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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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0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25화
125화
구원은 불길이 이는 눈으로 육가경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지.”
“그 물건만 내놓는다면, 당신과 한가 애송이의 목숨을 살려주겠소. 마지막 기회이니 잘 생각해 보시오.”
“개소리 집어 치우고, 네 맘대로 해봐라, 이놈.”
“설마 표사들이 당신을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글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푸하하하, 마령일노 구원이 드디어 노망이 든 모양이군.”
대소를 터트린 육가경이 혁무천 일행 쪽을 쳐다보았다.
“듣자하니 어젯밤 대단한 고수가 당신을 도와줬다고 하던데, 오늘은 새파란 애송이들과 별 볼일 없는 삼류표국의 표사들밖에 없군.”
그때 동대안이 무천에게 물었다.
“어이, 무천. 언제까지 저 헛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지?”
“아마 저들도 오래 기다리지는 못할 거요. 원래 인내심이 바닥인 자들이어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육가경이 눈을 치켜떴다.
“이런 건방진 놈들! 네놈들도 저승으로 보내주마!”
반원형으로 포위하고 있던 북현문 무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들었다.
육가경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이 소리쳤다.
“만리표국 사람들은 이 일과 상관없거든 뒤로 물러서라!”
종화승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북풍표국과 함께 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뒤로 빠지면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북현문과 싸울 수도 없는 일. 진퇴양난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임근이 그의 마음을 눈치 채고 다급히 말했다.
“대표두, 이 일은 산적과의 싸움과 다릅니다. 북현문과 북풍표국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 같으니 우리는 일단 물러서지요.”
종화승은 그 말을 듣고도 자존심과 임무 사이에서 갈등하며 바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눈치 챈 송비가 냉랭히 말했다.
“물러서게. 저 친구 말대로 이 일은 우리 표국이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종화승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 혁무천 일행이 앞쪽으로 나섰다.
혁무천이 중앙에 서고, 장평과 장대산, 동대안이 우측에, 목량과 강탁, 영추문이 좌측에 섰다.
<절벽을 등지고 있으시오.>
혁무천이 전음을 보내자 구원과 한유림은 절벽 쪽으로 이동했다.
“쳐라!”
육가경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 북현문 무사들이 북풍표국 표사들과 혁무천 일행을 향해 일제히 쇄도했다.
먼저 장평과 장대산, 동대안이 달려드는 적을 정면으로 맞이했다.
동대안의 손에서 빛이 번쩍하는가 싶더니, 제일 앞장서서 달려들던 자가 흠칫하더니 맥없이 꼬꾸라졌다.
털썩.
땅바닥에 머리가 처박히자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상대의 목을 관통하고 빠져나온 섬혼이 다음 먹이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장평의 도가 허공을 갈지자로 갈랐다.
불필요한 동작은 모두 배제한, 철저하게 효과적인 칼질이었다.
칼이 흐르는 동선은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간결했고,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했다.
그 동선에 있던 북현문 무사의 팔도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잘린 팔이 빙글 돌며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진 곳에서 피가 뿜어졌다. 그 와중에도 장평의 칼은 상대의 목을 갈라버렸다.
그때쯤,
콰광!
굉음이 터져 나오고, 장대산의 장봉이 북현문 무사 둘을 날려버렸다.
장대산은 전처럼 무작정 정면대결을 벌이지 않았다.
피부는 도검을 맞아도 끄떡없지만, 옷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공격을 몸으로 감당하다 옷이 찢어져서 새로 산 것만 다섯 번째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성격과 맞지는 않지만 상대와 싸울 때 신법을 펼치기로 했다.
그런데 그가 익힌 신법이 구름 위를 걷듯 부드러운 유운신법이었다.
곰보다 큰 장대산의 거구가 부드러운 신법을 펼치는 광경은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인 북현문 무사들에게는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기다란 장봉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날아드는데, 스쳐가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하물며 몸놀림까지 따라잡기가 힘드니 싸울 의욕조차 나지 않았다.
목량과 영추문, 강탁도 각기 서너 명의 적을 상대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북현문 무사들은 제대로 대항조차 못해보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날개를 태우고 바닥으로 떨어진 불나방이 따로 없었다.
송비와 북풍표국 표사들 역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적을 상대했다.
커다란 칼을 든 송비는 정말 장비 같았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렸다.
표사들도 삼류무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기 두세 명의 적을 상대하면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텁석부리인 표두 이현강은 셋을 상대하면서도 우세를 보일 정도였다.
한편,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만리표국 사람들은 넋이 반쯤 빠진 표정이었다.
그들의 앞에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싸움이 벌어진 지 반의반각도 되지 않아서 오십여 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모두가 북현문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진 피로 인해 공터가 핏빛으로 변하고, 비릿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반면 북풍표국 표사들은 두어 명만 부상을 입었을 뿐, 쓰러진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삼류 표국의 국주가 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일 줄이야!
게다가 오합지졸처럼 생각했던 표사들은 또 어떤가.
특히 임시표사들은 보는 이를 질리게 만들었다.
그들은 양 떼 속에 뛰어든 호랑이 같았다.
만약 저들이 조금 전 자신들이 한 행동과 말에 기분이 상해서 화풀이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입안이 바짝 마르고,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특히 임근은 안색마저 창백해졌다.
결국 북현문의 부문주 육가경이 동대안의 섬혼을 상대하다가 몸에 구멍이 두 군데나 난 후 정신없이 물러섰다.
“모두 후퇴해!”
온몸이 피로 물든 육가경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때는 이미 혼자 힘으로 후퇴할 수 있는 사람이 이십여 명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혁무천 일행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치열한 혈투가 벌어진 지 일각.
공터에서는 북현문 무사들의 고통에 찬 신음만 흘렀다.
“상처를 치료해라. 이각 후 출발한다.”
송비가 표사들을 향해 말했다. 북풍표국 표사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몸에 난 상처를 치료했다.
“산호, 너는 즉시 한중으로 돌아가서 백호방의 양 형을 만나라. 사정을 설명하고, 북현문이 허튼 짓 못하게 나서달라고 해. 그 대가로 내가 그 인간이 십 년 동안 원하던 것을 준다고 하면 마다하지 않을 거다.”
송비의 말에 마른 몸매의 표사가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국주.”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현문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표행을 공격했으니 잘못한 것은 그들이지만, 세상일이란 게 잘잘못에 의해서만 흘러가는 법이 아니었다.
백호방은 한중 일대 최대의 방파. 그들이 나서준다면 북현문도 함부로 날 뛸 수 없을 것이다.
표사들이 치료를 하고 있는데, 종화승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와서 금창약을 건넸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국주.”
송비는 그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미안해 할 것 없네. 말했다시피 조금 전 싸움은 우리와 북현문 사이의 일이었으니까.”
그 말에 종화승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워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북현문 쪽 부상자들은 자네들이 치료해주게. 그래야 나중에 할 말이라도 있을 것 아닌가?”
“……예.”
***
만리표국과 북풍표국의 상부상조는 반 시진 만에 끝이 났다.
부상자를 대충 치료한 북풍표국은 만리표국 사람들을 남겨두고 공터를 출발했다.
구원과 한유림의 표정은 아침보다 훨씬 편해 보였다.
그러나 송비의 표정은 그리 밝지가 않았다.
기분이 상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씨바, 이 기회에 조카들하고 함께 강호나 돌아다닐까?’
한중으로 돌아가게 되면 북현문에게 시달림을 당할 게 뻔했다.
아니, 시달림 정도로 끝나지 않고 복수를 하겠다며 몰려올지도 몰랐다.
물론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옛 친구인 백호방 방주 양문척에게 말해두었으니 아무리 북현문이라 해도 대놓고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억눌렀던 역마살이 꿈틀거리며 가슴 깊은 곳에서 기어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좋아했던 여자가 역병에 걸려 죽은 후 한중에 처박혀 산 지 이십 년 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참 오래 참았네.’
그날 밤은 동굴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촉도에는 간혹 동굴이 있어서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비도 막고, 바람도 막고, 이슬도 피하고. 거기다 도적으로부터 물건을 지키기에 편하니 동굴보다 좋은 휴식처는 없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다 보니 바닥에 두터운 풀도 깔린 곳이 많았다.
그들이 동굴에 도착했을 때는 십여 명 정도 되는 두 무리의 선객이 있었다.
두 무리 모두 상인들이었는데, 호위무사로 보이는 자들도 여섯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동굴이 커서 상관하지 않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더구나 선객 덕분에 불을 피우는 수고도 덜 수 있었다.
“저기, 무천. 잠깐 나 좀 보세.”
동대안이 머뭇거리며 혁무천을 부른 것은 반달이 중천에 걸려 있던 자시 무렵이었다.
마른풀 위에 누워있던 혁무천이 일어나서 동대안을 따라 나섰다.
몇 사람이 눈만 돌려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동대안은 동굴을 나와서도 한참을 걸어가더니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서 멈춰 섰다.
혁무천이 그의 뒤 일 장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동대안이 홱 돌아섰다. 그러고는 혁무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작은 눈에 달빛이 반사되어서 반짝반짝 빛났다.
혁무천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내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있네.”
혁무천은 옆에 있는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태연한 그의 표정을 바라보던 동대안은 입술이 바짝 말랐다.
“말해보시오. 뭘 알고 싶소?”
혁무천이 그렇게 묻는데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간이 오그라드는 듯했다.
‘아, 젠장! 모르고 있는데 괜히 말하는 거 아냐? 그만둘까?’
동대안의 마음이 오락가락 하고 있는데, 혁무천이 먼저 물었다.
“언제 그렇게 된 거요?”
“응? 뭐가?”
“광천곡 말이오.”
“……!”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그거 말해주려고 부른 거 아니었소?”
떨어진 심장이 다시 붙었다.
“어? 어, 그, 그랬지.”
이게 아닌데…….
하지만 생각해보니 지금이 더 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이십오 년쯤 되었네. 광천곡이 그렇게 된 게.”
“꽤 됐군.”
“곡주께서 돌아가시자, 세상으로 나가자는 사람들과 광천곡을 지키자는 사람들. 둘로 나누어져서 피터지게 싸웠지.”
“세상으로 나가자는 사람들이 이겼나 보군.”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동대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들이 졌어. 그런데 그 바람에 일이 더 커졌어.”
“외부의 힘을 끌어들였나보군.”
“맞아. 신임 곡주를 따르던 사람들이 마천문의 힘을 빌려서 대장로파를 공격했지.”
혁무천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배신자들은 물론이고, 대장로를 따르던 사람들 중 일부도 살기 위해서 몰래 곡을 떠났어. 그러다 보니 남은 사람들 역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광천곡을 떠나 거처를 옮겨야만 했지.”
동대안의 말을 듣고 있던 혁무천이 그 말에 이마를 좁혔다.
그럼 광천곡 사람들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말 아닌가 말이다.
“그 후로는 광천곡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마천문 놈들이 주기적으로 광천곡을 감시했거든. 오 년 전까지.”
가는 길에 마천문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아야 할 것 같다.
말로 안 되면 검이라도 들고서.
“광천곡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남아 있소? 후예가 있을 것 같은데.”
“다섯.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노인이고, 젊은 사람은 나 혼자만 남았어.”
“동 형 혼자?”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배신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어.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 바람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 사부도 그래서 부상을 당했고.”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큰 미련은 없었기에 쓴웃음을 지으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그때 동대안이 물었다.
“그런데… 무천은 어떻게 광천곡을 아는 거지? 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