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1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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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1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106화
106화
이번에는 또 다른 노인이 눈을 치켜떴다.
검은 수염 한가운데로 하얀 수염이 자란 노인이었는데, 얼마나 말랐는지 문득 백면사신이 떠올랐다.
그 역시 팔대장로 중 하나로, 죽령일노 마진요란 노인이었다.
“노인네들이 이해력이 부족하군. 싫으면 그만하자는 말이 그렇게 이해하기 어렵소?”
“이놈이!”
마진요는 원평문이나 나증보다 인내심이 약했다.
바닥을 찬 그가 혁무천을 향해 날아가며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구부린 오른손을 뻗었다.
혁무천은 슬쩍 몸을 사선으로 틀며 마진요의 일수를 피했다.
순간, 마진요가 앞으로 뻗던 손을 옆으로 꺾었다.
혁무천도 다시 한 번 몸을 틀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마진요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이오. 한 번 더 공격하면 후회할 거요.”
“오냐, 이놈! 어디 한 번 해봐라!”
마진요는 왼손까지 뻗어서 혁무천을 공격했다.
후우웅!
응축된 진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휘돌며 대기마저 비틀었다. 잡히면 무쇠도 부술 만큼 강력한 기운이 혁무천을 뒤덮었다.
혁무천은 무심하게 굳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서 원을 그렸다.
단순한 원이 아니었다. 손 그림자가 겹겹이 그물처럼 퍼져나갔고, 그 그물에 마진요의 손목이 걸렸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마진요가 혁무천의 손에 고의로 잡혀주는 듯했다.
하지만 진심은 그렇지 않은 듯 마진요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혁무천은 세 손가락으로 움켜쥔 마진요의 손을 가볍게 밀었다.
쿵쿵쿵!
소리를 내며 세 걸음 물러선 마진요는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손목을 주물렀다. 잡힌 손목이 뼛속까지 욱신거렸다.
“이번에는 보주의 체면을 봐서 손목을 부러뜨리지 않았소만, 다음에는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이……!”
이를 악다문 마진요가 검병을 쥐고 검을 뽑았다.
츠릉.
하지만 세 치쯤 뽑다 말고 멈췄다.
혁무천의 좌수 엄지가 검의 고동을 슬쩍 밀었다. 틱, 소리와 함께 검이 한 치 정도 빠져나왔다.
그게 전부인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화아아악!
한 마리 거대한 묵룡이 자신을 덮치는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자신이 검을 뽑으면 그 묵룡이 벼락처럼 날아들 것만 같았다.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천룡일기세의 기수식이 그의 심혼을 짓누른 것이다.
그때 율이명이 나섰다.
“됐습니다. 마 장로, 검을 넣으시지요.”
마진요는 입을 꾹 다문 채, 짐짓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넣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뭐야, 저 자식?’
다른 사람들을 보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었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래서 더 께름칙했다.
“그쯤하면 된 것 같네만.”
율이명의 시선이 이번에는 혁무천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처음부터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소. 하지만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하지도 않을 거요.”
“뭐 어쨌든… 만 냥은 솔직히 많네. 다른 방법으로 지불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그게 뭔지 말해보게.”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혁무천의 답변은 거침이 없었다.
“언제든 그에 해당하는 만큼의 인원을 빌려주시오. 물론 검마보에 이득이 된다는 생각이 들 때 빌려주면 되오. 손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 때는 빌려주지 않아도 되오.”
그런 조건을 내걸 줄은 생각지 못한 듯 율이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우리에게만 너무 좋은 조건 같군.”
“기왕이면 서로 이득이 되는 게 좋지 않겠소.”
율이명은 혁무천이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좋아, 그런 뜻이라면 받아들이지.”
이번에는 백리양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에게는 어떤 조건을 거실 거요?”
“비룡장에 은자 만 냥은 큰 부담이 안 될 텐데?”
“우리라 해서 돈을 쌓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오.”
“당장 한꺼번에 달라는 건 아니야. 나중에 필요한 만큼씩만 주면 돼. 아니면 그 가치만큼의 다른 것으로 줘도 되고. 예를 들면 정보라든가…….”
앞으로 상황에 따라 많은 자금이 필요할 수도 있다. 정보가 필요할지도 모르고.
비룡장의 신용이라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이 가진 정보가 그 정도 가치가 된다면 받아들이겠소.”
“당연하지. 가치도 없는 정보를 비싸게 파는 것은 사기꾼이나 할 짓이야.”
율이명이 그쯤에서 본론을 꺼냈다.
“그럼 이제 말해보게. 복우산에서 벌어진 일 뒤에 뭐가 있었던 거지?”
“사라졌던 정파의 비전 무공이 세상에 나왔소.”
잠시 의아해하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경악이 물결쳤다.
“맙소사…….”
“으으음, 그랬군.”
“그게… 사실이오?”
백리양이 벌게진 얼굴로 재차 확인했다.
“물론이지. 복우산의 싸움은 정은맹이 얻은 정파의 비전무공을 차지하기 위해서 벌어진 거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백리혜가 뾰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역시 복우산에 갔었으니까. 사실이 아니면 돈을 두 배로 물어내겠다.”
백리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혁무천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후우우우, 그 사실이 알려지면 강호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겠군요.”
“이미 시작되었어.”
“그렇군요. 복우산에서 그것 때문에 싸운 거라면……. 그런데 당신이 가진 정보가 그게 전부라면 만 냥은 너무 비싸요. 냉정히 따지면 오천 냥 정도 가치밖에 없어요.”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지. 그런데 나머지 정보에 대해서 그대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백리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수는 없었다.
“감당… 할 수 있어요. 어디 말해보세요.”
혁무천이 율이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언 중 ‘귀하는?’이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말해보게. 우린 철혈마련을 두려워하지 않네.”
혁무천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검마보에는 철혈마련에 없는 역사와 전통이 있었다. 무력으로는 뒤질지 몰라도 자존심은 뒤지지 않았다.
혁무천이 백리혜를 보며 핵심적인 부분을 말해주었다.
“우문척이 복우산 싸움에서 정파의 비전무공 중 열 가지 정도는 챙겼다.”
“아…….”
백리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사람들도 경악과 욕망으로 얼룩진 표정이 되어서 혁무천을 주시했다.
“그는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걸 원치 않을 거다.”
“왜죠?”
“다른 팔대마세에서 그 사실을 알면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으으음, 나누어 갖고 싶겠죠.”
“그러니 철혈마련은 그 사실을 발설한 자들을 곱게 보지 않을 거다. 다시 말해서, 오늘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철혈마련과 적이 될 소지가 커졌다고 할 수 있지.”
백리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의 말, 충분히 이해해요.”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사람들은 아직 우문척과 철혈마련의 무서움을 알지 못한다. 아마 그가 날개를 펴면 세상이 피의 폭풍에 휘말릴 거다.”
그때 율이명이 물었다.
“우문척이 그토록 뛰어난 자인가? 듣기로는 우문양이 더 낫다고 하던데.”
“우문척이 천장 지하에 웅크린 마룡이라면, 우문양은 뒷산의 곰일 뿐이오.”
혁무천의 비유에 율이명은 문득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좋은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조금 전부터 목구멍 안에서 맴돌고 있는 질문을 꺼냈다.
“자네는… 철혈마련과 싸울 생각인가?”
“아직은 뭐라 말할 수 없소. 무사는 입이 아닌 검으로 말하는 법. 말로 떠들어 놓고 검을 들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 아니오?”
“……!”
율이명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무사는 입이 아닌 검으로 말한다? 멋진 말이야. 그런데… 어디서 들어본 말 같군.”
그럴 것이다. 율항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니, 후손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지도.
동대안이 입을 연 것은 그때쯤이었다.
“근데… 언제까지 세워둘 거요?”
따분하기만 했다.
다 아는 이야기를 뭐 그리 줄줄 늘어놓는지…….
율이명이 그를 보고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말했다.
“눈이 정말 크군.”
눈이 작다는 것을 비꼰 것이지만, 동대안은 그 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비꼬듯 뭐하든 자신의 눈을 크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작은 눈을 나름대로 크게 뜬 그가 율이명을 정면으로 꼬나보았다.
“오호!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분을 만났군. 우리 언제 검 한번 맞대 보겠수?”
율이명은 그제야 또 다른 강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혁무천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을 뿐, 자신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을 듯했다.
그는 식었던 피가 동대안의 말에 다시 끓자, 식기 전에 결정을 내렸다.
“나중으로 미룰 거 뭐 있나? 지금하면 되지.”
비무라면 밥 먹는 것도 미룰 정도로 좋아하는 율이명이었다. 상대가 먼저 달려드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동대안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진짜 마음에 드는군. 어디든 가자고.”
“따라오게.”
율이명과 동대안은 대검마전의 뒤에 있는 소연무장에서 일각 동안 비무를 펼쳤다.
율이명의 검은 변화가 적은 대신 무거웠고, 동대안의 검은 빠르고 변화가 많았다.
처음에는 동대안의 특이한 검법에 율이명이 고전하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승부는 삼십삼 초식 만에 율이명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승리한 율이명도 비무 중 몇 번이나 서늘해진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동대안의 섬혼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어찌나 빠른지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감각으로만 상대할 수 있을 뿐.
아마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면 율이명도 고개를 저을지 몰랐다.
어쨌든 그 승부 이후… 두 사람은 정말로 친구가 되었다.
“이봐, 대안. 하나 물어보지. 자네의 그 검법, 혹시 사십여 년 전 이후 맥이 끊겼다는 광혼검 아닌가?”
비무가 끝난 후 율이명이 묻자, 동대안은 눈알을 굴렸다.
지금까지 그는 혁무천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광천곡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혁무천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그렇다고 친구가 되기로 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어…… 맞아.”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혁무천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았다.
이전과 눈곱만큼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심지어 호기심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면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씨바, 저 인간, 혹시 전부터 내가 뒤따라온 걸 알고 있었던 거 아냐?’
***
그날 밤.
율이명은 진이향을 불러서 사실을 물어보았다.
진이향은 처음에만 해도 자신이 겁탈을 당할 뻔했다고 주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목소리가 약해졌다.
그러다……
“사실을 말하면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용서해줄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면, 밝혀질 경우 너뿐만 아니라 네 가족까지도 어려움을 겪게 될 거다.”
율이명이 그렇게 말하자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숙이고 사실을 털어 놓았다.
“그냥… 선 가가를 좋아해서… 그랬던 거예요.”
“알았다. 그만 네 방으로 가라. 한 동안 외출은 자제하고.”
차가운 율이명의 목소리에 진이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방을 나섰다.
하지만 방을 나선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치켜떴다.
‘흥! 두고 봐. 내가 그냥 물러설 줄 알고?’
진이향을 내보낸 율이명은 허공에 초점을 두고 응시했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심장에 이상이라도 생긴 듯하다.
흥분? 쾌감?
아니,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다.
갈망!
세상을 향한, 천하를 향한, 무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런 열망이 아닐까 싶다.
그 자.
무천이라 했던 자. 그와 마주서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금, 불길이 되어서 온몸을 누비고 있다.
“어쩌면… 검마보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왜 이렇게 흥분되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때 그가 찾아왔다.
“보주께 아룁니다. 무천이란 자가 찾아왔습니다. 돌려보낼 것인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밖에서 들리는 말에 율이명은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했다.
겨우 참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인 그는 탁자 한쪽에 있는 책을 앞에 가져다 펴놓고, 목에 힘을 주어 명을 내렸다.
“험, 안으로 들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