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6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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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68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61화
차라리 악화되면 모험을 하더라도 다른 방법을 써볼 텐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었다.
모험을 하자니 그대로 놓아두면 나아질 상태를 자청해서 악화시키는 꼴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일단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나?’
반면, 사마경은 더 악화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아는 장천운은 거머리보다 백배는 더 끈질긴 사람이다.
천하에서 제일 지독하다는 독을 복용하고도 지금까지 버티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겨낼 수 있으리라.
‘천운, 이겨내! 너는 이겨낼 수 있어! 일어나서 나를 지켜줘야지!’
***
고통이 길어지면 무감각해진다. 고통이 고통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백령혼을 복용한지 일각쯤 지났을 때 겨우 정신을 차린 장천운은 위험을 무릅쓰고 구륜심법을 운용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독왕의 말대로, 운공을 하면 독이 해독되기는커녕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노력조차 해보지 않고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때 독왕이 침을 꺼내들고 다가왔다.
그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너무 놀라고 신기해서 하마터면 진기가 꼬일 뻔했다.
다름이 아니었다. 독왕이 침을 꽂는데 구륜심법으로 일으킨 진기의 흐름과 맥을 같이했던 것이다.
장천운은 침이 꽂힌 혈을 이용해서 몸속의 열기를 흘려보냈다.
덕분에 불길이 잦아들고 독의 열기와 해독제의 한기가 균형을 이루었다.
한기가 당장 열기를 누를 정도는 아니지만, 균형이 잡힌 상태에서의 시간은 자신 편이었다.
두 번째 신기한 일이 일어난 것은 한 시진이 더 흘렀을 때였다.
사마경이 속으로 간절히 빌던 바로 그 시각.
장천운의 몸속에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열기와 한기가 서서히 뒤섞이며 서로에게 녹아들기 시작했다.
음양의 융합.
녹아드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본인이 아니면 모를 정도.
더구나 그 외에 별 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서 일시적인 현상인 줄 알았다.
그러나 굼벵이가 하품할 정도로 느리긴 해도 융합현상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 정도만 해도 어디야?
이제 살 수 있어!
장천운은 융합된 기운을 조심스럽게 침이 꽂힌 혈도로 이끌었다.
그로선 그저 자신에게 지옥의 고통을 선사한 두 기운을 빨리 배출해서 없애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융합된 기운을 침이 꽂힌 혈도로 움직이던 그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음양이 융합된 기운에 제법 강한 힘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속도가 워낙 느리고 융합되는 양이 미미해서 신경 쓰지도 않았거늘.
‘이게 웬 떡?’
쾌재를 부른 장천운은 기운의 흐름을 기해혈 쪽으로 틀었다.
일부는 배출되었지만, 배출된 기운보다 훨씬 많은 양이 아직 몸속에 남아서 융합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기해혈에 기운이 쌓이면서 고통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몸도 서서히 제 색을 찾아갔다.
“독왕 할아버지! 천운이 좋아지고 있어요!”
사마경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치며 방방 뛰었다.
백령혼을 복용한 지 네 시진 반만의 일이었다.
독왕은 아무 대답도 없이 장천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이놈이 진기로 기운을 인도하고 있어. 그런데도 해독 속도가 빨라지다니. 어떻게 된 거지?’
그가 아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말 괴물이 된 거 아냐?’
***
다음 날 아침.
장천운은 여덟 시진이 지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던 그가 어지럼증을 느끼고 휘청거렸다.
“괜찮아?”
사마경이 놀라서 물었다.
“그냥 좀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하긴 두 끼를 굶고 계속 앉아서 운기만 했으니 어지럽기도 할 거야.”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여덟 시진쯤.”
두어 시진쯤 지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짐작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배가 조금 고픈 듯 느껴졌다.
“몸은 어떠냐?”
이번에는 독왕이 물었다.
“힘만 없을 뿐 큰 이상은 없습니다.”
공력을 얻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먼저 그 사실을 밝혀봐야 상대의 목에 힘만 들어갈 뿐.
하지만 독왕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얻은 게 있을 텐데?”
“뭐, 공력이 조금 늘은 것 같군요.”
“조금?”
“조금 많이 늘었습니다. 한 이십 년 이상 수련한 효과를 봤죠.”
장천운은 대충 얼버무렸다.
독왕도 그 일은 더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아니니까.
이제 정말로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네 피를 뽑아야겠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한 사발.”
사발도 사발 나름이다. 손바닥만 한 사발도 있고, 바가지만큼 큰 사발도 있다.
장천운은 잠시 절독곡에 있는 사발을 하나하나 떠올려 봤다. 다행히 절독곡 안에는 바가지만큼 큰 사발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별 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뽑으실 겁니까?”
“사흘 후. 네 기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뽑죠.”
***
백령혼을 복용하고 반쯤 죽었다가 살아난 지 사흘이 지났다.
겨우 일어나서 걸어 다니던 그날 아침, 독왕이 사발을 들고 장천운의 방으로 찾아왔다. 피를 뽑기 위해서.
장천운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이게 사발입니까?”
“그럼 사발이지 뭐냐?”
“이건 바⦁가⦁지잖아요!”
“잘 봐라. 분명히 사⦁발이야.”
독왕이 강하게 주장하며 손에 든 사발을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장천운은 사발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사발은 사발이다. 흙을 빚어서 구워 만든 사발.
문제는 바가지만큼이나 크다는 것이다.
저렇게 큰 사발이 어디에 있었지? 혹시 저번에 밖으로 나갔을 때 사온 거 아냐?
“어차피 한 번에 다 뽑을 생각은 없다. 양이 많으니 세 번에 걸쳐서 뽑을 생각이다.”
‘제기랄! 사발 크기부터 정했어야 하는데.’
독왕은 평범한 사발 하나 양의 피를 뽑았다.
‘끄응, 젠장!’
몸이 아직 정상도 아닌데 피를 한 사발 뽑자 기운이 쭉 빠졌다.
“다음에는 열흘 후에 뽑을 거다. 그때까지 기운을 차려라.”
독왕은 매정하게 말만 몇 마디 던지고 자신의 독단 제조실로 향했다.
“좀 어때?”
사마경이 쪼르르 다가와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긴? 힘이 없어서 죽을 지경이지.
그래도 호위무사가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그냥 힘이 좀 없을 뿐입니다.”
“먹을 것 좀 갖다 줄까?”
“물 좀 주세요.”
“알았어.”
호위무사 주제에 주인을 부려먹은 장천운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운기했다.
‘그나마 열흘의 간격을 두고 뽑는 게 다행이군.’
아마 이삼일 간격으로 뽑았다면 기운 차릴 시간도 없이 계속 누워 있었어야 할지 모르는데.
그때 사마경이 물을 떠왔다.
장천운은 물이 출렁거리는 사발을 보자 목마름이 싹 가셨다.
‘제길, 이러다 사발만 보면 놀라는 거 아냐?’
이십일 후. 독왕이 마지막으로 세 번째 피를 받았다.
처음 피를 뽑을 때보다 몸이 훨씬 나아진 장천운은 자신의 피가 주룩주룩 뿜어져 나오는 걸 보면서도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되었다.
“제 피로 정말 해독제를 만들 수 있습니까?”
“그럼 내가 마시려고 네 피를 받은 줄 아냐?”
“해독제를 만들어서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랑하려고 만드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함께 지낸지 칠 개월이 다 되어서 어느덧 여름이 다가왔다. 그런데도 독왕은 개인사에 대해서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손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고.
장천운이 묻고 빤히 바라보자, 잠시 사발만 응시하던 독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손녀가 하나 있다.”
음울하면서도 나직한 독왕의 목소리에, 한쪽에서 바라만 보고 있던 사마경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름은 초아다. 나이가 아마 저 아이와 비슷할걸? 올해로 스무 살이 되었으니까.”
사마경보다 한 살 많았다.
그러나 장천운과 사마경은 아무 말하지 않고 독왕만 바라보았다.
“초아의 부모는 나 때문에 죽었다. 나에게 앙심을 품은 놈이 쓴 독 때문에…….”
나직이 말하던 독왕이 말꼬리를 끌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주름 가득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놈은 내 아들과 며느리에게 독을 쓰고 나에게 해독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 독을 해독하지 못해서 아들과 며느리가 죽어가는 걸 바라봐야만 했다.”
그 당시 그의 며느리는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산달이 거의 다 된 상태였다.
그는 일단 배를 째고 아기부터 구해냈다. 그냥 놔두면 아기까지 죽을 게 뻔했으니까.
그의 며느리도 웃으면서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아기가 산 것을 기뻐하면서.
한이 사무친 그는 철저히 복수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독을 쓴 자의 가족 이십여 명을 중독 시킨 것이다.
결국 그자의 가족 이십여 명이 모두 죽었다.
하지만 그자는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그때의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았다.
“이 년 전, 놈이 또 찾아와서 생전 처음 보는 독으로 초아를 중독 시켰다. 나는 독을 한쪽으로 몰아넣고 해독할 수 있는 방법을 백방으로 찾아보았지.”
이 년. 그에게는 지옥과 같은 세월이었다.
하루하루 피가 말랐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났을 때, 가까스로 해독할 방법을 찾아냈다.
이독치독. 독으로 독을 중화시키는 방법을.
그러나 성공 여부가 확실치 않았다.
상대의 독이 너무 강해서 자신이 지닌 독으로 중화시킬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는 더 강한 독을 만들기 위해서 사문의 고향인 절독곡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장천운과 사마경을 만나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독을 만들어냈다.
그 후 해독제로 쓸 재료도 확보했고.
“중화가 된다 해도 여독을 없애려면 해독제가 필요하지. 숱한 독을 복용하면서 항독의 효력이 생긴 네 피는 아주 훌륭한 해독제의 재료야.”
“도대체 그 미친놈이 누군데 노선배님의 가족을 독살한 겁니까?”
“당초당이란 놈이다.”
“당초당? 혹시…… 귀독마종?”
장천운이 눈을 홉떴다.
강호에서는 그를 귀독마종이라고 부른다. 진짜로 독에 미친 자.
독을 위해서라면 수백 명의 죽음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미친놈.
“놈이 독을 써서 죽이려 했던 사람을 내가 살려내자 앙심을 품고 그 짓을 저질렀던 거다. 알고 보니 내가 살린 사람이 그놈과 철천지원수였더군.”
이야기하는 사이 사발에 피가 다 찼다.
독왕이 사발을 들고 일어서며 장천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주름진 그의 눈꺼풀이 보일 듯 말 듯 떨렸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
“덕분에 저도 많은 걸 얻었으니 피장파장이죠.”
“당장 나가고 싶어도 열흘만 기다려라.”
“예?”
“혹시 몰라서 피를 조금 더 뽑았으니 해독제를 여유 있게 만들 수 있을 거다. 강호를 종횡하다 보면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르니 몇 개 가져가라.”
엥? 피를 더 뽑았다고?
장천운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싫진 않았다.
독왕이 만든 해독제를 얻을 수만 있다면야 피를 더 뽑아줄 수도 있었다.
“영약도 다수 들어가서 복용하면 공력증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공력증진까지!
사실이라면 금상첨화다.
“주신다면야 고맙죠. 알았습니다.”
어차피 당장 나갈 생각도 없었다.
정들어서가 아니다. 몸이야 그럭저럭 움직이는데 이상은 없지만, 백령혼이 워낙 지독해서 무공을 펼치기에는 무리였다.
지금 상태로 나갔다가 공손백이 보낸 자들과 마주치면 힘도 못써보고 당할 게 뻔하다.
‘사실 이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지 뭐.’
그때 사마경이 넌지시 말했다.
“천운, 주기 싫으면 나는 안 줘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