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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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79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54화
154화
그 중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올라오게나.”
혁무천 일행과 소항진이 누각에 올라가려고 하자 호위무사로 보이는 자가 막아섰다.
“소 소협만 올라가시오.”
소항진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오늘 원주님을 만나려는 분은 제가 아니라, 여기 무 공자입니다.”
호위무사는 누각 위의 노인을 돌아다보며 허락을 기다렸다.
혁무천을 지그시 바라보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로 모셔라.”
호위무사가 길을 비켜주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혁무천은 목량과 강탁, 장평에게 그리 말하고 혼자 누각으로 올라갔다.
노인의 눈은 누각 위로 올라오는 혁무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혁무천이 누각 위로 올라가서 마주서자, 노인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젊은 친구가 노부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지 모르겠구먼.”
“비룡장의 무천이라 합니다.”
비룡장이란 말에 노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취룡노사 권불기. 그도 비룡장에서 보낸 전서를 받아본 것이다.
“흠, 백리 장주가 보냈는가?”
“그렇습니다.”
“헐헐헐, 내 마음을 알고 싶었나 보군.”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장주께서는 취룡원의 의사를 분명하게 알고 싶어 하십니다.”
“비룡장의 손을 들어주면 천룡방과 척을 질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취룡노사께서 천룡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지요.”
“노부는 작금의 상황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네.”
“때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할 때가 있는 법이지요.”
“흠, 그럼 내가 왜 비룡장의 손을 들어줘야만 하는지 설명해보게.”
“첫째,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응?”
생각지도 못한 말에 취룡노사는 제대로 화를 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충격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둘째, 하지 않으면 취룡원이 무너질 겁니다.”
“허어…….”
“셋째, 복수를 하겠다고 달려드는 삼백 무사도 모두 죽을 겁니다.”
“…….”
어이가 없는지 취룡노사는 입을 살짝 벌리고 혁무천을 바라보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중년인의 눈은 서서히 역팔자로 꺾어졌다.
호위무사 네 명도 분노를 발산하며 무기에 손을 얹고 취룡노사의 명령을 기다렸다.
누각 안이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강한 살기로 뒤덮였다.
그 와중에도 혁무천은 무심한 눈으로 취룡노사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취룡노사가 입을 열었다.
“허, 허, 허…. 노부가 오래 살긴 오래 살았나보구나. 그런 소리를 다 듣다니.”
혁무천은 그가 아닌 소항진에게 말했다.
“항진, 내가 객기를 부려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소항진도 사실 그렇게까지 대놓고 말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물은 엎질러졌는데.
목에 힘을 준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무 형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취룡노사의 차가운 시선이 소항진에게로 향했다.
“풍혼문이 비룡장과 손을 잡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닙니다, 노사. 우리 풍혼문은 무 형의 뜻에 따르기로 했을 뿐입니다. 만마성과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취룡노사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만마성?”
그런데 그가 중년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는 이야기이냐?”
중년사내는 고개를 젓고는, 혁무천을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았다.
“나는… 만마성의 옥종서라 한다. 내 이름을 한번이라도 들어봤다면 내 성격이 어떤지도 알 것이다.”
그의 이름에 소항진이 눈을 부릅떴다.
청살마혼(靑殺魔魂) 옥종서.
사십 대 중반의 이른 나이에 만마성의 장로가 된 절정고수.
그가 취룡원에 와 있을 줄이야.
“너희들이 만마성의 이름을 들먹인 이상, 그만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풍혼문과 비룡장은 피로써 그 대가를…….”
옥종서가 살기 띤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혁무천이 잘라냈다.
“당신은 나서지 마시오.”
“……뭐라?”
“항진은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다만 나와 취룡원 사이의 일에 만마성은 상관없는 것일 뿐.”
“흥! 이제 와서 발뺌을 하겠다는 거냐?”
옥종서의 전신에서 가공할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혁무천은 눈썹 한 올도 꿈쩍하지 않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이 죽일 놈이……!”
분노가 한계치를 넘어가버린 옥종서가 왼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우수를 뻗었다.
어느새 그의 손바닥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무쇠도 으스러뜨린다는 청살마장이었다.
혁무천도 우수를 마주 내밀었다.
두 사람의 우수가 석 자 간격을 두고 있는데 폭음이 터졌다.
쾅!
찌지지직.
옥종서의 발이 원목으로 된 바닥을 파면서 뒤로 다섯 자나 밀려났다.
반면 혁무천은 상체가 흔들렸지만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기는커녕 옥종서가 멈춰 서기도 전에 미끄러지듯 그에게 다가가며 쌍수를 번갈아 쳐냈다.
겨우 몸을 세운 옥종서는 해일처럼 밀려드는 응축된 무형의 기운에 숨이 턱 막혔다.
눈을 부릅뜬 그는 전력을 다해서 청살마장을 펼쳤다.
쿠르르릉.
두 사람의 장력이 뒤엉키면서 뇌음이 일고, 지진이라도 난 듯 누각이 떨렸다.
쿵, 쿵, 쿵.
옥종서가 세 걸음 물러서고,
쩌저적.
누각의 바닥이 그의 발아래에서 비명을 내질렀다.
힘겹게 물러선 후 멈춰 선 옥종서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진 듯 창백했다. 치켜뜬 그의 눈은 눈꺼풀이 사시나무 이파리처럼 떨렸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청살마장을 전력으로 펼치고도 밀리다니.
혁무천도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기 위해 공력을 팔성이나 끌어올렸다. 봉인된 꿈틀거리면서 기경팔맥이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공력을 쏟아내면 봉인이 풀리고 생명선이 줄어들지도 몰랐다.
당장은 일처리를 최대한 빠르게 하기 위해 손을 썼지만, 만마성의 장로와 무리해서 싸울 이유는 없었다.
“나는 이 일로 천양묵 성주와 얼굴 붉히는 걸 원치 않소. 만마성과의 거래가 무산되는 것도 바라지 않고. 아마 성주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요. 그러니 당신은 구경만 하시오. 이 일에 나서지 말고.”
혁무천의 목소리가 고저 없이 흘러나왔다.
옥종서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분노가 폭발해야 하는데도 본능 저 깊은 곳의 무언가가 자신을 붙잡았다.
숨을 깊이 들이쉰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젠장! 이게 무슨 꼴…….’
으드득, 이를 갈며 눈을 치켜뜨던 그는 혁무천의 눈과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고 눈알을 돌렸다.
정말 빌어먹을 일이었다.
혁무천은 옥종서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돌려서 취룡노사를 바라보았다.
“제가 세 가지 이유에 대해서 말했으니, 선택은 노사가 하십시오.
“으으음.”
취룡노사가 침음을 흘렸다.
옥종서는 자신에게 뒤지지 않는 고수다. 그런 고수가 단 두 번의 격돌 만에 된서리 맞은 풀잎사귀처럼 축 늘어졌다.
어쩌면 저놈의 오만한 말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
거부하면 취룡원에 주향 대신 혈향이 넘쳐날지도 모른다.
‘허어, 나도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군.’
씁쓸해진 취룡노사는, 언제든 무기를 뽑을 수 있는 자세로 대기 중인 호위무사들에게 손을 저었다.
호위무사들은 잠깐의 망설임만 보인 후 뒤로 두어 걸음씩 물러섰다.
취룡노사의 눈이 다시 혁무천에게로 향했다.
“우리 취룡원을 얻겠다고 왔을 때는 천룡방을 이길 수 있는 계획이 있다는 말 같은데… 어디 한번 이야기나 들어보세.”
혁무천의 시선이 먼저 옥종서에게로 향했다.
“듣고 나면 마음대로 나갈 수 없을 거요. 가려면 지금 가시오.”
그런데 취룡노사가 말했다.
“괜찮네. 종서는 이 늙은이의 외조카라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함께 들어도 되네.”
어쩐지 두 사람이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 같다 했더니 혈육이었나 보다. 게다가 취룡노사가 절대적인 믿음을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야기 못할 것도 없었다.
듣는다 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아니고. 만마성에 일러바치기만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으면 그때 제거하면 된다.
잠시 후.
취룡노사는 소청문이 그랬던 것처럼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반쯤 벌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옥종서는 눈을 부릅뜨고 미친놈 보듯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취룡노사가 소청문과 다른 점은, 계획의 성공 가능성을 조금 더 높게 쳐주었다는 것이었다.
“흐으으음, 그거 재미있겠군.”
게다가 왠지 흥이 난 표정이었다.
그 반응에 옥종서가 놀라서 말했다.
“외숙부! 재미로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전쟁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수백 년간 힘들게 이룬 취룡원의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너는 우리 취룡원이 항상 태평성대만 살아왔다고 보느냐?”
“그건 아니지만…….”
“이보다 훨씬 더 힘든 세월을 버텨낸 것만 해도 몇 번이나 된다. 그때를 생각하면 사실 저 젊은 친구의 협박 정도는 협박도 아니지.”
취룡노사가 피식 웃으며 말하고는 혁무천을 향해 말했다.
“그래, 정말 그렇게 해볼 생각이신가?”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응? 허허허허허. 이 늙은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구먼.”
“세상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최소한, 힘없는 상인들이 권력과 강호의 칼 아래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지는 않게 될 겁니다.”
취룡노사는 혁무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힘없는 상인들이 권력과 강호의 칼 아래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지 않게 될 거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조금도 어렵지 않은 말인데, 다 늙은 그의 가슴이 잔잔하게 울렸다.
검버섯이 희미하게 피어난 주름진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간혹 뻑뻑함마저 느끼는 건조한 눈에 습이 찬 듯했다.
상인들은 권력 앞에서 항상 허리를 숙여야 했다.
칼 아래에서 항상 겁에 질려 기어야 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절정고수임에도 상인의 측면으로 보면 어쩔 수 없었다.
황궁과 관의 권력에 허리를 숙이고, 강호의 칼 아래에 무릎 끓고…….
자존심 따위는 상인이 되는 순간 똥간에 처박아 놓아야 했다.
그게 상인의 덕목(?)이었다.
자신은 그게 싫었다. 어릴 때 무공을 익혀서 절정고수가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이 칠십이 된 지금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허리를 다른 상인들보다 조금 덜 숙이고, 무릎도 한쪽만 꿇으면 되는 정도일 뿐.
무림 거대세력의 눈에는 그저 무공이 조금 강한 상인일 뿐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허리를 부러뜨리고, 무릎 꿇릴 수 있는 장사꾼.
“허, 허허허, 허허허허. 이제 보니 이 늙은이가 사람을 크게 잘못 본 것 같구려.”
취룡노사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혁무천을 향해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숙였다.
“취룡원의 늙은이가 다시 인사를 드리오.”
“수, 숙부……?”
옥종서가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호위무사들은 물론, 소항진도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목량이나 강탁, 장평은 그런가보다 했고, 혁무천은 무심한 눈으로 취룡노사를 바라보았다.
취룡노사가 인사말을 이었다.
“이 어리석은 늙은이와 취룡원은 공자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언제든 필요하시면 명령을 내려주시구려.”
비룡장을 따르겠다는 것이 아니다. 혁무천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혁무천과 목량은 그 말뜻을 바로 깨달았다.
혁무천은 망설이지 않고 취룡노사에게 말했다.
“원주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손님이 왔는데도 술 한잔 내놓지 않는군요.”
취룡노사는 풀썩 웃고는 옆을 향해 말했다.
“가서 천매주를 가져오너라.”
그러고는 혁무천을 보며 한마디 설명을 덧붙였다.
“천매주는 십 년마다 열매가 열린다는 영설매의 열매로 담그는데, 담그고 삼십 년이 넘어야만 제 맛이 난다오. 마침 오십 년쯤 지난 천매주가 있으니 한잔 대접하리다.”
“그런 술이라면 굉장히 비싸겠군요.”
“한 병에 은자 삼천 냥이지요.”
“…….”
삼천 냥짜리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