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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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54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26화
126화
혁무천이 선수를 쳐서 대답했다.
“배신자 쪽은 아니오.”
‘후우…….’
동대안은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아. 그럼 도망친 자들의 후예?”
“그렇게 보이오?”
“그게 아니라면 광천곡으로 들어가는 길을 그렇게 잘 알 수 없거든.”
동대안은 말을 하면서도 혁무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별들이 떠 있는 혁무천의 눈 속에서 뭐든 캐내고 말겠다는 듯.
“아주 오래 전에 조부께서 광천곡에 사셨소. 그래서 들어가는 길을 알았던 거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시대가 차이 있을 뿐.
동대안은 그 말을 순순히 믿어주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광천곡을 자연스럽게 돌아다닌 것 역시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라도 혁무천에 대한 의문을 털어내 버리고 싶었다. 안 그러면 아무래도 제 명에 죽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랬군. 어쩐지…….”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자 곤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계곡 안쪽에서 어디로 사라졌던 거지? 내가 빤히 보고 있었는데 사라져버렸거든.”
혁무천은 그쯤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부님과 나만 아는 곳이 있소. 갔던 김에 그곳에도 가봤소. 아마 그 바람에 내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거요.”
그러고는 몸을 돌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곳에 남겨진 것은 내가 모두 가져왔으니 가봐야 텅 비어 있을 거요.”
동대안은 멀어지는 혁무천을 등을 보고 콧등을 씰룩였다.
‘지미, 샅샅이 뒤져볼 걸.’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시 길을 떠났다. 촉도를 통과하려면 아직도 사흘은 더 가야 했다.
이틀 동안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늘은 시퍼런 물을 들이부은 듯 맑았고, 바람은 가슴을 훑고 갈 정도로 산들거렸다.
거기다 촉도의 경치까지 끝내줬다.
그런데 절벽에 매달린 십리 잔도(棧道)를 통과한 표행이 광원을 사십 리 정도 남겨 놓았을 때였다.
그들이 나타났다.
***
우거진 숲에서 느긋하니 걸어 나온 자들은 사십여 명쯤 되었다.
육십 대 노인 둘, 사오십 대 중년인 셋이 포함된 그들은 북현문 무사들에 비해서 숫자는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압감을 느끼게 했다.
표행도 상대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그들과의 거리를 십 장쯤 남겨 놓고 멈추었다.
“혈왕동……. 저자들이 왜……?”
송비가 이마를 찌푸리며 심각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늘어선 자들은 대부분 핏빛의 붉은 무복을 입고, 머리에 역시 붉은 무사건을 쓰고 있었다.
강호에 널리 알려진 혈왕동의 전통적인 복장이었다.
그들 중 뒷짐을 지고 있던 노인 하나가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킬킬킬, 쌍괴 늙은이의 혼을 뺀 놈들 중에 눈알이 콩알만큼 작은 놈이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군.”
노인은 붉은색이라기보다 갈색에 가까운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나이는 육십 대 중반 정도. 백발에 턱이 뾰족한 얼굴, 키는 작았는데, 쭉 찢어진 눈에서 번뜩이는 눈빛만큼은 독사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독랄하게 느껴졌다.
“으으음, 혼살마 소원계까지 나오다니…….”
송비가 노인의 정체를 알아채고 침음을 흘렸다.
소원계 뿐만이 아니었다.
역시나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다른 노인도 소원계에 뒤지지 않는 고수였다.
그리고 말없이 서 있는 중년인 중에도 송비의 눈매를 파르르 떨리게 만드는 고수가 있었다.
“설마… 천잔신마 조릉?”
무표정한 얼굴에 탄탄하게 느껴지는 체구. 우뚝 서 있기만 한데도 존재감을 내보이는 자.
언젠가 들었던, 혈왕동의 오행혈마 중 하나인 천잔신마(天殘神魔)가 분명해 보였다.
혈왕동에서도 천구문의 보물을 노리고 있단 말인가?
그 보물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혈왕동과 혁무천 일행 사이에 벌어진 사건을 잘 모르는 그로서는 도무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노인네는 콩알이라고 하니 다행이군. 어떤 놈은 쥐똥 같다고 하던데.”
동대안이 소원계의 말을 살짝 비꼬며 받아쳤다.
‘어떤 놈’이라는 말은 곧 소원계 당신도 ‘놈’일 뿐이다. 라는 뜻이었다.
혈왕동의 사람들은 물론 북풍표국 표사와 혁무천 일행도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실소를 흘렸다.
자신의 눈을 스스로 쥐똥이라고 하다니.
이제 그 정도 모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가?
하지만 소원계는 웃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눈이 콩알만 한 놈의 검이 꽤 사납다고 하더구나. 그러던 차에 마침 너희들에 대한 소식이 들어오기에 이곳에 왔느니라.”
촉산에는 혈왕동의 귀와 눈이 사방팔방에 깔려 있었다.
북현문과 북풍표국의 싸움 역시 그들의 정보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북현문과 싸운 자들 중 몇 명의 인상착의가 쌍마괴와 능화에게 모욕감을 준 자들과 비슷하다지 않는가 말이다.
특히나 세 사람에 대한 인상착의는 거의 같았다.
콩알처럼 작은 눈을 가진 장한, 절세미녀만큼이나 준수한 청년, 그리고 태산만큼이나 큰 거구의 청년.
혈왕동의 정보망에 그들이 걸리자, 혈왕동주는 즉시 그들을 잡아오라고 했다.
그 바람에 장로 셋과 빈객 둘이 사십여 명의 정예무사를 이끌고 달려온 것이었다.
다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 쌍마귀와 능화가 자존심 때문에 열 중 셋을 빼놓고 말했다는 걸.
“너희들을 죽이려는 건 혈왕동의 땅바닥에 떨어진 위신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그 말에 동대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마음대로 될까?”
“킬킬킬, 역시 겁이 없는 놈이구나. 하지만 너희들은 산신이 직접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혁무천이 또 다른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는 처음부터 그 노인만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청색 장포를 걸치고 칼을 옆구리에 찬 노인은 키가 제법 컸다. 그런데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무료한 표정이었다.
문제는 그 노인이 이곳에 온 혈왕동 사람들 중 가장 강하다는 것이었다. 혁무천조차 긴장해야 할 만큼.
“뭘 말이냐?”
“산신이 아니면 우리를 구해줄 수 없다는 말, 말이오.”
“운이 좋으면 살아서 지나갈 수 있겠지.”
“그거 참 다행이오. 나는 운이 무척 좋은 편이니까 말이오.”
“너야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까지 운이 좋으란 법은 없겠지.”
“그럼 내 운을 나누어주도록 하지요.”
노인의 입술이 수염 사이에서 길게 늘어졌다. 눈가에도 주름이 깊어진 걸 보니 웃음을 짓고 있는 듯했다.
혁무천도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군요.”
“맞다. 제법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소원계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 형, 이번 일의 수장은 나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물론이지. 하지만 자네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말게.”
“킁. 알겠으니 지 형은 그 애송이나 데리고 노시구려.”
소원계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등에서 길이가 짧고 면이 넓은 도를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붉은 무복을 입은 혈왕동 무사들도 좌우로 퍼지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지금이라도 마혈을 스스로 제압하고 무릎을 꿇는다면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거다. 동주께서도 너희들에게 관심이 많거든.”
오십 대 초반의 중년인, 천잔신마 조릉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기형검이 들려 있었다. 그에게 천잔신마라는 별호를 선사한 독문무기 천잔마검이었다.
그가 검을 가볍게 흔들자 촤르르르, 하는 기음과 함께 검기가 넘실거렸다.
동대안이 그의 검을 보며 눈을 치켜떴다.
“무천, 저자는 내가 상대하겠어.”
혁무천은 그의 말과 표정에서 둘 사이에 뭔가가 있음을 눈치 챘다.
천잔신마 조릉도 광천곡의 배신자 중 한 사람이거나, 동대안의 사부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사실이 그랬다. 동대안은 조릉의 검을 보고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사부의 몸에 나 있던 깊은 상처는 끝이 둘로 갈라진 무기에 의한 것이었어.’
조릉이 지닌 기형검이라면 충분히 그런 흔적을 남길 듯했다. 게다가 그런 기형 무기를 가진 자 중 사부를 이길 정도의 고수가 몇이나 되겠는가.
“당신, 광천곡 알지?”
동대안의 갑작스런 질문에 조릉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재미있군. 이곳에서 광천곡을 아는 놈을 만나다니.”
“광천곡을 알면 이것도 알겠군!”
쉭!
동대안은 섬혼을 빼는 것과 동시에 튕기듯 몸을 날리며 조릉을 공격했다.
오 장의 거리가 눈 깜짝할 순간에 좁혀지고,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검을 뻗었다.
“아하! 이제 보니 그 악바리 영감의 제자였군!”
동대안은 그 말만으로도 자신의 짐작을 확신하고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
혁무천이 그 모습을 보면서 지시를 내렸다.
“대산, 네가 장평과 함께 소원계라는 노인을 상대해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장대산과 장평이 앞으로 나섰다.
장대산도 오늘만큼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만큼 소원계가 주는 중압감이 컸다.
“킬킬킬, 덩치가 커서 고기 써는 맛이 있겠군. 와 봐라, 곰 같은 놈아!”
소원계가 살벌한 말을 하며 칼을 흔들었다.
장평이 먼저 땅을 박차고 공격에 나섰다.
장대산이 장봉을 불끈 쥐고 바짝 붙어서 뒤따라갔다. 덩치는 곰 같지만 움직임은 제비처럼 날렵(?)했다.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인 둘과 붉은 무복을 입은 혈왕동 무사들도 전진하는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혁무천은 그 광경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중년인들은 송비와 영추문, 목량과 강탁이 맡으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혈왕동 무사들이다.
표사들이 제법 강하긴 하나 그들만으로는 혈왕동 무사들을 막을 수 없다.
그나마 한유림은 절정고수인 구원이 지키고 있으니 당분간은 버티겠지만, 그 역시 시간 싸움이 될 것이다.
‘오 초식, 그 안에 저들의 숫자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아니면 고수의 숫자를 줄이든지.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팔성 이상의 공력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씨 성을 가진 노인이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도적인 침묵인지, 아니면 기회를 노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잠깐 생각하는 사이 송비와 영추문, 목량과 강탁이 적들과 뒤엉켰다.
혈왕동 무사들도 지척까지 밀려왔다.
북풍표국의 표두인 이현강이 악을 쓰듯 외쳤다.
“모두 뭉쳐서 방어에 치중하면서 적을 막아라! 흩어지면 죽는다!”
표사들은 거리를 좁히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적을 맞이했다.
곧 혈왕동 무사들이 표사들을 공격했다.
동시에 혁무천의 신형이 죽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느새 혈왕동 무사들의 선두를 코앞에 두었다.
츠릉, 쉬아악!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검세가 대기를 횡으로 갈랐다.
천망검에서 무려 일 장이나 뻗어나간 가공할 검기는 대기뿐 아니라 혈왕동 무사들마저 갈라버렸다.
선두에서 공격해오던 무사 넷이 급살이라도 맞은 듯 몸을 움찔 떨더니 그대로 꼬꾸라졌다.
내부를 갈라버렸기에 피는 나오지 않았다.
혁무천은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고 대천룡구검세 중 마룡단천세를 펼쳤다.
콰아아아아!
검기가 용틀임하면서 혈왕동 무사들을 덮쳤다.
혈왕동 무사들은 자신들이 감히 맞상대할 수 없는 가공할 검세를 접하고 공포로 인해 몸이 굳어버렸다.
순간, 죽음의 검기가 무사 다섯의 혈맥을 갈가리 파괴했다.
피하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었다.
누가 도와줄 수조차 없었다.
“컥!”
“크악!”
단말마를 내지른 무사들이 튕겨져 나가며 나뒹굴었다.
그제야 지켜만 보던 노인이 대지를 박차고 혁무천 쪽으로 날아들었다.
“나와 놀자꾸나!”
어느새 빼든 그의 도에서 시퍼런 도기가 일렁이며 채찍처럼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