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비서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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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94회 작성일소설 읽기 : 신의비서 12화
제5장 암계(暗計) (2)
며칠을 그렇게 바쁘게 지냈다. 백모연은 늘 자상하게 대해줬으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을 이용할 생각으로 데리고 왔다는 선입관 때문이었다.
“따라오너라.”
아직 점심때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한창 글공부 중인데 백모연이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가 보니 대청(大廳)에 웬 장년 사내가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와 함께 있었다.
“한 달 만에 뵙는군요. 평안하셨는지요.”
백모연이 장년 사내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사내가 살짝 읍을 하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상공께서는 좀 차도가 있으신지요?”
“허허. 부끄럽소이다. 가진 재주가 미천하여 치료에 진척이 없구려.”
장년 사내가 하는 말에 조윤은 그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당문에서 단목태성을 치료하기 위해서 온 당자기가 분명했다.
“아닙니다. 귀찮을 텐데 이리 발걸음을 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단목가주가 남이 아니거늘 어찌 번거롭다 하겠습니까?”
당자기가 정색을 하며 말하고는 조윤을 봤다.
“이 아이는…….”
“이미 아실 거라 믿습니다. 단목조윤이라고 합니다. 상공의 아들입니다.”
“음…….”
흔히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한다. 당자기 역시 당문 사람이라 당이주를 지지하고 있었고, 이에 조윤이 반갑지가 않았다.
“인사드려라. 당문에서 의술이 가장 뛰어나신 당자기 의원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목조윤이라고 합니다.”
“그래.”
당자기는 조윤을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조윤은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아버님을 치료해 주시는데 노고가 많습니다. 제가 의술을 조금 공부하고 있는데 궁금한 것이 있어 감히 여쭙고자 합니다.”
“뭐가 궁금한 것이냐?”
“아버님의 머리에 혈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혈종?”
“아, 피가 고인 걸 말합니다.”
“어혈을 말하는 게로구나. 맞다.”
“하면 어떻게 치료를 해야 합니까?”
조윤의 물음에 당자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의원이라면 누구나 각자의 처방전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곧 실력이자 능력이었다. 그래서 처방전은 제자에게도 함부로 전하지 않았다. 하니 그 비법을 묻는 것은 아닐 테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의원에게 처방전을 묻는 것은 대단한 실례였다. 더구나 치료가 원활히 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 마치 실력을 의심받는 것 같았다. 당연히 의도하지 않아도 대답이 퉁명스러웠다.
“어혈은 침과 약으로 풀 수가 있다.”
“하면 아버님도 그 방법으로 치료를 하시는 것입니까?”
“맞다. 다만 단목가주는 머릿속에 어혈이 있고, 하필 침을 놓을 수가 없는 자리다. 그래서 약으로만 치료를 해야 하기에 호전이 늦는 것이다.”
“어혈이 있는 장소를 정확히 알 수가 있단 말입니까?”
조윤이 놀라서 되물었다. 현대에서야 X-ray나 CT, 또는 MRI 같은 의료 기계가 있어 혈종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지만 이 시대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한데도 혈종이 있는 위치를 알 수가 있다니, 신기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느냐?”
당자기는 약간 우쭐하며 실력을 한번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손을 내밀어 보아라.”
“네? 네.”
조윤이 손을 내밀자 당자기가 완맥(腕脈)을 잡았다. 그걸 본 백모연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완맥을 잡은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상대를 죽이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럴 리는 없었지만 혹시 또 몰라 백모연은 암암리에 내공을 끌어 올렸다.
“온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네.”
당자기가 붙잡은 조윤의 완맥을 통해 아주 미약하게 기(氣)를 흘려보냈다.
일반적으로 병세를 볼 때 의원들은 사진(四診)을 한다. 사진이란 망진(望診), 문진(聞診), 문진(問診), 절진(切診)을 뜻한다.
망진은 상대의 얼굴이나 피부색, 걸음걸이나 자세 등 외향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병을 판단하는 것이요, 문진은 환자의 숨소리와 말을 듣거나 냄새를 맡아 판단하는 것이고, 문진은 환자에게 증세를 묻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절진은 맥을 보거나 배를 눌러보는 방법을 통해 병세를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공을 익힌 의원들의 경우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었다. 지금과 같이 자신의 기를 상대에게 흘려보내 병세를 판단하는 방법이었다. 그러한 방법은 치료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병이 있으면 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게 된다. 그걸 자신의 기를 이용해서 인위적으로 뚫어주는 것이다.
“됐다. 방금 내가 뭘 했는지 아느냐?”
“아니요. 하지만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 나는 방금 내가 가진 기운을 네 몸속으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네 기운에 순응해서 일주천(一周天)을 시켰느니라. 병이란 몸 안의 기가 원활하지 않거나 막혔을 때 생긴다. 기를 흘려보내면 그러한 증상이 있는 곳을 알 수가 있다. 공부가 깊어지면 마치 직접 눈으로 보는 것같이 선명히 알 수가 있다.”
조윤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당자기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X-ray나 CT, 또는 MRI 같은 현대의 의료 기구들이 필요가 없었다.
조윤이 놀란 얼굴로 멍하니 있자 당자기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줬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윤이 좋게 여겨지지 않았으나 지금은 조금 귀엽게 여겨졌다. 자신을 저리 존경스러운 눈으로 보는데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알아들은 것 같구나.”
“뭘 하느냐? 가르침에 감사를 드려야지.”
백모연의 말에 정신을 차린 조윤이 재빨리 예를 갖추며 인사를 했다.
“굉장히 귀한 것을 배웠습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하하. 아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서 물어라.”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당자기가 기분이 좋은 때를 노려 백모연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부리는 아이가 있는데 이번에 크게 다쳤습니다. 해서 상태를 좀 봐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면 당연히 봐 드려야지요.”
“고맙습니다. 이쪽입니다.”
백모연이 앞장서자 당자기가 그 뒤를 따랐다. 조윤 역시 함께 가며 힐끗 당예상을 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당예상은 무표정하니 고개를 돌렸다.
* * *
“허어…….”
당자기는 크게 감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의문에서 사람이 왔다 갔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자신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다른 의원에게 맡긴 것이 아닌가?
한데 신의문에서 온 의원도 단목태성을 진맥하고는 치료할 수 없다고 포기했단다. 단목태성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되지만 자신의 의술이 신의문에서 온 의원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조금은 기분이 좋았다. 방금까지는 말이다.
‘놀랍구나. 놀라워.’
흑묘는 이미 죽었어야 정상이었다. 한데 숨이 붙어 있었다. 완전히 치료하지는 못했으나 죽어야 할 사람을 살려놓았다.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자기는 다시 한 번 신의문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아주 치료가 잘되었군요. 제가 달리 손을 쓸 것이 없습니다.”
“하면…….”
백모연이 기대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당자기가 고개를 저었다.
“숨은 붙어 있으나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백모연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당자기를 향해 인사를 했다.
“바쁘실 텐데 이리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아 부끄럽군요.”
“아닙니다. 상태를 봐주신 것만도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백모연이 거듭 감사를 표하자 당자기가 예의를 받으며 씁쓸하니 미소를 지었다.
“당 의원님.”
그때까지 조용히 흑묘를 보고 있던 조윤이 당자기를 불렀다.
“할 말이 있느냐?”
“부탁이 있습니다.”
“내게 말이냐?”
“그렇습니다. 제게 의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탁에 당자기가 당황하며 백모연을 봤다. 그녀 역시 조윤이 갑자기 그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다.
“당 의원님은 바쁜 분이시다. 더구나 초면에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꼭 의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조윤이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곳의 의술로는 흑묘를 살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자면 이곳의 의술을 배워 현대 의학을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 의도를 전혀 모르는 백모연은 조윤이 어린 마음에 치기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네가 떼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니거늘.”
“허허. 괜찮습니다. 아직 어리니 그렇겠지요. 음. 마침 예상에게도 함께 동문수학할 아이가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뜻이 저리 완고하니 괜찮다면 제가 한번 가르쳐보고 싶군요. 어떻습니까?”
당문의 비전절기(秘傳絶技)는 독과 암기였다. 그러다 보니 항시 위험이 동반되었고, 의술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춰야 했다.
하지만 독술이 우선이라 의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의외로 적었다. 그래서 의원이라고 해봐야 당자기를 비롯한 너덧 명이 다였고, 그다지 대우를 받지 못했다.
하니 어린 나이에 의술을 배우고자 하는 조윤이 기껍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조윤을 가르치면 자신의 손안에 두고 감시를 할 수가 있어 당이주에게도 이득이었다.
백모연이라고 그걸 모를까?
이에 계속 반대를 했으나 조윤의 뜻이 너무나 완고했다. 결국 당자기가 단목세가에 와 있는 동안만 가르치기로 백모연이 뜻을 꺾었다.
직접 가르치겠다는 당자기를 앞에 두고 계속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차라리 그에게 맡겨 놓으면 당이주가 대놓고 손을 쓰지는 못할 거라 여긴 것이다.
당자기가 가고 나자 조윤은 백모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화나셨어요?”
“아니다.”
“죄송해요. 제 멋대로 정해서.”
“괜찮다. 한 가지만 묻자. 혹시 네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서냐?”
“네?”
“당 의원에게 의술을 배우려는 이유 말이다.”
“아니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버지보다는 흑묘를 치료하고 싶어요.”
백모연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흑묘를 치료하고 싶은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왕지사 시작한 것 열심히 해라.”
“네.”
조윤이 작게 대답하며 종종걸음으로 백모연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