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천화 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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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3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귀환천화 34화
34화
“말해 봐. 언제, 어디서 봤지?”
“그들이 이틀 전 아침에 이령산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령산장은 천보장, 검화문과 함께 항주의 삼대 세력 중 하나다.
만약 그들이 아직도 이령산장에 있다면 많은 피를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아직도 이령산장에 있나?”
“그날 오후에 떠났습니다요!”
***
혁무천은 흑구회의 건달들을 풀어주고 항주를 나섰다.
이령산장에 가볼까 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포기했다. 철혈마련 사람들이 이미 떠났다면 아까운 시간만 소모할 뿐.
항주를 나선 그는 북쪽을 향해 길을 잡았다.
누군가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자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해도문에서 본 자였다.
‘엽기천이라고 했던가?’
왜 따라오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일을 방해하지 않으니 그냥 놔두었다.
그러한 동행은 항주를 나선 이후로도 백 리를 가도록 이어졌다.
앞장서서 걷던 혁무천은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엽기천 역시 뒤만 따라갔다.
참으로 기이한 동행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서로를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태호 남단의 수로를 건너는 나룻배에서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했다.
“문주라는 자가 따라가라고 하던가?”
“해도문의 일은 그만 두었네. 진즉부터 그만두고 싶었는데, 자네 덕분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지.”
“그런데 왜 하필 날 따라온 거지?”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 같아서. 신경 쓰이면 말하게. 더 멀리 떨어져서 갈 테니까.”
“신경 쓰일 건 없어. 어차피 당신은 나에게 어떤 위협도 안 되니까.”
엽기천의 얼굴이 묘하게 이지러졌다.
젠장!
나이도 어려보이는 자에게 그딴 소리를 듣다니.
‘진짜 오만하군.’
그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꾹 참았다.
상대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자였다.
숨을 몇 번 들이쉬어서 상한 자존심을 다독인 그가 말을 돌렸다.
“찾고 있는 여인과는 어떤 사이인가?”
“내 동생.”
혁무천이 짧게 대답하고 강 건너편 갈대밭을 바라보았다.
갈대가 은빛을 뿌리며 바람을 따라 춤추고 있었다.
은설과 함께 있었으면 정말 낭만적인 여행일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철혈마련을 향한 분노의 불길이 더욱 커졌다.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그 외딴 섬까지 찾아와서 은설을 끌고 갔단 말인가.
끌고 갔으면 무사히 데려갈 것이지 왜 바다에 빠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들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엽기천은 섬뜩한 한기가 송곳처럼 모공을 파고들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들이 여동생을 겁탈하기라도 했나?’
어쩌면 그 후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렇게 분노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철혈마련에 가려는 건가?”
그는 조심스럽게 넘겨짚어 보았다.
혁무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철혈마련에서 비무대회를 연다는 건 아나?”
“비무대회?”
“모르는가 보군. 철혈마련에서는 삼 년마다 한 번씩 마룡선발대회를 열지. 우승자는 무림의 보물을 부상으로 받고, 철혈마련에 가입하길 원한다면 당주급 지위에 임명되네.”
슬쩍 혁무천을 살펴본 엽기천이 마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승자가 총각일 경우 또 다른 상이 내려진다더군. 다름이 아니라, 련주에게는 혼기가 찬 딸이 있는데, 우승자를 딸의 배필로 삼을 거라 하네.”
“상이 아니라 벌이 될 수도 있겠군.”
만약 철혈마련 련주의 딸이 추녀거나 악녀라면 우승자로선 악몽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거네. 강동일화(江東一花) 우문소소는 무림삼화(武林三花) 중 하나로 명성이 높은 절세미인이니까. 그래서 지금 강호의 청년고수들 중 내로라하는 자들이 모두 철혈무련으로 달려가고 있지.”
혁무천은 냉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관심 있나?”
“강호의 무사치고 강동일화에게 관심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나는 관심 없어. 그녀가 아무리 미녀라도. 나는 그저 동생에 대한 소식만 들으면 돼.”
“그들이 순순히 알려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그들은 알려줘야 할 거야. 알려주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
“그대가 강하다 해도 상대는 철혈마련이네. 혼자 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혁무천은 고개를 돌려 엽기천을 바라보았다.
“원래 그렇게 말이 많은가?”
“…….”
엽기천은 본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혁무천과 마주하고 있으니 말이 많아진 것일 뿐.
엽기천 본인도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이마를 찌푸렸다.
“나도 말 많은 건 좋아하지 않네.”
툭 쏘듯 변명 아닌 변명을 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혁무천이 그런 엽기천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입꼬리가 비틀어진 걸 보면 조소 같긴 한데, 눈빛이 워낙 차서 엽기천은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혼자 가서 뭘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나?”
“…….”
“아마 만족할 만한 답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매일 밤 지독한 악몽을 꾸게 될 거야.”
참으로 오만한 말. 과대망상에 빠진 정신병자로 취급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자였다.
그럼에도 엽기천은 혁무천을 비웃지 못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칼날의 파편의 되어 숨구멍을 파고드는 느낌.
가슴이 서늘해지다 못해 폐가 오그라드는 듯했다.
‘제길, 악몽은 내가 꿀지도 모르겠군.’
힘들게 숨을 들이쉰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꺼냈다.
“철혈마련에서 알아내고 싶은 게 있다면 내가 도와주지. 대신 자네도 나를 좀 도와주게.”
“다른 사람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네. 상대가 철혈마련이라면.”
혁무천도 철혈마련의 강함을 모르지 않았다. 소하민의 설명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일부지만 백마궁을 상대해본 터였다.
철혈마련은 구대마세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대세력. 백마궁보다 배는 더 강한 무력을 갖추었다고 봐야 했다.
자신이 무인도에서의 수련으로 지난날의 힘을 대부분 되찾았다 해도 혼자 그들과 정면대결을 벌이는 것은 무모했다.
“강동일화를 얻고 싶나?”
“그녀는 얻고 싶다 해서 얻을 수 있는 여자가 아니네.”
“정말 얻고 싶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지.”
도대체 저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오만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엽기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내 분수를 아네. 그녀는 내가 차지하기에는 너무 높이 있어. 그리고 아름다운 만큼 드센 가시도 많지.”
“그럼 뭘 바라지?”
“나는 천하에 나가서 꿈을 펼치고 싶네. 그 첫 번째 디딤돌로 철혈마련의 간부가 될 생각이야. 그 일을 자네가 도와주게.”
“철혈마련의 간부가 되는 걸 도와달라고? 나와 철혈마련이 원수가 될지 모르는데도?”
“자네가 철혈마련에 가려는 건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서 뭔가 얻을 게 있기 때문 아닌가?”
분노를 제거하고 냉정하게 따져보면 엽기천의 말이 옳았다.
혁무천도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
“그렇다면 더 잘 됐군. 호랑이에게 얻고 싶은 게 있다면 호랑이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 자네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네만.”
혁무천은 미간을 좁히고 엽기천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것을 얻고 싶으면 분노를 누르고 철혈마련 중심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라, 그 말이다.
‘그럴 듯한 말이군.’
본래 그는 한상귀 장로라는 자를 몰래 찾아갈 생각이었다.
밤에 잠입해서 몇 명 입을 열면 그자의 거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 와중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그것도 나쁠 것 없었다.
가슴에 쌓인 분노를 풀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엽기천의 말대로 하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정보를 얻든 복수를 하든, 더 확실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좋아.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고맙네.”
포권을 취하는 엽기천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그때 혁무천이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강동일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나?”
궁금했다.
엽기천은 성공하기 위해서 철혈마련의 간부가 되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강동일화를 욕심 내지 않는단 말인가.
엽기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도 좋아했던 여자가 있었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진 이후부터는 여자에게 더 이상 마음을 주지 않기로 했네. 대신 다른 꿈을 꾸기로 했지.”
혁무천은 그 말의 속뜻을 어렴풋이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차였나 보군.’
그것도 아주 독하게.
***
“신니 할머니! 아가씨가 깨어났어요!”
문을 박차고 나온 소녀의 고함 같은 목소리에 사찰이 어수선해졌다.
“그래?”
주름이 가득한 비구니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가 나온 방으로 향했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녀는 비구니가 오는 걸 보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침대 위에는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아직 스물이 채 안 되었을 것처럼 보이는 여인이었다.
며칠 전, 뭍에 다녀오던 제자가 정신을 잃은 그녀를 해안가의 숲속에서 발견하고 데려왔다.
당시 그녀를 발견한 제자 말로는, 믿기지 않게도 그녀가 바다에서 나온 것 같았다고 했다.
모래사장을 가로지른 발자국이 바다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는데,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않았다.
제자는 할 수 없이 그녀를 어깨에 메고 암자로 데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며칠이 지난 조금 전까지도.
“괜찮으냐?”
늙은 비구니의 말에 은설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정신을 차린 후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헤엄치는 실력만 믿고 바다에 몸을 던진 일도 생각났다. 썰물에 바다로 밀려나던 일도, 혼신의 힘을 다해서 육지를 향해 손을 저었던 일도…….
정말 죽을힘을 다해 헤엄쳤는데, 하늘이 아직은 자신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나 보다.
“여긴…… 어디에요?”
“보타암이란다.”
은설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홍아라는 아이는 한시도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마치 어미새처럼 그녀를 보살폈다.
덕분에 홍아의 나이가 열 살이고, 부모를 왜구에게 모두 잃은 고아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얼굴이 주근깨 범벅인 홍아는 그럼에도 표정이 매우 밝았다.
“신니 할머니는 다 좋은데, 가끔 괴팍한 성질을 부릴 때가 있어요.”
가끔은 그렇게 늙은 비구니의 흉도 봤고,
“우리 신니 할머니는 무공이 굉장히 강해요. 하늘도 훨훨 날아다닐 수 있어요.”
그렇게 자랑도 했다.
때로는 비밀스런 이야기도 털어 놓았고.
“가끔 저 멀리 육지에서 오시는 분들이 계신데, 엄청나게 강한 그분들도 신니 할머니에게는 꼼짝 못해요.”
은설은 보타암의 신니가 일반 비구니가 아니라는 걸 눈치 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동쪽 저 바다 건너 섬에 굉장한 고수가 산다고 했다. 놀랍게도 그 고수는 여인인데, 천하의 여인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라고 했다.
혹시 보타암의 신니가 그 고수 아닐까?
문득 그 생각을 떠올린 은설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했다.
‘오빠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내가 강해져야 돼.’
그날 오후, 은설을 처음으로 방을 나서서 늙은 비구니, 보타신니를 찾아갔다.
“무공을 가르쳐주세요.”
보타신니는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어찌나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진정 보살이 환생한 듯했다.
“남을 해치기 위해서 배우려는 게 아니에요. 저 자신을 지키려면 힘이 필요해요.”
은설이 그 말을 한 후에야 보타신니가 입을 열었다.
“이미 상당한 무공을 익힌 것 같다만.”
치료하면서 은설의 몸을 살펴보았다.
생각 외로 상당히 강한 기운이 잠재되어 있었다.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얻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쩌면 그 덕분에 살아서 바다를 벗어났는지 모른다.
“오빠에게 배웠어요. 상승 경지의 무공이란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 혼자서 익히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가르쳐 주세요, 신니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