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비서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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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15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의비서 15화
제6장 결심 (2)
“예상이는 가서 차를 좀 가져오너라.”
당자기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말하자 당예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방문 밖에는 이화가 있었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에도 조윤에게서 다섯 발자국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조윤을 노려도 그 거리라면 얼마든지 지킬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당자기가 의술의 비전을 듣게 할 수 없다면서 한사코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조윤도 미안해하며 양해를 구하자 어쩔 수 없이 방문 앞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당예상이 나가는 걸 확인한 당자기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말했다.
“이걸 먹어라.”
“이게 뭡니까?”
“당의환(唐醫丸)이라는 영약이다. 무공을 익히는 사람이 이걸 먹으면 십 년의 내공이 는다.”
“그럼 귀한 것이 아닙니까?”
십 년이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한데 이 약 하나가 그 긴 세월을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대신해 준다고 한다. 그 값어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었다. 부르는 게 값이었다.
“맞다. 하니 어서 먹어라.”
“이리 귀한 것을 왜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너는 내 제자가 아니더냐? 전에 내가 한 것처럼 자신의 기를 환자의 몸에 흘려보내려면 내공이 강해야 한다.”
조윤은 잠시 고민했다. 이유 없는 친절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당자기가 의술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지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혹여 당이주의 사주를 받고 독약을 먹이려는 걸 수도 있었다. 당장에는 드러나지 않아도 천천히 죽어 갈지도 모른다. 저번에 차에 독이 들어 있었던 사건 이후로 조윤은 조심성이 부쩍 늘었다.
“왜 그러느냐?”
“스승님의 호의는 고마우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라 당자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곧 조윤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었다.
조윤은 지금 무인도에 홀로 뚝 떨어진 거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사방이 적이었고, 누군가 벌써 손을 썼을 수도 있다. 백모연이 보호하고 있었지만 이용당하고 있다 여길 것이다.
“왜 그걸 묻는 거냐? 혹여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조윤은 말을 할지 말지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독이 들었던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랬었군.’
당자기는 조윤의 처지가 이해되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보니 당이주가 독을 쓴 것 같았다. 나중에 그녀를 만나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당문의 의원이다. 그러나 당문은 의술보다 독술을 더 중요시 여긴다. 독술로 인한 사고의 대비책으로 의술을 공부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치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만 의술을 다루는 것이다. 나는 그게 싫었다. 독술은 사람을 죽이는 공부다. 그러나 의술은 사람을 살린다.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겠느냐? 당연히 의술이 아니더냐?”
당자기는 어느새 울분이 섞인 말투로 가슴속에 있던 것을 모두 쏟아내고 있었다.
“해서 나는 당문이 독술을 버리고 의가(醫家)로서 거듭나기를 원했다. 가주에게 그 생각을 말했으나 씨도 먹히지 않았다. 혼자서는 안 되겠다 싶어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랬더니 기존의 세력들이 은근히 압력을 가해 왔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이 뜻을 관철시키려 했고, 결국 가주와 부딪치고 말았다. 그때 태상가주님께서 실력으로 승부를 가리라는 제안을 했고, 가주와 나는 그에 따랐다. 가주가 세 번 독을 쓰면 내가 그걸 치료하기로 한 것이다. 두 번 이상 해독하면 내 승리였다.”
거기까지 말한 당자기가 그때 생각이 나는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살짝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을 보자 조윤은 그때의 결과가 좋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합은 당가의 중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가주는 그 자리에서 독을 세 개 만들어서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그중 하나도 해독할 수가 없었다. 나름 의술에 자신이 있었건만 우물 안의 개구리였던 게지. 그 자리에서 가주가 이런 말을 하더구나. 당문은 이미 독술로 천하에서 으뜸이니 만약 독술을 버리고 의가로 거듭나려면 의술로도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내 의술이 내 주장을 뒷받침할 정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꼬집어 이야기한 것이지.”
말을 하던 당자기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벌써 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밤잠을 줄여 가며 의술을 공부했으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의술도 무공과 마찬가지로 배워야 할 시기가 있었다. 그때를 놓치니 진보가 더뎠고, 재능의 한계도 있었다.
“그 이후로 무던히 노력했으나 스스로의 한계만 느꼈을 뿐이다. 그럼에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왔으나 솔직히 반은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다 너의 재능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뛰었다. 좋은 스승을 찾는 것보다 뛰어난 제자를 찾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들다. 이는 하늘이 준 기회라 여겼다.”
당자기가 조윤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네게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다. 바로 네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명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독술보다 의술이 중함을 알려 다오. 그래 줄 수 있겠느냐?”
조윤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백모연이 그랬듯이 당자기 역시 감당할 수 없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게 부담이 되어 어깨를 짓눌러 왔다. 이에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노력하겠습니다.”
“하면 나를 믿어라. 네가 그리될 때까지 아낌없이 베풀 것이다. 어서 이걸 먹어라.”
“네.”
조윤은 당자기가 내미는 당의환을 받아서 삼켰다. 그러자 입안에 도는 지독한 쓴맛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조금 있으면 약 기운이 몸에 퍼질 것이다. 정좌하고 앉아 운기조식 하여라. 내가 돕겠다.”
“알겠습니다.”
당자기가 시키는 대로 조윤은 정좌를 하고 단전에 집중했다. 잠시 그렇게 운기조식을 하고 있으니 단전의 기운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당의환의 기운이었다. 거기에 더해 당자기가 조윤의 등에 장심(掌心)을 붙이고 내기를 밀어 넣자 단전의 기운이 더욱이 강해졌다.
“이대로 기운을 아래로 내려라. 지금부터 독맥(督脈)을 뚫을 것이다.”
독맥의 대혈은 회음, 미려, 명문, 협착, 대추, 옥침, 백회, 이렇게 총 일곱 개였다. 그중 가장 뚫기 어려운 것이 미려, 협착, 옥침 이렇게 세 개의 혈이었다. 그래서 그 세 개의 혈을 독맥삼관이라고 부른다.
조윤이 단전의 기운을 회음혈로 보내자 순식간에 뚫렸다. 다음은 미려혈이었지만 아무리 기를 내보내도 좀처럼 뚫리지가 않았다.
그때 당의환의 기운이 완전히 조윤의 단전으로 흡수되면서 갑자기 미려혈이 확 뚫렸다. 조윤은 그 여세를 몰아 명문혈까지 뚫었다.
그러나 미려혈처럼 협착혈은 쉽게 뚫리지가 않았다. 한 식경이 지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자 당자기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거뒀다. 이에 조윤도 기운을 다시 단전으로 되돌렸다.
“아쉽구나. 당의환의 기운이라면 옥침까지는 능히 열 수가 있거늘, 아직 네 나이가 어리고 공부가 부족해 명문까지가 한계로구나.”
“저는 그마저도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베풀어주시지 않았다면 몇 년 후에나 가능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조윤이 예의를 갖춰서 인사하자 당자기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옥침을 뚫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을 텐데, 조윤은 오히려 얻은 성과에 만족하며 고마워하고 있었다. 성정이 곧고 욕심이 과하지 않다는 뜻이다.
“너도 수고 많았다. 내가 네게 당의환을 준 것은 비밀로 해야 한다.”
“어머니는 금방 알아채실 겁니다.”
“그건 걱정 마라. 내가 직접 이야기할 터이니.”
“알겠습니다.”
때마침 당예상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녀는 뭔가를 눈치챘는지 조윤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 * *
“이건 그때 네가 부탁한 것이다. 공방의 장인들이 최대한 신경 써서 만들었는데 내가 원하는 것과 일치하는지 모르겠구나.”
당자기가 가지고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는 조윤이 부탁했던 메스와 가위, 겸자(가위 모양의 집게), 포셉(핀셋) 등 의료 기구가 있었다.
현대에서 쓰던 것에 비하면 조잡했지만 당장에 쓰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청진기가 생각보다 잘 만들어졌다. 이 시대에는 고무가 없을 거라 여겨 부탁을 하면서도 만들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으나 괜한 걱정이었다.
당문에서는 면피장갑이라고 해서 독을 만질 때 끼는 얇은 장갑이 있다. 한데 그 재질에 고무가 섞여 있어 신축성이 좋았다. 청진기의 고무관도 그걸로 만든 것이다. 이 정도의 기술력이라면 링거라든지 더 나아가서 현미경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당문의 기술력이 이렇게 뛰어난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에 드는 게냐?”
“네. 조금 손봐야 할 부분도 있지만 당장에 쓰기에는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흐음. 한데 그걸 어디에 쓰려는 게냐?”
조윤은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한번 해보는 게 낫겠다 싶어서 청진기를 당자기의 귀에 꽂고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게 했다.
처음에는 의문이 가득하던 당자기는 곧 청진기의 의미를 알아챘다.
“허어. 심장 소리를 듣고 맥을 파악한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런 건 어디에서 배운 것이냐? 혹시 화타의 후손이라던 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더냐?”
“네? 네. 그렇습니다.”
“하면 저 가위는 어떻게 쓰는 것이냐?”
당자기가 관심을 보이면서 묻자 조윤은 의료 도구의 쓰임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당자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외상을 치료할 때 쓰는 거로구나. 한데 굳이 저런 기구들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 손으로 해도 충분하지 않더냐?”
“그게…….”
당자기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세균 감염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아직 세균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었다.
“정교함 때문입니다.”
결국 조윤은 그렇게 둘러댔으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당자기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도 신기한 물건들이라 자신도 모르게 그 쓰임을 묻다가 뒤늦게 옳지 않다고 자각한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신의문의 의술을 자신이 훔치려 한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이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화제를 돌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곧 있을 총회에 대해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당자기는 총회 이후의 일이 걱정되었다. 백모연은 그날 조윤이 단목태성의 장자라는 것을 인정받으려 할 것이나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정작 문제는 그 이후였다. 조윤이 인정을 받건 못 받건 지금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중하고 있으나 조윤이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든 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다. 하나 백모연은 세력이 없었다. 과연 그들을 어떻게 막아낼지 의문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냐?”
“듣기로 지금까지 어머니는 조용히 지내셨다고 하던데 왜 갑자기 저를 후계자로 내세우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혹시 아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음…….”
당자기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마 아들의 복수를 하려는 걸 게다.”
“복수요?”
“그래. 백 가모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한 살을 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어린아이가 죽는 일은 흔한 일이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 가모는 그게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어머니를 의심하는 건가요?”
“그럴 게다. 은밀하게 독을 쓰는 것은 당문의 특기니까.”
“사실은 어떻습니까? 정말 첫째 어머니가 한 일인가요?”
당자기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사실을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당이주를 어렸을 때부터 봐 왔다. 이주의 성정이 조금 차갑기는 하지만 어린아이를 독살할 만큼 모질지는 않다.”
조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진실을 알 수가 없었다.
“스승님.”
“말하여라.”
“도움이 필요합니다.”
“뭘 하려는 게냐?”
“이래저래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해보려고 합니다.”
조윤이 결심을 굳힌 얼굴로 말하자 당자기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