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3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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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05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38화
138화
마천문을 나서는 혁무천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골치 아프게 됐군.’
셋으로 나누어진 혈천여록이 모두 사라졌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지 몰라도 한 사람이 모두 거두어간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혈천여록을 거두어간 목적이었다.
범인의 목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코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 모은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로 인해서 또 한 번의 혈사가 발행한다면?
자신 역시 그 혈사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버님께서도 얼핏 말씀하셨지만, 머지않아서 중원에 가게 될지 모르네. 자네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다섯 자 정도 거리를 두고 걷던 공손두가 불쑥 말했다.
혁무천은 고민을 한쪽 구석에 구겨 넣고 담담히 답했다.
“나는 무창에 있을 생각이다. 급하게 연락할 일 있으면 비룡장으로 연락해.”
“비룡장? 좋아, 그렇게 하지. 잘 가게. 나중에 또 보자고.”
혁무천은 고개만 끄덕이고,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어서 마천문의 정문을 나섰다.
일행들도 그를 바짝 따라갔다.
눈은 콩알만 해도 간은 호박만 한 동대안조차 굳어 있던 표정이 그제야 조금 펴졌다.
그렇게 십여 장쯤 걸어갔을 때 장대산이 말했다.
“대형, 그거 전부 어디로 갔을까?”
“글쎄다. 이제부터는 그걸 알아봐야 할 것 같다.”
그때 동대안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봐, 무천. 내가 전부터 궁금했는데… 도대체 대산이의 조부가 찾으라는 것이 뭔데, 사람이 죽고 없어진 건가?”
혁무천은 그 질문에 대해서 다섯 걸음을 걸은 후 대답해주었다.
“동 형도 아는 것이오.”
이제는 말해주어도 될 듯했다. 더구나 동대안은 장대산이 혈천여록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아마 지금쯤은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역시…….”
동대안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도 직접 말을 들으니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역시 혈천여록과 완전히 남이 아니었다.
마천제가 어린 시절을 보내며 무공을 익힌 곳이 광천곡 아닌가. 그는 광천곡의 제자고.
“정말 그거란 말인가?”
“그렇소.”
다른 사람들은 궁금증이 튀어나올 것 같은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거, 우리도 좀 압시다, 대형.”
영추문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그런데 장대산이 큰 눈을 껌벅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대형, 할아버지가 찾으라고 한 것이 뭔지 알아?”
사람들이 이번에는 장대산을 쳐다보았다. 키가 작은 몇 사람은 고개를 번쩍 쳐들기까지 했다.
그 물건이 뭔지 장대산도 모른다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아니, 그럼 무천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때 혁무천이 말했다.
“대산, 백마궁이 고문하며 너에게 뭘 내놓으라고 했지?”
“어, 혈천여록.”
장대산을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 그럼 할아버지가 찾으라는 게 혈천여록이었어?”
장대산의 그 말에 이제는 입마저 벌어졌다.
세상에! 자신들이 찾으러 다닌 것이 마천제가 남겼다고 알려진 혈천여록이었다니!
“맞아. 네 할아버지는 그걸 세 조각으로 나누어서 절친한 친구들을 통해 숨겼다. 그런데 모두 없어졌어.”
혁무천의 그 말에 동대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천여록에 정말 천하제일무공이라도 적혀 있나?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마천제가 남긴 것이라 해도 사람을 죽이고 가져갈 것까지는 없잖아? 그것도 팔대마세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것들인데.”
놀랐던 사람들도 그 말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목량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대산의 조부님께서 굳이 세 조각으로 나누어 숨길 이유가 없지요.”
그건 그렇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대안도.
“그럼 왜 숨겼지?”
동대안이 다시 의문이라는 듯 말했다.
목량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 생각에는, 아마 남의 손에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뭔가가 그 안에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되는 뭔가라…… 헉!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남의 손에 들어가서 안 되는 그것이 지금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단 말이잖아?”
“대형께서는 그게 걱정되어서 그걸 찾으려 했던 것이 아닌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혁무천에게로 향했다.
혁무천은 사실을 살짝 비틀어서 말했다.
“네 말이 맞다.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혈천여록에 미완성의 마공이 적혀있다고 하더군. 그걸 익히면 진짜 마인이 된다고 했다. 인간의 심성이 사라지고 피만 추구하는 악마가.”
듣고만 있던 송비가 이마를 잔뜩 찌푸렸다.
“으음, 그럼 마천제가 그걸 익혀서 아수라가 된 건가?”
“마천제가 익힌 것은 그와 다른 것이라고 봐야 할 거요. 그가 비록 만인혈사를 일으키긴 했지만 악마는 아니었으니까.”
혁무천은 자신에 대해 변명을 하려니 낯이 뜨거워졌지만 한마디 안 할 수 없었다.
“에이, 진짜 아수라 같았다고 하던데. 자넨 젊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사부님께서도 그랬다네. 마천제야말로 진정한 아수라였다고.”
다시 반박하려던 혁무천은 입을 다물었다.
세상이 이미 마천제를 아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몇 마디로 뒤집어지기에는 너무 많은 피가 흐른 것이다.
입맛이 쓰지만 어떡하겠는가.
“어쨌든 그걸 찾지 않으면 강호는 진짜 아수라를 맞이할지도 모르오.”
혁무천은 그렇게만 말하고 발걸음을 빨리 했다.
어느덧 서산머리에 핏빛으로 물든 붉은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
혁무천 일행은 중경까지 내려가서 장강 하류로 향하는 배를 탔다.
단순히 이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혁무천은 무공구결이 적힌 종이를 몇 사람에게 나누어줬다.
동대안, 장평, 영추문, 철호, 장대산, 그리고 목량과 강탁까지.
무인도의 무공과 자신이 아는 무공을 각자의 능력에 맡게 정리한 것이었다. 한유림은 개별적으로 천구지학을 가르치기 때문에 따로 줄 필요가 없었다.
구결이라고 해봐야 많이 적힌 것은 다섯 장, 적은 것은 석 장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종이를 받은 사람들은 비뚤어진 획 하나도 세세히 살피며 무공구결을 파고들었다.
물론 모두가 만족한 것만은 아니었다.
송비는 불만이 많았다. 참다못한 그가 중경을 출발하는 날 투덜거렸다.
“지미, 왜 나는 아무 것도 안 줘?”
철상은 아들인 철호의 것을 같이 봤다. 하다못해 구원도 천구지학을 제대로 가르치는지 지켜본다며 한유림과 함께 혁무천의 가르침을 같이 들었다.
자신만 소외된 것 같으니 불만이 많을 수밖에.
그런데 혁무천도 할 말이 있었다.
“국주는 새로운 무공을 익혀봐야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그래도…….”
“기존에 익힌 무공만 해도 상당히 뛰어나서 능히 절기라 불릴 만합니다. 그 무공의 경지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게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제길, 누가 그걸 모르나?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러지.’
그게 쉬우면 무공의 경지가 십 년째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진 않았을 것이다.
“원하신다면 그건 제가 도와드리지요.”
그 말에 송비의 표정이 확 풀어졌다.
“정말이지?”
“대신 제가 국주의 무공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적절한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결국 송비는 품안 깊숙이 꿍쳐두었던 비급을 꺼내서 자신의 손으로 혁무천에게 바쳐야(?) 했다.
삼십 년 전, 말단 표사였을 때 표행 중 고묘에서 발견한 후 한 번도 그의 몸을 떠난 적이 없는 비급을.
비급의 이름은 칠원무급(七原武笈).
처음에는 내놓을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비급을 해석하고 익히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반면 저 괴물 같은 혁무천이라면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듯했다.
혁무천은 그 비급을 살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칠원무급에는 모두 세 가지 무공이 적혀 있었다.
심법, 도법, 신법.
그런데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상승의 절기였다. 아마 송비가 칠원무급의 무공만 제대로 익혔어도 한중 최고의 고수가 되었을지 몰랐다.
“어떤가? 쓸 만한 건가?”
혁무천의 표정을 살피며 송비가 물었다.
혁무천은 ‘이렇게 뛰어난 무공을 얻었으면서 여태 뭐한 겁니까?’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가 걸려 있었군요.’라는 말도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제대로 익히려면 열심히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 괜찮은 무공이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지?”
“그렇습니다. 나이가 있으셔서 쉽진 않겠지만, 열심히 하시면 초절정경지에 올라설 수 있을 겁니다.”
“……!”
송비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초절정 경지! 그럼 백호방 양가 놈을 이길 수 있겠군!’
혁무천 일행을 태운 상선은 충경을 출발한 지 닷새가 지날 때쯤 삼협 중 마지막인 서릉협을 통과했다.
배가 의창에 가까워지자 혁무천은 은설을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의창에 도착한 그는 배에서 내려 육로를 통해 동쪽으로 갔었다.
그러다 형주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노숙을 하던 중 은설을 만났었다.
‘그때만 해도 정말 순진한 모습이었는데…….’
멈칫거리며 다가오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
은설은 창문 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오빠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와호산장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단 하루도 혁무천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가끔은 그 정도에 삐쳐서 떠나버린 그가 야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를 이해해주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시무룩해지곤 했다.
‘쳇, 남자도 질투한다는 걸 알았으면 조심했을 텐데…….’
와호산장 주인인 이현의 부인에게 슬쩍 자신의 고민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 듣더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떤 때는 남자의 질투가 여자의 질투보다 더 강할 때가 있어.”
그제야 자신이 그날 뭘 잘못했는지, 무천이 왜 떠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은 소저, 여기 계셨군요.”
신도평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설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단정하게 옷을 입은 신도평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신양에 나갈 생각인데, 함께 가지 않겠소?”
은설은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신도평이 말했다.
“요즘 고민이 있으신 거 같은데, 혹시 아오? 바람 좀 쐬고 오면 고민거리가 사라질지. 나와 동생뿐만 아니라 남궁 형도 간다고 했으니 함께 가시지요.”
하긴 안에서 혼자 고민만 한다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신도평의 말대로 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
“알았어요, 가요.”
와호산장을 나선 사람은 모두 넷이었다.
신도평과 남궁운, 은설, 그리고 등주에서 온 신도소영까지.
그들은 말을 타고 곧장 신양으로 향했다.
그런데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와호산장을 나선 사람들 중에 자신의 주인이 찾는 여자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하얗게 웃었다.
‘드디어 나왔군.’
메고 있던 망태기를 한쪽에 던진 그는 달려가는 말의 뒤를 쫓아갔다.
신양에 도착한 신도평과 은설 등은 잉어 요리로 유명한 백리객잔을 찾아갔다.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어서 손님이 워낙 많았는데, 용케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그들은 잉어 요리를 시키고 이 각이나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 않게 잉어 요리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맛이 있었다.
은설도 맛있는 요리를 먹다 보니 우울했던 기분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
“저 잠깐 좀 갔다 올게요.”
오랜만에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그녀는 뒷간에 가기 위해 객잔의 뒷마당으로 나갔다.
객잔의 뒷간은 어둑한 곳의 구석에 있었다.
그런데 은설이 뒷간의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 무언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은설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