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83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54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83화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천운.’
사마경은 장천운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어젯밤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모든 걸 잊으려 했다. 장천운에 대한 마음도.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듯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파내고 싶어도 파낼 수 없을 만큼.
그를 가슴에서 파내려면 심장이 모두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낼 생각도 없었다.
앞으로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때까지는 꾹꾹 눌러놓을 것이다.
장천운에 대한 마음보다 아버지의 복수가 더 중요하니까.
‘그 점은 미안해, 천운. 천운이라면 내 마음을 이해할 거야.’
그때였다. 장천운이 선두에서 빠르게 걷던 구산을 향해 말했다.
“구산, 속도를 늦춰.”
구산이 속도를 늦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왜, 조장?”
장천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걸으면서 전면을 바라보았다.
십여 장 앞에 산허리를 잡고 돌아가는 구비가 있었다. 그 구비 너머에서 진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 살기의 주인이 누군지, 무엇 때문에 그런 살기를 품고 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살기를 품은 채 기다리고 있으며, 길이 외길이라는 것이었다.
장천운은 구산을 앞질러서 선두로 나섰다.
구비를 돌아가자, 우거진 숲 사이로 뻗은 제법 넓은 길이 보였다.
“우리를 기다리는 손님인가?”
일행 중 장천운을 제외하면 제일 강한 사공명신이 살기를 눈치채고 소리쳤다.
쏴아아아아.
바람도 없는데 숲속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났다.
그 직후 들리는 냉랭한 음성.
“그놈들, 새파란 것들이 눈치가 제법이군.”
목소리가 끝날 즈음, 좌우 숲속에서 수십 명이 나타났다.
청의, 갈의, 회의. 각양각색의 평범한 무복을 입고 얼굴에는 복면을 쓴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까지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데 우리 앞길을 막는 거요?”
장천운이 묻자, 나타난 자들 중 갈의복면인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후후후, 구천성에 가는 길이냐?”
“그렇소.”
“너희들은 구천성에 갈 수 없다.”
“무슨 말씀이오? 왜 갈 수 없다는 거요?”
“그야 우리가 못 가게 막을 거니까. 흐흐흐흐, 구천성 대신 저승으로 보내주마.”
“어디서 오신 분들이오?”
“그건 알려줄 수 없다.”
“우리가 누군지 아쇼?”
“네놈들이 누구든 상관없다. 놈들을 쳐라!”
이유도 없고, 정체도 모르면서 무작정 죽이겠다고?
장천운은 상대의 막무가내 식 행동을 보고 냉소를 지었다.
구천성으로 가는 자들이 습격당해서 죽으면 구천성의 명예에 금이 간다.
‘공손백도 곤란해지겠지.’
풍기는 기운만 봐도 복면인들은 마도의 무공을 지닌 자들, 그렇다면 나극과 연관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복면인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은 강하고 살기가 넘쳤다.
하지만 상대는 가을 독사처럼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흑월조였다.
촤악!
흑월조 조원들이 거의 동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기를 빼들고 상대를 향해 쇄도했다.
제일 먼저 저두심의 표도가 허공을 갈랐다.
쉬쉬쉬쉭!
무려 백팔 개의 표도를 온몸 구석구석 숨겨 놓은 그였다.
살이 빠져서인지 속도도 더 빨라졌다.
“켁!”
“컥!”
단말마가 터지는 사이로 흑월조 조원들이 스며들었다.
기합도, 고함도 없이 도검을 휘두르는 그들의 공세는 독 오른 살모사가 적을 향해 독니를 드러내고 쏘아져가는 듯했다.
그 사이 사공명신은 갈의복면인을 향해 다가갔다.
강력한 흑월조의 대응에 당황하고 있던 갈의복면인이 핏발 선 눈을 치켜뜨고 이를 갈았다.
“이, 이런 개…… 썅!”
사공명신이 먼저 갈의복면인을 향해 쇄도했다.
“어디 칼도 입만큼 잘 놀리는가 볼까?”
두양양은 한쪽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회의복면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몇 놈 안 된다! 함께 달려들어!”
악을 쓰던 회의복면인은 날아드는 두양양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오냐, 이 계집! 내가 가랑이를 찢어주마!”
욕을 퍼부은 그는 면이 넓적한 귀두도를 휘두르며 마주 달려들었다.
두양양의 검에서 서릿발처럼 차가운 검화가 피어났다.
‘곱게 죽고 싶지 않다면 소원대로 해주지!’
한편, 장천운은 태연한 표정으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마 이곳뿐만이 아니고 다른 곳도 마도 무사들이 구천성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심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 사마경이 차갑게 대꾸했다.
“장로원주와 관계된 자들 같지?”
“예, 소성주.”
“사람들이 많이 죽겠어.”
“저희로 봐선 나쁠 것 없지만, 엄한 사람들이 죽을까봐 걱정입니다.”
공손백과 나극의 불협화음이 증명된 셈. 현재로선 둘이 힘을 합친 것보다 나뉘어 있는 게 나았다.
문제는 그로 인해서 많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구천성이 개판이 되었군.”
생각지 못한 사마경의 말투에 장천운은 슬쩍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자신과 함께 다닌 후 말투가 변한 듯해서 쓴웃음이 나왔다.
“앞으로는 더 개판이 될 겁니다.”
“지금 벌어지는 개판을 뒤집어버리면 좋겠는데.”
“판을 깨버리면 개판이고 뭐고 없어지겠죠.”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사마경이 물으며 장천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장천운도 피하지 않았다.
“해보는 데까지 해봐야죠. 단, 판이 깨질 때까지 살아남아야만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천운이 지켜주면 되잖아.”
“그래야죠. 어차피 그게 제 임무니까요.”
“임무가 아니면 지켜주지 않겠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임무가 아니어도 지켜드릴 겁니다.”
“그 말, 잊지 마.”
소연추는 빠르게 오가는 두 사람의 말에 눈알을 열심히 굴리다가 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후우, 장천운도 그렇지만, 아가씨도 그 동안 많이 변했어.’
괴상한 대화가 진행되는 사이 싸움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크억! 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케엑! 이 염창이 계집에게 당하다니…….”
사공명신과 두양양이 상대로 하여금 비명을 합창하게 만들었다.
비명을 사이좋게 내지른 두 사람은 욕설까지 마저 함께 내뱉고 쓰러졌다.
장천운은 욕설을 듣고 그들의 정체를 눈치 챘다.
“염창? 혈수마신 염창? 그렇다면 귀마궁에서 나왔단 말이군.”
혈수마신 염창은 귀마궁의 장로다.
그리고 귀마궁은 나극과 밀접한 사이였다.
36장: 내가 돌아왔다
구천성 주위 이삼백 리 안에서 무차별적인 습격이 감행되었다.
습격 받은 자들 중에는 구경삼아 오던 자들도 있었고, 선물보따리를 마차에 싣고 오던 자들도 있었다.
또한 정파의 고수들도 있었고, 흑백의 경계에서 세력을 불리던 신진세력의 주요 인사들도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 구천성으로 향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날 오후, 곳곳에서 습격소식이 전해지자 구천성이 발칵 뒤집혔다.
쾅!
“어떤 놈들이 감히 그 따위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
탁자를 내려친 공손백의 노성이 대전을 뒤흔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구천성의 손님들을 습격하다니! 도대체 어떤 놈들이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보고를 올린 벽호당주 서호는 바짝 긴장했다.
합비성의 일이 전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 난리인지, 참으로 미칠 일이었다.
“이미 일곱 곳에서 습격을 받아 육십여 명이 당했다 합니다, 대령주!”
“이곳에서 이삼백 리 떨어진 곳이면 본 성의 영역이 아니더냐! 그런데 집안에 들어온 손님들이 습격을 당하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이냐?”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어서…… 순찰을 책임진 속하의 잘못이 큽니다, 대령주!”
“범인들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느냐?”
“일부 마도세력이 이번 일에 연루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귀마궁도 있고, 삼혈방도 있습니다, 대령주.”
“사실로 밝혀지면 그들에게 엄히 책임을 물을 것이다! 철저히 조사하도록 해라!”
“예, 대령주!”
서호가 후들거리는 몸으로 대전을 나가자, 백리호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원주의 입김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사형.”
“미친 늙은이. 이판사판이라 이건가?”
“아무리 날뛰어봐야 며칠 후면 끝날 일입니다.”
“원단이 될 때까지 그 늙은이와 독고태를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라.”
“예, 사형.”
공손백은 백리호가 대전을 나간 후로도 태사의에서 한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반각쯤 지났을 때, 조용히 앉아서 전면 허공을 노려보던 그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떠올랐다.
“사제가 개별적으로 호법들과 접촉하고 있다고 했더냐?”
그가 나직이 말하자, 좌측에 석상처럼 고요히 서 있던 백의인이 고개를 숙였다.
창백하게 느껴질 정도의 하얀 얼굴, 얼음구슬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눈동자.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그가 바로 사계 중 첫째인 동백(冬白)이었다.
본명도, 정확한 나이도, 무공의 고하도 알려지지 않은 자. 그저 사계 중 최강이라고만 알려진 자.
“예, 주군.”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 거라 보느냐?”
“자신의 위치를 좀 더 확고히 하고자 함이겠지요.”
“엉뚱한 욕심을 낼 가능성은?”
“그는 주군을 잘 압니다. 함부로 그러진 못할 겁니다.”
“그래, 그러겠지. 당분간은 지켜보기만 하고 그냥 놔두어라.”
“존명.”
“동백, 문인동 장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
공손백이 뜬금없이 한 사람에 대한 평을 물었다. 동백도 그를 아는 듯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옛 병법가와 비교한다면 장량 같은 자가 아닐까 합니다.”
“네가 그리 칭찬하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택한 것은 아닌가 보구나.”
문인동은 장로 중에서도 나이가 적은 편이었다.
말수가 적고 남 앞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그의 뛰어남을 아는 자는 많지 않았다.
공손백조차 서너 번 만난 후에야 그의 식견이 높고 뛰어난 병법을 익혔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다.
최근 들어 공손백은 문인동을 자주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동백이 그를 칭찬하니 자신이 사람을 잘 본 듯해서 내심 흐뭇했다.
‘앞으로 중요한 일은 그와 상의하는 게 좋겠어.’
***
장로원 대장로전.
나극은 다급히 찾아온 독고태의 말을 듣고 황당해서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린가? 내가 왜 그런 일을 벌인단 말인가?”
“정녕 아닌 것이 분명합니까?”
“어허!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탕탕!
나극이 눈에 힘을 주고 다탁을 내려치며 반문했다.
그러잖아도 심적으로 흔들리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위가 엉뚱한 소문을 들고 와서 자신을 의심하는 것 아닌가?
사위만 아니었다면 당장 쫓아내고도 남았을 일이다. 아니, 옛날 같았으면 팔다리 하나쯤 부러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고태도 나름대로 고민이 깊었다.
“으음, 그거 참 이상하군요.”
“아니면 아닌 거지,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장인어른, 사람들이 마도무사들의 축하사절 습격의 배후를 누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거야…… 설마 내가 그랬을 거라 생각한단 말인가?”
나극이 이마를 찌푸렸다.
왈칵 짜증이 솟구쳤다. 요즘 들어 이마를 찌푸리는 일이 많다 보니 주름만 늘은 듯했다.
그러나 독고태는 그의 이마 주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나극이 지시하지 않았다면 대체 누가 그런 일을 벌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