며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일촉즉발의 순간.
혁무천의 입에서는 여전히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천룡방이 왜 지금 같은 상황이 되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봤어야 했어.”
“흣! 그래?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 이놈!”
남교청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룡방 간부들이 무기를 빼들었다.
그때 간부 중 하나가 혁무천을 향해 훌쩍 몸을 날렸다.
“이노오옴!”
맨 처음 노성을 내질렀던 자였다.
수룡방 장로인 탈명마조 모양귀였다.
혁무천을 향해 몸을 날린 그는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그의 탈명조법은 철판도 찢어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한번 걸리면 사람의 살을 찢고 뼈까지 부러뜨렸다.
혁무천은 그런 모양귀의 탈명조를 향해서 마주 손을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모양귀의 입가에 살소가 걸렸다.
탈명조의 무서움을 모르는 어리석은 놈!
손가락을 부숴버리리라!
와지직!
두 사람의 손이 뒤엉키면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무심한 혁무천의 얼굴, 와락 일그러진 모양귀의 표정.
“크억!”
끝내 모양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혁무천은 모양귀의 가슴에 좌수를 내쳤다.
퍽!
모양귀가 뒤로 훌훌 날아가서 나뒹굴었다.
그걸 본 수룡방 간부 두어 명이 무기를 휘두르며 몸을 날렸다.
살을 에는 기운이 혁무천 일행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갔다.
성큼, 한 걸음 내딛은 장대산이 먼저 봉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수룡방 간부들은 그를 덩치 크고 힘만 센 곰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봉에서 휘몰아친 기운에는 절정고수의 강맹한 기세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콰과광! 떠덩!
부딪치는 것은 무엇이든 날려버렸다. 사람도 무기도 버텨내지 못했다.
그에 비해 쌍도끼를 들고 튀어나간 철호의 공격은 어디로 튈지 몰라서 더 위협적이었다.
쩌적! 따당!
“크억!”
“막아! 헉!”
“죽이진 마라.”
혁무천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네 사람이나 쓰러진 후였다.
슈슈슉!
“찍힌 사람은 뒤로 물러서! 두 번째는 진짜 꽂을 거야!”
동대안이 섬혼을 뻗으며 소리쳤다.
이미 그의 섬혼에 찍힌 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움찔하며 물러섰다.
잠깐 사이 두 사람이 그의 섬혼에 찍혀 옷자락에 구멍이 났다.
물러선 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상대가 작정하고 검을 뻗었다면 옷이 아니라 몸에 구멍이 났을 거라는 걸 아는 것이다.
그 사이 장평과 강탁도 상대를 몰아붙였다.
혁무천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남교청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남교청의 얼굴은 이미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수룡방의 고위간부들이 비룡단원이라는 자들에게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아무리 정식 문파가 아니라 하나 그래도 황하를 오십 년 간 장악한 수룡방의 간부들이거늘.
그때 혁무천이 좌수를 들어서 남교청을 향해 뻗었다.
그의 좌수 장심에서 대기를 짓이기는 가공할 기운이 회오리치며 쏟아졌다.
허공을 뒤틀어버린 장력은 찰나의 순간에 남교청을 뒤덮었다.
콰아아아!
남교청은 눈을 부릅뜨고 도를 뽑아서 휘둘렀다.
혁무천의 장력이 남교청의 도세를 두들겼다.
떠더덩!
도신을 타고 전해진 울림에 도를 잡은 손이 터져나가는 듯했다.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남교청은 연신 뒤로 물러섰다.
“결정을 내리시오.”
혁무천이 좌수에 공력을 집중시키며 말했다.
“방주의 말 한마디에 수백 목숨이 걸려 있다는 점 명심하시고.”
고오오오오-!
머리 높이로 든 그의 좌수에서 보는 이를 숨 막히게 하는 가공할 기운이 회오리처럼 휘돌았다.
‘맙소사! 이 정도로 강한 고수였다니!’
입안이 바짝 마른 남교청은 침을 삼켰다. 입을 꾹 다문 그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마지막 기회를 줄 거라 했는데, 아마도 지금이 그때인 듯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해서 거부하고 싶었다.
밖에 수백 명이나 되는 수하들이 있었다. 피해는 크겠지만 그들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혁무천의 무심하고도 차가운 눈을 본 순간 희망을 접었다.
정말 수백 명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였다.
게다가 상대가 내건 조건도 조금은 탐이 났다.
-천룡방을 무너뜨리고 나누어 먹자!
솔직히 처음부터 욕심이 났다.
하지만 간부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단호한 거부!
수룡방 곳곳에 천룡방의 눈과 귀가 숨어 있었다. 간부들 중 누가 천룡방과 내통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깊은 상의를 한다 해도 자신에게만 책임을 추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뢰? 의리?
본래 수적(水賊)이었던 수룡방에 신뢰나 의리란 항상 이익보다 후순위였다.
목숨보다는 한참 뒤였고.
“조, 좋네. 다시 이야기해보세.”
혁무천은 들었던 좌수를 좌측을 향해 뿌렸다.
쾅! 하는 굉음이 나더니, 삼 장 떨어진 곳에서 강탁과 치열하게 싸우던 중년인 하나가 뒤로 튕겨져서 벽에 처박혔다.
“물러서시오.”
혁무천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울렸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송곳처럼 깊이 파고들어서 심혼을 울렸다.
수왕전 안의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그 짧은 시간에 수룡방 간부 일곱 명이 쓰러지고, 나머지 간부들도 가까스로 몸을 부지하고 있었다.
혁무천은 수왕전 안을 둘러보고 남교청을 응시했다.
“생각보다는 대화할 분위기가 빨리 만들어졌군요. 한 이백 명쯤은 죽어야 가능할 줄 알았는데.”
“……!”
남교청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제야 상대를 알 것 같았다.
앞에 있는 놈은 얼굴만 잘생긴 새파란 애송이가 아니었다. 능구렁이 백 마리를 잡아먹은 염왕이었다.
‘쓰벌,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천룡방이 임자를 잘못 만난 거지.’
수룡방 내원은 수적들의 거처답지 않게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이백여 평 크기의 연못은 수로를 통해 동평호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못의 중앙에는 아담한 정자가 서 있었다.
남교청은 혁무천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로부터 일각쯤 지났을 때 남교청의 눈이 커졌다.
“마룡성이……?”
“오면서 만났소. 홍 성주도 흔쾌히 응했지요.”
마룡성마저 이미 비룡장에 넘어갔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혁무천의 계획이었다.
구룡상단을 중심으로 힘을 키워서 팔대마세에게도 뒤지지 않는 세력을 구축하잔다.
“정말 그 일이 가능하겠나?”
“서로 마음만 맞으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요.”
하긴 구룡상단의 무사만 합해도 수천 명이다.
거기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했다. 강호의 절정고수들을 움직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 정도면 팔대마세까지는 아니어도 마도십문과 힘을 겨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우리 수룡방이 무엇을 하면 되겠는가?”
“별다르게 따로 할 일은 없소. 우리와 형제라는 것만 잊지 마시고.”
“천룡방과는……?”
“지금처럼 하면 되오. 아쉬운 건 그들이지 수룡방이 아니지 않소?”
“하, 하. 그건 그렇네만…….”
그러고 보니 쌍방이 고개를 돌렸을 때 정말로 아쉬운 쪽은 천룡방이었다.
자신들이야 천룡방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황하를 오르내리는 물량은 많았다.
하지만 천룡방은 자신들이 아니면 수로를 이용할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천룡방의 무력을 막아낼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이제는 그조차도 해결이 되었다.
마룡성이 비룡장과 함께 하기로 했다지 않은가 말이다.
“알겠네. 자네 말대로 하지. 우리 힘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을 주게.”
***
수룡방과의 협상을 무사히 끝낸 혁무천은 일행과 함께 다시 개봉 쪽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곧장 개봉성 외곽에 있는 관운묘로 갔다.
군데군데 앉아 있던 거지들이 하나둘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 중 대여섯 명이 어슬렁어슬렁 혁무천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느린 듯하면서도 빠르게 이동해서 혁무천 일행 앞을 막아섰다.
모두들 굵은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귀한 댁 공자님 같은데, 무슨 일로 오셨수?”
“소궁단을 만나러 왔네.”
멈칫한 젊은 거지가 다시 물었다.
“그 분은 왜……?”
“받아야 할 빚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