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호위 55화
무료소설 무적호위: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3,69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무적호위 55화
바닥에 내려선 장천운은 사마경을 내려놓지 않았다.
적을 피하려고 겨우 내려왔더니 독한 냄새가 나는 늪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수가 없으면 흙탕물 건너뛰다 똥물에 빠진다더니…….’
안개가 회색빛인 것도 늪 때문인 듯했다. 시커먼 늪에서 회색빛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끈적끈적한 늪의 깊이는 한두 자 정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썩은 나뭇가지처럼 느껴지는 뭔가가 뚝뚝 부러지고 부서졌다.
장천운은 무릎까지 빠진 채 늪지를 걸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성주, 될 수 있으면 숨을 쉬지 마십시오.”
사마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땅에, 아니 늪에 내려설 때부터 이미 숨을 멈추고 있었다.
사마경에게 주의를 준 장천운은 환귀자의 부풍비를 떠올리며 발을 내디뎠다.
무릎까지 빠졌던 그의 몸이 조금씩 떠올랐다. 그리고 다섯 걸음 째 옮겼을 때에 늪 위를 걷고 있었다.
‘후우, 정말 지독한 늪이군.’
그도 숨을 멈추고 있었는데 참기가 힘들었다.
독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뒤늦게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사마경의 부드러운 가슴 감촉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괜히 봤어.’
얼굴만 안 봤어도 심장이 이렇게까지 뛰지는 않았을 텐데…….
늪은 이십여 장을 걸어가서야 끝이 났다.
땅에 올라선 장천운은 일단 늪에서 멀어졌다.
늪에서 멀어질수록 회색빛 안개도 옅어졌다. 역겨운 냄새도 덜 났고.
장천운은 시야가 탁 트인 곳에 도착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곳은 냄새가 덜 납니다, 소성주. 이제 내리시죠.”
사마경은 장천운의 등에서 내리기가 싫었다.
그래서 조금 더 버텼다.
“정말 괜찮을까?”
“땅의 색깔도 다릅니다. 걱정 말고 내려오세요.”
“이대로 조금만 더 안으로 들어가.”
내려서 걸으면 되는데 왜 안 내려?
어디 다쳤나? 아니면 저 수상한 늪지의 독기 때문에 이상이 생기기라도?
사마경이 걱정된 장천운은 이십여 장을 더 나아간 후 멈춰 섰다.
“불편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냐, 견딜만해.”
사마경은 아쉬운 마음을 접고 장천운의 등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짐짓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수고했어. 다친 옆구리는 좀 어때?”
장천운은 옆구리가 아닌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늪지에 빠져서 그런지 무릎 아래쪽 바지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지보다 그 안쪽의 다리에 신경이 쓰였다.
허리를 숙인 그는 바지를 무릎 위까지 찢어냈다.
피부가 시커멓게 물들어서 먹물에 빠진 듯했다. 그러나 단순히 물들어서 시커먼 것이 아니었다.
‘역시 독지(毒池)였어.’
늪은 단순한 늪이 아니라 독기가 뭉친 독지였다.
오랜 세월 고여서 썩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문제는 바로 그 독기에 자신의 다리가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다리를 보고 깜짝 놀란 사마경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괜찮아?”
“조금 가렵긴 한데, 참을 만합니다.”
“물을 찾아봐야겠어. 빨리 씻어내야지.”
사마경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본 장천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금 가려운 것이 아니다.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뒤쫓아서 내려오던 자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늪지에 뛰어들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독지라는 걸 알고 발걸음을 돌렸을 수도 있고.
“이제 찾아봐야죠.”
***
종리성학은 오 장 정도 남겨두고 다급히 위로 올라갔다.
협곡 아래쪽에 시커먼 늪이 펼쳐져 있었다.
숨 쉴 때마다 그 늪에서 피어오른 역겨운 독향이 코를 찔렀다.
잠깐 사이 독향을 서너 번 맡았을 뿐인데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자칫하면 올라가지도 못한 채 어이없는 죽음을 당할지 모를 상황.
‘빌어먹을! 괜히 내려왔어!’
그는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해서 위로 올라갔다.
사정을 모르는 추산은 되돌아온 종리성학의 안색이 창백한 걸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가?”
“밑에 굉장히 넓은 독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독한 독기가 뿜어져 나오고, 심지어 안개조차 독기 때문에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래?”
“바닥까지 내려가서 확인해 볼까 했습니다만, 아무리 둘러봐도 독지가 아닌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소성주가 그곳으로 내려갔을 거라고 보나?”
“설령 소성주가 그놈과 그곳으로 내려갔다고 해도 무사하지는 못할 겁니다. 독지로 뛰어들었다면 상처에 독이 스며들었을 테니까요.”
“빌어먹을. 소연추에게 속아서 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만 않았어도 따라잡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소비한 시간은 기껏해야 한 시진 정도. 그런데 그 시간 때문에 사마경과 장천운이 곽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차라리 독지에서 죽었다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요.”
“성학, 자네는 소성주가 죽기를 바라지만, 나는 주군의 명을 거스를 수 없네.”
“저라 해서 어찌 주군의 마음을 거스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죽는 게 최선입니다.”
“결과야 주군께서 판단하는 것. 돌아가서 보고를 올린 후 명을 기다리세.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종리성학은 안개가 춤을 추는 협곡 아래를 지그시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살아 있다면 반드시 죽여야 해.’
***
사마경이 작은 샘을 하나 발견했을 때는 장천운의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천운, 여기 샘이 있어. 빨리 와.”
장천운은 사마경이 손짓하는 곳으로 가보았다.
구석진 곳에 토끼들이 세수하는 데나 쓸 정도로 작은 샘이 있었다.
사마경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을 벗더니 샘에서 물을 떠왔다.
장천운은 사마경이 신발에 떠준 물로 다리의 독을 씻어냈다.
그러나 독기가 이미 살 안으로 스며든 이후여서 기껏해야 피부에 묻은 늪의 찌꺼기만 씻어낼 수 있었다.
“어떡하지?”
사마경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운기를 해서 독기를 한곳으로 몰아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조용히 운기행공 할 곳을 먼저 찾아보죠.”
“그래?”
그때 무슨 생각이 났는지 사마경이 절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석실처럼 생긴 곳이 있던데, 거기서 해.”
장천운은 사마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절벽 밑에 사각 진 형태로 뚫린 곳이 있는데, 사마경의 말대로 석실처럼 보였다.
설마 이 독한 곳에 사람이 살았단 말인가?
“한번 가보죠.”
역시나 사람이 만든 석실이었다.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절벽을 반듯하게 파내서 석실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미친 사람임이 분명했다.
독기가 흐르는 이런 골짜기 안에 석실을 만드는 사람이 어디 제정신이겠어?
저 독향만 풍기는 독지가 무슨 아름다운 연못도 아니고 말이야.
장천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석실을 살펴보았다.
석실은 골짜기 가장 안쪽 절벽 밑에 있었는데, 크고 작은 석실 네 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최근까지도 사람이 살았던 듯 벽 쪽에 집기들이 있고, 돌로 만든 침상은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천운은 독을 다스리고 있어. 나는 주위를 한번 둘러볼 게.”
“조심하십시오, 소성주.”
“걱정 마. 근처만 조금 둘러볼 거니까.”
장천운은 그 말을 듣고도 사마경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당장 독기를 몰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석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서서 진기를 움직였다. 퉁퉁 부은 종아리가 허벅지만큼이나 굵어져서 가부좌를 틀고 앉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리의 독 때문에 옆구리의 통증이 둔해진 게 다행이었다.
일각쯤 지나자 시커먼 기운이 무릎 아래쪽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종아리가 반쯤은 시커멓고, 반쯤은 회색을 띠었다.
다시 일각이 지났다.
두 발이 먹물로 가득 찬 듯 시커멓게 변했다.
그래도 회색이던 종아리 위쪽은 독기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서서히 제 살색을 되찾았다.
문제는 독기가 빠져나간 곳이 미칠 듯이 가렵다는 것이었다. 아마 독기 때문에 덧날 것이 걱정되지 않았다면 시원해질 때까지 마구 긁어댔을 것이다.
거기다 살을 강제로 찢는 것처럼 고통이 심했다.
스릉.
이를 악다문 장천운은 검을 빼서 양쪽 발목 근처를 그었다.
혈관이 잘리면서 시커먼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는 진기를 돌리면서 독기가 뭉친 피를 체외로 밀어냈다.
상처에서 뿜어진 피로 인해 주위가 시커멓게 변하고,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독혈이 빠져나갈수록 가려움도 더 강해졌다.
‘미치겠군!’
그렇게 뿜어진 피가 서서히 붉은 색을 되찾아갈 때였다.
밖에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누구?
사람을 만났다는 뜻.
장천운은 운기를 중단했다.
“악! 이게 무슨 짓이에요!”
비명이 섞인 다급한 목소리.
장천운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두 다리가 만 근짜리 철추라도 달린 묵직했다. 땅을 짚을 때마다 골까지 흔들리는 듯했다.
그래도 자신의 몸보다 사마경을 지키는 게 먼저였다. 자신은 그녀의 호위무사인 것이다.
24장: 실험계약(實驗契約)
석실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곳.
사마경이 뼈다귀에 가죽을 씌워놓은 것처럼 바싹 마른 노인에게 붙잡혀 있었다.
가을의 메마른 낙엽처럼 낡은 갈색 옷, 헝클어진 머리, 거친 수염. 독지의 안개만큼이나 칙칙한 회색빛 눈.
나이는 칠순쯤 되었을까?
암울한 회색빛 눈으로 사마경을 노려보던 노인은 절벽 쪽에서 달려오는 장천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좁힌 노인의 입에서 생김새만큼이나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부터 이곳이 애송이들 놀이터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노인 앞에 도착한 장천운이 분노의 눈빛으로 노인의 회색빛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검병에 손을 얹었다.
“그 손, 놓으시죠.”
“흥! 네 검보다 내 손이 더 빠를걸?”
노인이 냉랭히 코웃음 치며 손에 잡힌 사마경의 팔을 비틀었다.
고통스러운지 면사 밖으로 드러난 사마경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장천운이 다급히 소리쳤다.
“잠깐!”
“왜? 자신 있으면 검을 뽑아보지 그러느냐?”
장천운은 쉽게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사마경의 무공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바로 제압당한 듯했다.
노인이 경험 많은 강호의 노고수라는 뜻. 섣부른 대응은 자칫 사마경만 다치게 할 뿐이다.
“저희에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왜냐고? 그럼 몰래 들어온 도둑에게 반갑다고 인사라도 하란 말이냐?”
“도둑? 이곳이 노인장의 집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집은 아니지만, 이 절독곡(絶毒谷)은 사백 년 동안 노부의 사문이 이어진 곳이니라. 그러니 노부는 이곳의 주인이라 할 수 있고, 네놈들은 몰래 들어온 도둑놈들인 거지.”
“곽산 깊은 산중 계곡에 주인이 있는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생각해보십쇼. 훔칠 것도 없고 지독한 악취만 풍기는 이곳에 어떤 미친놈이 도둑질을 하러 온단 말입니까?”
장천운이 노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만에 하나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모험을 해서라도 사마경을 구해야 했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 노인의 이마에 칼로 힘껏 그은 듯 세 줄기 선이 깊숙이 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