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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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7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12화
212화
둥둥! 둥둥둥!
빠르게 울리는 북소리가 잠깐잠깐 끊어지는가 싶더니, 미친 듯이 달려들던 천사교 무리 중앙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정파연합 무사들은 광기에 찬 눈빛을 번뜩이며 그들을 밀어붙였다.
“놈들이 물러선다! 힘을 내서 밀어붙여라!”
와아아아!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공격해!”
부상으로 인해 약간 처진 상태에서 전세를 살피던 임강령은 그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전체적인 전황은 정파연합이 우세했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천사교가 물러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천사교도는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죽을지언정 물러나지 않는 자들이거늘.
왠지 수상하게 느껴지는 행동.
그는 일단 유원당에게 소리쳐 물었다.
“총군사! 놈들이 물러나고 있소! 어떻게 하실 거요? 끝까지 놈들을 공격할 거요?”
그때 영허진인을 공격하던 기련검마와 혈왕도 공격을 늦추고 뒤로 물러났다.
영허진인은 방어를 공세로 전환하고 먼저 기련검마를 향해 몸을 날리며 검을 뻗었다.
기련검마는 눈을 부릅뜨고 전력을 다해 검막을 펼쳤다.
그사이 혈왕이 영허진인의 측면을 공격했다.
영허진인은 공세를 더 이어 가지 못한 채 혈왕을 향해 검을 틀었다.
혈왕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 틈을 이용해서 기련검마도 뒤로 몸을 날렸다.
영허진인은 한 사람이라도 쓰러뜨리기 위해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순간, 혈문의 장로인 귀혈쌍노가 좌우에서 날아들며 합세했다.
동시에 뒤로 물러서던 기련검마와 혈왕이 다시 공세로 돌아섰다.
그때 유원당이 소리쳤다.
“진인! 물러나십시오!”
영허진인은 뒤늦게 자신이 속은 것을 알고 몸을 허공으로 날렸다.
“어딜 가려고!”
“끝장을 보자, 말코!”
기련검마와 혈왕, 귀혈쌍노가 일제히 영허진인을 공격했다.
순식간에 고수 네 사람의 공세가 영허진인을 뒤덮었다.
찰나였다.
아차! 한 영허진인이 검을 들어 허공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검세였다. 하지만 그 검세에는 영허진인의 전 공력과 수십 년의 깨달음이 실려 있었다.
무당의 전설이라는 태극혜검이 전력을 다해서 펼쳐진 것이다.
고오오오오!
검을 따라서 허공이 이지러졌다.
직후,
콰광!
굉음과 함께 귀혈쌍노가 눈을 홉뜬 채 뒤로 튕겨나갔다.
태극혜검에 정면으로 맞선 기련검마와 혈왕 역시 대여섯 걸음 물러나서 영허진인을 노려보았다.
영허진인은 그 틈을 이용해서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조금 전과 달리 창백하고 굳어 있는 표정이었다. 고수 넷의 합격을 감당하고도 그 정도 선에서 끝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파의 무사들은 물러나는 적을 쫓지 마시오!”
유원당이 모든 정파연합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상주평원을 울리자, 천사교 무리를 쫓아가던 정파연합 무사들이 주춤거렸다.
몇 사람은 유원당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총군사! 놈들을 공격해서 금천장까지 무너뜨립시다!”
“왜 멈추게 하십니까!”
“계속 공격합시다!”
불만 섞인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유원당은 그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적을 지휘하는 숙야돈은 천사지존에 뒤지지 않는 사악한 모사다. 죽음을 두려워 않는 미치광이들이 뒤로 물러설 때는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
게다가 천사지존 호연도광은 아직 얼굴도 내밀지 않은 상태다.
지금 감정을 참지 못하고 적의 의도에 말려들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었다.
“모두 본 군사의 명령에 따르시오!”
“총군사!”
“놈들은 우리가 달려들기만 바라고 있소! 저들이 얼마나 교활한 자들인지 잊지 마시오!”
숙야돈은 유원당이 추적을 금지시키자 입술을 씹었다.
뭐 하나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언제부터 일이 어긋난 걸까?
잔뜩 짜증만 났다.
‘능구렁이 같은 놈! 이 상황에서도 냉정이 흔들리지 않다니. 교주께서 왜 놈을 높이 사는지 알겠군.’
누가 봐도 정파연합이 우세한 상황이다. 우세한 상황에서 적이 물러나면 달려드는 게 당연했다.
더구나 놈들도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피비린내에 반쯤 미친 상태 아닌가 말이다.
놈들이 중앙을 파고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피해를 입힐 작정이었다.
그 후 금천장에서 교주가 나머지 고수들을 이끌고 나오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쫓아오지 않다니!
다시 공격에 나설 수도 없는 상황.
그는 짜증이 난 목소리로 세 명의 고수(鼓手)를 향해 소리쳤다.
“후퇴하라고 해!”
곧 후퇴를 알리는 북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 * *
북궁천은 광풍의 혈전을 처음서 끝까지 지켜보았다.
얼굴이 바위로 변한 듯 표정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확실히 중원은 우리와 싸우는 방식이 다르군요. 우리 같으면 끝장을 볼 때까지 몰아붙였을 텐데.”
장추람이 힐끔 북궁천을 쳐다보고 말했다.
냉호는 장추람보다 조금 더 냉정했다.
“곰 같기는. 그랬다가는 함정에 빠졌을 거다.”
장추람은 인정하지 않았다.
“유원당이 그 정도 함정에 빠질 사람이야? 그가 마음먹고 공격했으면 숙야돈의 머리가 떨어졌을걸?”
그제야 북궁천이 입을 열었다.
“숙야돈은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거다.”
“피해야 천사교 쪽이 더 크게 입겠죠.”
“호연도광이 안 보였다는 걸 잊지 마라.”
장추람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무슨 뜻인지 눈치챘다. 고집을 완전히 꺾진 않았지만.
“그래도 깨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상대가 호연도광만 아니라면.”
북궁천은 나직이 말을 맺고 몸을 돌렸다.
“그만 가자. 이제 호연도광의 요구를 들어줘야지.”
* * *
“가자!”
천광호가 회룡당 대원들을 이끌고 싸움이 벌어졌던 곳으로 향했다.
그들 외에도 각 세력에서 오백여 명의 무사가 나섰다.
천사교 무리가 물러난 평원에는 일천수백의 시신의 널브러져 있었다.
스며든 피로 인해 땅조차 붉게 물들고, 초원에는 수백만 송이 혈화가 피어 있었다.
걸음마다 역겨운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 와중에도 미처 피하지 못한 부상자들이 신음을 흘리며 도움의 손길을 기다렸다.
회룡당원들은 익숙한 솜씨로 부상자들의 상처를 손봤다.
팔다리가 잘린 사람, 배가 갈라진 사람,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 등등.
개중 상당수는 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다.
“끄으으으, 주, 죽여……줘…….”
어떤 사람은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텼다.
“살려줘, 제발 나 좀 살려줘!”
“이, 이봐! 어디 가는 거야? 이 자식아! 나부터 봐달라니까!”
회룡당원을 비롯한 정파연합 무사들은 돌덩이처럼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시신을 묻고, 부상자들을 한쪽으로 옮겼다.
그들이 평원을 정리하는 동안 천사교도로 보이는 자 몇 명이 멀리서 지켜보았다.
오늘만큼은 그들도 뒤처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방해는커녕 큰 소리로 외쳐서 천광호의 화를 돋웠다.
“정파 놈들아! 네놈들이 쳐들어왔으니 깨끗이 치워 놓아라!”
천광호가 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개자식들아! 동료들을 외면하는 네놈들은 정말 후레자식들이다!”
“푸하하하!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어차피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뭐하러 우리가 손댄단 말이냐!”
“에라이, 씨발놈들아! 네놈들은 부모가 돌아가셔도 내버려 둘 거냐!”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는데 더 무슨 말을 하랴.
결국 천광호도 말싸움을 포기했다.
“에이, 개자식들. 저런 것들하고 말을 섞어 봐야 내 입만 더러워지지.”
시신과 부상자를 정리한 정파연합은 뒤로 십여 리 물러난 후 여명산 기슭에 도착해서야 휴식을 취했다.
단 한 번의 격돌치고는 예상보다 많은 피해를 입었다.
믿었던 영허진인조차 적의 고수 둘에게 막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단숨에 승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정파연합 고수들에게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그나마 적시에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무턱대고 힘으로 밀어붙였다면 천사교의 술책에 말려들어서 더 많은 피해를 봤을지도 모를 일.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의 중압감으로 인해 사람들의 굳은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천군호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총군사, 어떻게 하실 거요?”
“칼을 뽑은 이상 이제는 물러설 수도 없습니다. 휴식을 취하며 부상자들을 돌보고 나서 다음 공격 계획을 의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천종원이 다가왔다. 좋은 소식이 있는 듯 안색이 밝았다.
“총군사! 섬서의 군웅들이 변성을 무너뜨렸다 합니다.”
유원당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요? 잘됐군요.”
다른 사람들도 굳었던 표정이 펴졌다.
“오오, 그렇다면 다음 공격 때 그들도 참여할 수 있겠소이다 그려.”
“힘을 합쳐서 공격하면 놈들도 당해 내지 못할 겁니다.”
“하하하하, 이제 빛이 보이는군요!”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사기가 다시 열기를 뿜으며 타올랐다.
유원당은 깊게 가라앉은 눈을 금천장 쪽으로 돌렸다.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 했다. 하늘이 우리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기만 바라는 수밖에…….’
* * *
오시(午時) 초(初).
쉬이이익!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퍽!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화살이 아름드리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이 놀라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살펴보았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은 백수십 장까지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화살을 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왔군.’
임강령은 일 장가량 떨어진 곳에 박힌 화살을 착잡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표식도 없는 화살 하나.
그는 그 화살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유원당에게 갔다.
유원당은 공손후, 제갈상과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임강령이 다가오자 뭔가를 눈치챘는지 이야기를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임강령은 간단하게 자신이 온 목적을 말했다.
“그가 왔소, 총군사.”
유원당은 바로 답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뒤쪽에 서 있던 황보청이 의아한 표정으로 임강령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임 대협?”
눈을 내린 유원당이 황보청에게 말했다.
“잠깐 다녀올 곳이 있다. 너희들은 이곳에 남아 있어라.”
“예?”
“시키는 대로 해라. 만약 내 말을 어기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해.”
황보청을 윽박지른 유원당은 공손후와 제갈상을 바라보았다.
“그대들 두 사람이 호위무사들을 이끌고 나를 따라오시게. 함께 갈 곳이 있다네.”
공손후와 제갈상의 얼굴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신데……?”
“의문은 나중에 물어보도록 하게나. 모두 말해줄 테니까.”
황보청과 종리기진을 떼어 놓고 가는 것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공손후와 제갈상을 데리고 가는 것은 임강령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 그는 절로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후와 제갈상은 앞으로 유원당을 대신해서 군사직을 수행하며 정파연합을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실을 알게 되면 최소한 유원당이 세운 계획이 쉽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유원당은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지세를 살펴본다는 핑계를 대고 정파연합이 휴식을 취하는 곳에서 빠져나왔다.
그때 저 멀리 서 있는 자가 보였다. 그자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더니 몸을 돌려서 사라졌다.
정오 무렵.
유원당과 임강령은 공손후와 제갈상이 이끄는 호위무사와 함께 휴식처에서 오 리가량 떨어진 숲에 도착했다.
숲 안쪽에 서서 그들이 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냉호가 말했다.
“호위무사는 두고 들어오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