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계 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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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2,707회 작성일소설 읽기 : 파계 95화
파계 4권 - 20화
“모든 무림 동도들께서도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오? 이 손 모는 공정한 비무를 원하고, 무기의 이점을 통해 이겼다는 말을 원치 않소. 동도들께서도 그러한 비무는 보고 싶지 않으리라 생각하오!”
“옳소!”
“비무란 공정해야 하오!”
“오 장문인께선 무기를 잡으시오!”
사람들은 손우익의 말에 동조하며 크게 소리쳤다.
만약 손우익이 아니었다면, 혹은 백천맹이나 흑천맹의 고수가 아니었다면 이런 말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 자신부터 공정하게 무기를 잡으니 마니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좋소. 손 대협께서 그리 말씀하시고, 모든 동도들이 원한다면 이 오 모는 기꺼이 따르겠소.”
오칠은 진열장으로 가서 무기를 살펴보았다.
‘뭐로 할까?’
그 자신이 익힌 무공은 너무나 많고, 사용하지 못할 무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할 무기로 펼쳐야 하는 무공이 그의 머릿속엔 가득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오칠은 결국 목검을 집어 들었다. 저들의 머릿속에 정통과 정파란 이름을 보다 분명하게 각인시키려면 자신이 검을 익혔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았다. 또한 그에 맞는 정심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검법도 펼쳐야 할 것이다.
“검을 익히셨소?”
손우익은 오칠이 목검을 집었다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 자신이 검을 익혔으니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작은 재주에 불과할 뿐이오.”
오칠은 겸손을 가장하여 모호하게 말을 돌렸고, 손우익은 오칠을 검객이라 완전히 믿게 되었다.
자신을 상대하는데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최고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오랫동안 그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뭉쳐진 자부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혹자는 오만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만한 실력이 있는 손우익에겐 분명 자부심이라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니까.
“그럼 오늘의 기쁨을 축하하는 이 흥겨운 자리를 마무리합시다.”
오칠은 진정 손우익과의 비무가 즐겁기 그지없다는, 매우 무인답고 정파인다운 미소를 지으며 목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손우익은 지금까지의 편안한 자세가 아니라, 목검을 내밀어 오칠의 미간을 겨누는, 보다 공격적인 기수식을 취했다.
“…….”
“…….”
오칠도 침묵하고, 손우익도 침묵했다.
주변에는 비무가 어찌 시작될지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이 팽배하여 소리 없는 환호가 휩쓸고 있었다.
‘선공하기를 기다리는 건가?’
오칠은 손우익의 자세를 통해 먼저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양보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오칠은 옥허진기(玉虛眞氣)를 운용하여 기혈을 따라 돌렸다.
백팔마공의 하나이나, 그 기운이 있는 듯 없는 듯 일어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니, 어찌 보면 도교적인 느낌의 신공이었다. 칠 대 교주의 기억을 보자면, 한때 도문에 있다 교의 제자가 된 이가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도 하는데, 다만 그렇게 전해질 뿐이고 정확한 연원은 알 수가 없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옥허진기가 지금 오칠이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신공이라는 것이다.
“조심하시오.”
정파인으로서의 연기를 할 필요가 없는 평소의 오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내뱉으며 목검을 앞으로 찔렀다.
스아악―
찔러가는 모양새였지만, 목검은 마치 물이 흘러가듯 유연하게 움직였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마치 찌를 테니 막아보라고 말하는 듯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오칠의 일검에 손우익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너무도 막기 쉬운 공격을 받으니 자존심이 상한 걸까?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냥 물러나거나, 목검을 좌우로 한 번씩 휘두르면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오칠의 공격이 이상하게 시선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거슬린다고 그냥 멍하니 볼 수는 없는 일.
손우익은 목검에 공력을 주입하여 빠르게 상하를 긋고 좌우로 휘돌렸다. 단순하게 찔러 들어오는 오칠의 목검을 감아 돌려서 밀쳐 내거나, 아예 주인의 손에서 빼앗을 수도 있는 수법이었다.
“……!”
하지만 손우익은 휘돌리던 목검을 당기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확실하게 감아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오칠의 목검이 이상하게도 아무런 마찰도 없이 그의 공세를 뚫고 계속해서 찔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타탁.
얼음 바닥을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난 손우익은 경쾌하게 바닥을 디디면서 오른쪽으로 몸을 띄웠다.
오칠의 왼쪽을 점거하여 허리를 노릴 심산인 것이다.
터텅―
“……!”
당황했지만 빠르게 대응하여 반격을 취했다 생각했는데, 손우익의 목검은 오칠의 옆구리를 건드리지도 못한 채 막히고 말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몸을 돌리고 있었다는 듯 그를 마주보고 있는 오칠이 목검을 내밀어 공격을 막은 것이다.
게다가 오칠은 또다시 그를 향해 목검을 찌르고 있었다.
‘도대체!’
너무 밀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귀신에 홀린 듯한 기묘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나 기분은 기분일 뿐, 손우익은 찔러 들어오는 오칠의 목검을 피해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앞으로 전진하며 목검을 빠르게 내리긋기 시작했다.
샤샤샤샤샤샤샤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검영이 찔러 들어오는 오칠의 공세를 뒤덮어갔다.
순간, 오칠의 목검이 흔들렸다.
느리게 느리게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희한하게도 그의 목검은 흐릿한 잔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단순히 손우익의 공격에 밀려 흔들리는 것이 아닌 것이다.
터텅! 터터터텅―
오칠은 빠르고 현란하게 그어지고 있는 손우익의 목검을, 그 목검이 만들어내고 있는 검영을 하나씩 툭툭 밀쳐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그저 느릿하게 흔들리는 것 같던 오칠의 목검이 그의 검영들을 밀어내고, 중심에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내자 손우익의 가슴에 당혹스러움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공간을 통해 오칠의 목검이 처음부터 그랬듯이 자연스럽게 찔러들어 오면서 그는 정말로 다급해졌다.
“차핫!”
꾹 다물어져서 절대 열릴 것 같지 않던 손우익의 입에서 기합성이 내질러지고, 바닥을 힘껏 디딘 그의 신형은 위로 솟구쳐 올랐다.
피한 걸까?
사 장여나 위로 솟아올라 관조하듯 아래를 바라보는 손우익은 비무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으로 보였다.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해 도망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처음에 기세를 놓치고, 연속해서 이어지는 상대의 공격에 단순하게 대응한 자신을 반성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그리고 솟아오른 순간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그는, 그가 추구하는 화려함과 정교함을 가장 완벽하게 목검으로 표현하며 오칠을 향해 쏟아 부었다.
샤샤샤샤샤. 샤샤샤샷―
공간을 자르고, 거리를 자르고, 오칠을 잘라내기 위해 날카로운 검영이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오칠은 피해야 했다. 지켜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저 빗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검영을 일단 피하고 다시 공격의 틈새를 찾는 것이 옳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오칠은 피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수많은 검영이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늘을 갈라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목검을 크게 휘둘렀다.
스아아아―
광풍이 부는 듯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칠의 목검에서부터 공기의 일렁임이 생겨났고, 그 일렁임 속에서 생성되는 광풍이 검영의 숲을 흔들고 하늘 저편으로 휩쓸어버렸다.
“……!”
떨어지는 손우익과 하늘을 올려다보는 오칠 사이에는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순간에 불과한 시간.
티티티티티티티팅―
자신의 공세가 일순간에 흩어져버렸다는 걸 안 순간, 손우익은 두 번째로 검영을 쏟아내어 오칠의 전신을 휩쓸었고, 오칠은 그에 맞서 느릿하지만 한 치의 틈도 없는 손놀림으로 목검을 움직여 검영들을 일일이 튕겨냈다.
“…….”
“…….”
갑작스럽게 목검의 그림자들이 쏟아졌다 흩어지고, 또다시 폭발했다 잠잠해지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잠깐 동안 두 사람은 공세를 멈춘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비무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손우익이 공격을 하고, 오칠은 이를 막는 창과 방패의 대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오칠이 아주 조금 늦게 시작했을 뿐, 그 역시 공격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공격으로 손우익의 공세를 막아냈기 때문에 방어처럼 보일 뿐인 것이다.
‘손우익, 이제는 실력을 드러낼 때가 되지 않았나?’
오칠은 견제하는 것처럼 목검을 슬며시 앞으로 겨누고, 약간은 지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우익의 내심을 살폈다.
하지만 그 정확한 속내를 알아내는 것은 오칠에게도 불가능한 일.
그저 손우익이 아직까지 제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오칠 자신이 그의 공격을 너끈히 막아냄으로써 그가 더 이상은 실력을 감출 수 없다 생각하고 있으리라 짐작하는 정도뿐이었다.
‘어디 나도 이제 힘을 내볼까? 그래도 꼭꼭 감추고만 있는지 두고 보자고.’
오칠은 옥허진기를 극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외적인 강함보다 내적인 충실함을 추구하는 옥허진기였지만, 극으로 운용되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하겠다는 건가?’
손우익은 저도 모르게 목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칠의 옷깃은 팽팽해지고, 눈동자엔 강렬한 기운이 맺혀 빛이 났다. 처음에 그랬듯이 다섯 장의 거리를 벌리고 있음에도 뭔가 묵직한 기운이 전신을 밀어내는 게 분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선공해야 한다!’
오칠이 내공을 정점으로 끌어올리는 걸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손우익은 창천백련공(蒼天百鍊功)의 공력을 배가시켰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목검을 앞으로 떨쳐냈다.
촤라라라라라. 촤라라라―
무류천화검을 통해 발휘되는 현란한 검영이 창천백련공의 기운을 머금고 오칠에게 밀려들어갔다. 단순히 변화만으로 위력을 발휘하는 공격이 아니었기에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검기의 저릿한 섬뜩함을 느낄 정도였다.
‘좋군.’
오칠의 빛나는 눈동자가 섬광처럼 번득였다.
그리고 앞을 겨누고 있던 목검을 들어 좌우로 그었다. 아니, 그었다 싶은 순간 다시 긋고, 또다시 긋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의 목검은 하나의 벽을 만들었다.
검막(劍膜).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는 음양이 합일되는, 일월합벽(日月合闢) 정도의 내공 경지가 아니라면 펼칠 수 없는 수법이라 했다. 즉, 내공이 절정이라 말할 수 있는 높은 경지에 오르지 않는 이상은 그 흉내조차 내기가 어려운 수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칠이 천검무극류(天劍無極流)라 하는 백팔무공에 속한 검공을 통해 그 검막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 검막을 바로 코앞에서 목도하고, 상대하고 있는 손우익은 내심 경악하면서도 황급히 그의 목검에 더욱 많은 공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쾅―
둔중한 굉음과 산산이 부서진 목검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흡!”
신음은 굉음보다 약간 뒤늦게 터져 나왔다.
뒷걸음치며 밀려나면서도 끝까지 신음을 참으려 했던 손우익이 더 이상 억제하지 못하고 뒤늦게야 신음을 토해낸 것이다.
“하… 하… 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핏물을 닦는 손우익의 입술 사이로 억제된 듯한 거친 호흡이 비집고 나왔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지치지 않고 오칠을 보고 있었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원한에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칠이란 인물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오 장문인의 사문을 알 수 있겠소?”
호흡을 어느 정도 가다듬은 손우익이 물었다.
오칠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홀로 산에 묻혀 있다 보니 자연의 도를 깨달은 것이라 생각해주시오.”
손우익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무림인들이 과거를 숨기고, 사문을 숨겼다. 좋지 않은 과거, 혹은 가문의 은원이 얽히는 등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오칠은 그중 어느 경우에 속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밝히기를 꺼려한다면 더 물을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한 마디만은 더 해야 했다.
“내가 패했소.”
약간 씁쓸한 기운이 묻어 있었지만, 손우익은 깨끗이 승복한 것이다.
“손 대협께서 양보해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오칠은 손우익이 처음부터 실력을 모두 드러내 최선을 다했다면 지금보다 어려운 싸움이 되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결국은 자신이 이기겠지만, 어쨌든 손우익은 뒤늦게야 힘을 발휘하는 실수를 범함으로써 좀 더 이른 시간에 패한 것이었고, 오칠은 그 점을 제법 정파인다운 말로 돌려 말한 것이다.
짝짝짝짝!
“최고였소이다!”
짝짝짝짝!
“다시없을 명승부였소!”
승패의 결과를 당사자들이 결론짓자, 고요히 지켜보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를 질렀다.
오칠은 그런 사람들에게 포권을 취해 보이고는 자리로 돌아가려는 손우익에게 황금 백 냥이 들어 있는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금철산이 공손하게 내미는 묵철곤을 받아들고는 위로 들어올렸다.
“이 곤의 이름을 묵철곤이라 하고, 앞으로 우리 무적 정의파의 신물로 삼을 것이오!”
“와~!”
“와~!”
연무장 주변에 몰려 있던 무적 정의파의 무인들이 함성을 지르고, 그 분위기에 쓸려 손님들도 박수를 치며 잔을 들어 축하했다.
그리고 그날 밤이 늦도록 이어진 술자리를 끝으로 일순간에 무한 제일문으로 용솟음친 무적 정의파의 개파식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