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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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447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37화
137화
제각은 마천문의 후원 깊숙한 곳에 서 있었다.
제각 안에는 역대 문주들의 신위는 물론, 공손가의 선조 및 공을 세운 자들의 위패 수백 개가 모셔져 있었는데, 십이 시진 내내 경비가 삼엄했다.
물론 그들이 아무리 삼엄하게 경비를 서도 혁무천이 그들의 눈을 속이고 잠입하는 것쯤은 어려울 것 없었다.
문제는, 그가 원하는 것을 찾으려면 제각 안을 뒤져야 하는데, 그 일까지 속이기는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혁무천이 몰래 들어오지 않고 공손두를 통해서 알아보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확인이지, 마천문과 대판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니까.
공손두를 따라 제각에 도착했을 때쯤 주위로 수십 명이 다가왔다.
일정한 간격, 일정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걸 보니 제각을 지키는 경비무사들인 듯했다.
혁무천이 지나가는 투로 공손두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마천문의 장로 중에 염화구옹(炎火求翁)이라는 분이 제각을 관리한다고 들었는데, 어디 계신지 아나?”
공손두가 멈칫하더니 그를 돌아다보았다. 왠지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은 듯 느껴졌다.
혁무천은 그 표정만 보고도 뭔가를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손두가 말했다.
“작년 늦가을에 돌아가셨네. 살해당한 것이 분명한데, 아쉽게도 범인을 잡지 못했네. 사실 그 때문에 장로의 죽음에 대해서 함구시켰지.”
“그랬군. 아는 분이 소식을 전해달라고 해서 만나 뵈려 했는데…….”
혁무천은 담담히 말했지만 입맛이 씁쓸했다.
염화구옹은 장염의 친구 중 한 사람이었다. 장염이 혈천여록의 일부를 맡긴 사람. 그가 암살을 당했다면 혈천여록도 없어졌다고 봐야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확인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내가 찾으려는 물건은 책이야. 완전한 것은 아니고, 반쪽으로 쪼개진 거지. 제각 안에 책을 놓아두는 곳이 어딘지 아나?”
“물론 알지. 아마 제단 아래에 있을 거다. 그런데 그곳에는 선조님과 마천문의 발전에 공을 세운 분들의 일을 적어놓은 기록서밖에 없을 텐데?”
“보면 알겠지.”
제각 안에는 수백 개의 위패가 있고, 그 위패가 놓인 제단 아래에는 미닫이문이 달린 공간이 있었다.
공손두의 지시에 따라서 수하 하나가 제단 밑의 미닫이문을 양쪽으로 젖혔다.
한쪽에 책이 차곡차곡 쌓여 있고, 각종 물건과 제기도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혁무천은 책만 살펴보았다. 굳이 많은 걸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미 보기 전부터 혈천여록이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건성으로 사십여 권에 달하는 책을 살펴본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내가 찾는 책은 없군. 나에게 그 말을 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나?”
“나는 약속을 지켰네. 원하는 물건을 못 찾았다 해도 말하기로 한 정보는 알려줘야 하네.”
“할 수 없지. 약속을 했으니까.”
혁무천은 어차피 공손두에게 말할 생각이었던 터라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호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쪼잔한 성격은 아니군. 어디 말해 보게.”
“우문척이 정파의 비전무공을 얻은 정은맹의 비밀 연무장을 친 것은 알고 있겠지?”
그 말에 공손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시 혁무천의 말뜻을 뒤늦게 알고 조사해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후였다. 그 이후 정은맹의 뒤를 쫓아서 몇몇 무사들을 잡기는 했지만 무공비급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말은 들었네. 만마성도 나섰다고 하더군. 여우 같은 정파 놈들이 뒷길로 도주해서 상당수를 놓쳤고 말이야.”
“그 싸움에서 우문척이 정파의 비전 무공을 얻은 것도 아나?”
“우문척이 정파의 무공을 얻었다고? 정말인가?”
되묻는 공손두의 눈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그 사실은 몰랐나 보다.
“최소한 열 가지는 얻었을 거다. 마천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로 인해 팔대마세의 균형이 깨질지도 모른다.”
공손두가 이마를 찌푸리며 침음을 흘렸다.
“으으음.”
우문척과 천화광은 그가 마음에 둔 최강의 적수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정파의 상승 무공을 열 가지나 얻었다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그래도 패할 거라는 생각은 안했다. 하지만 이기는 것도 그만큼 어려워진 셈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개인의 대결이 아닌 세력 대결을 벌일 때였다.
저들은 그 무공을 기반으로 고수들을 키워낼 터. 단 일이 년만 지나도 정말 균형이 틀어질 수 있었다.
“그 말, 사실이겠지?”
“난 거짓말이나 하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야. 그 상황은 나 외에도 많은 사람이 봤다. 여기 있는 동 형도 봤고. 물론… 천화광도.”
조용히 서 있던 동대안이 그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혁무천이 천화광의 이름까지 팔자, 공손두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 보고해야 할 사항 같군.”
“좋을 대로. 그럼 우린 이만…….”
혁무천은 그쯤에서 마천성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공손두가 곱게 보내주지 않았다.
“함께 가줘야겠네.”
“나도 가자고?”
“그 말을 꺼낸 사람이 자네 아닌가? 함께 가서 진위 여부 정도는 확인해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혁무천으로선 바라지 않던 흐름이었다.
그렇다고 거부하기도 애매했다.
그가 바로 답을 못하자, 공손두의 입꼬리가 묘하게 틀어졌다.
“나뿐만 아니라 아버님께서도 자네에게 관심이 많네. 아버님께선 도대체 어떤 자가 능화와 쌍마귀에게 창피를 줬는지 몹시 궁금해 하시더군.”
혁무천은 미간을 꿈틀하고는, 고개를 돌려 제각 밖을 바라보았다.
무사들이 더욱 늘어나서 제각을 포위하다시피 한 상태였다.
단순한 경비무사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구경 온 자들도 아니었다.
‘만나러 올 때부터 나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군.’
생각지 않게 제각으로 오는 바람에 늦게 나타난 듯했다.
혁무천은 그들을 보고 결정을 내렸다.
“마천문의 문주께서 나를 보고 싶다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앞장 서.”
***
마천문의 문주, 사천제일마 공손락은 삼층짜리 거대한 전각인 마천대전 안에서 혁무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대한 체구,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엄이 느껴지는 그는 체구와 얼굴 모두 공손두와 비슷했다.
높이가 열다섯 자나 되고 폭이 여섯 자인 전각의 문 두 개가 양쪽으로 활짝 열리자, 반쯤 감겨 있던 그의 호안이 서서히 떠졌다.
햇살을 등지고 두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양 옆으로 늘어서 있던 열두 명의 호위무사 사이를 통과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야 당연한 행동이지만, 그 옆에 있는 놈도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흐음. 저놈이 무천인가 보군.’
공손락은 흥미가 인 눈으로 문제의 인물인 무천을 바라보았다.
검은 무복, 아들보다는 작지만 제법 큰 키…….
그의 눈이 커졌다.
‘진짜 잘생긴 놈이군.’
그 사이 그의 앞에 도착한 공손두가 고개를 숙였다.
“무 형을 데려왔습니다, 아버님.”
“무천입니다.”
혁무천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공손락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갑군. 그래, 구경은 잘했나?”
“공손 형이 안내를 잘 해줘서 덕분에 알아보고 싶은 것을 편히 알아봤습니다.”
“듣자하니 능화의 콧대를 부러뜨렸다고 하더군.”
“보기보다 코뼈가 약하더군요.”
“와하하하하!”
공손락이 대소를 터트렸다.
천하의 누가 혈왕동 소주인을 저리 농락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그래서 욕심이 났다.
“자네, 우리 마천문에 들어와서 내 아들과 함께 지내지 않겠나?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어떤 자리라도 주지.”
이미 여러 번 들었던 말이다.
이번에는 혁무천도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생각해둔 일이 있어서 그 일이나 하려고 합니다.”
“호오, 무슨 일을 하려는지 궁금하군. 문파라도 일으키려는 건가?”
“장사 좀 배워볼까 합니다.”
“…….”
공손락은 말이 순간적으로 안 나왔다. 공손두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서 혁무천을 바라보았고.
“장사?”
되묻는 공손락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뜻이 역력했다.
“감히 내 청을 거부하고 장사를 배우겠다? 하하하!”
대소를 터트린 공손락이 웃음을 뚝 멈췄다.
화아아악.
웅혼하면서도 심혼을 억누르는 기세가 공손락에게서 뿜어져 나오더니 혁무천을 짓눌렀다.
“나는 내 말을 거역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네.”
갑작스런 상황에 혁무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공손락은 혁무천을 노려보았다. 치켜뜬 그의 호안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한참 동안 노려보던 공손락은 혁무천이 끄떡도 하지 않자 맥이 빠져서 기운을 회수했다.
“허나… 나에게 즐거움을 주었으니 이번 한번은 용서해주마.”
사천의 제왕처럼 군림하는 마천문이지만 촉산에 웅크리고 있는 혈왕동이 눈엣가시였다.
같은 팔대마세에 속해 있는 만큼 세력도 약하지 않아서 당장 힘으로 밀어낼 수도 없었다.
그런 혈왕동 동주의 아들 코뼈를 주저앉혔으니 혈왕 능전평의 마음까지 상처가 났을 터, 오랜만에 속이 다 시원했다.
“그리고 무슨 장사를 하려는지 모르지만, 그대라면 평범한 장사를 하지는 않을 터. 우리 마천문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손을 거들어주지.”
“감사합니다, 문주.”
혁무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했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공손락의 입에서 약속 하나를 얻어냈으니 득도 적지 않았다.
물론 공손락도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서 한 말이었다.
아들의 말에 의하면 철혈마제가 무천을 욕심냈다고 했다. 무천이 정말 능력이 뛰어난 놈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엮어두어서 나쁠 것 없었다.
“그래, 이곳을 나서면 어디로 갈 건가?”
“중경으로 갈까 합니다.”
“호오, 중경? 장강을 타고 중원으로 돌아가려는 건가?”
“그렇습니다.”
공손락의 눈 깊은 곳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어쩌면 중원에서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군.”
“소식이 들리면 한번 찾아뵙지요.”
“그것도 괜찮겠군. 기다리지.”
혁무천은 마천대전에서 일각을 머문 다음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야 그는 주먹을 풀었다. 얼마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나 있었다.
‘공손락, 과연 사대천마로 불릴 만하군.’
공손락이 조금만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면 자신도 감추어둔 실력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그가 힘을 거두었다.
우연인지 알고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철혈마제 우문강천에게 뒤지지 않는 절대고수라는 것.
전각 안에 남은 공손락도 혁무천이 나간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주 재미있는 놈이야. 두아가 상대하려면 쉽지 않겠어.”
그의 뒤쪽에는 두 사람이 석상처럼 서 있었는데, 그 중 청의를 입고 낯빛이 창백한 사십 대 초반의 중년인이 말했다.
“원하시면 지워버리겠습니다.”
“아직은 그럴 필요 없다. 남자에게 강한 상대가 있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야. 저놈 정도라면 두아가 크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다. 다만… 방해가 된다면 그때는 달리 생각해봐야겠지.”
나직이 말하며 고개를 저은 그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능전평에게 서신을 하나 보내라. 능화가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는지 걱정된다고 말이야. 아주 정중하게 써서 보내. 후후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