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2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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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1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201화
201화
1장.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맙소사!
북궁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시위를 쥔 손에 힘이 빠져서 하마터면 화살이 날아갈 뻔했다.
나타난 사람은 죽은 줄 알았던 유원당이었던 것이다.
“유 원주님……?”
“본의 아니게 속인 꼴이 됐군.”
북궁천은 단 몇 마디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했다.
“그럼 죽은 사람은?”
“내 대신 다른 사람이 죽었네. 놈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죽은 척했지.”
“그랬군요. 어쩐지 청 아우와 기진 아우가 찾아오지 않는다 했더니…….”
“그 멧돼지 같은 놈은 너무 순진해서 궁주의 눈을 속일 수 없었을 거야.”
분명 그랬을 것이다.
“우영산장 공격 방식이 이상하다 했더니, 역시나 유 원주께서 뒤에 계셨군요.”
“궁주가 그리 생각했을 정도면 천사교주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다고 봐야겠군.”
북궁천은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호연도광의 말을 따를 생각인가?”
“다른 길이 없지 않습니까?”
망설임 없이 흘러나오는 북궁천의 말에 유원당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북궁천에게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호연도광의 손에서 아기를 빼내지 못하는 한.
“그는 궁주가 약속을 모두 이행해도 아기를 안 내줄 거네.”
북궁천도 호연도광이 매우 특이한 자라는 건 알지만, 그가 끝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내가 어떻게 나올 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요. 그걸 아는 한 나와의 약속을 쉽게 저버리지는 못할 겁니다.”
진아를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시되면 그 분노가 고스란히 천사교를 향할 것이다. 호연도광으로서도 모험인 셈이었다.
“어쨌든 저로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원당은 북궁천의 마음이 워낙 확고해서 자신이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궁주, 호연도광이 내 존재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만…….”
북궁천이 말꼬리를 길게 끌자, 유원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됐군. 그럼 내 목숨으로 협상을 해 보면 어떻겠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호연도광이 내가 생각한 것만큼 대단한 자라면 내 머리의 가치를 높게 쳐줄 거야. 그러니 그에게 내 머리와 아기를 맞바꾸자고 하게.”
“안 되오, 총군사!”
임강령이 대경해서 유원당을 말렸다.
“차라리 내가 죽겠소. 비록 내 이름이 대단하진 않지만 구양영과 등조립을 찾아내 죽인 장본인 아니오? 호연도광이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다면 아기와 내 목숨을 바꿀지도 모르오.”
유원당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임 대협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에게 구양영과 등조립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고 이미 죽은 자들이니까요.”
사실이 그랬다. 호연도광의 성격을 아는 북궁천은 앉아서 적장의 속을 들여다보는 유원당의 판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임강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유 원주를 그들에게 내줄 수는 없소.”
“어차피 죽은 것으로 알려진 목숨인데 아까울 게 뭐 있겠습니까? 더구나 아기가 그들 손에 들어간 일에 제 책임도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건곤일척의 싸움이 벌어지면 저 같은 사람보다 북궁 궁주 같은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만약 제 목숨으로도 안 된다면, 그때 가서 임 대협의 제안을 생각해 보지요. 저와 임 대협의 목숨이라면 혹시 압니까? 호연도광이 마음을 돌릴지.”
강하게 반발하던 임강령의 눈빛이 흔들렸다.
누구보다 북궁천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유원당의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자신과 그를 합친다 해도 북궁천보다 나을 게 없었다.
두 사람이 북궁천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도 있고.
“정말 그렇게 하실 생각이오?”
“다른 방법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도 사실 살고 싶습니다. 살 수만 있다면 살아야지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북궁천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임강령과 유원당이 서로 목을 내놓겠다고 하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떨림이 일었다.
아마 황보청이 이곳에 있었다면 그 역시 자신이 대신 죽겠다고 했겠지.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죽는다는 것.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던진다는 것.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다.
이들은 왜! 무엇을 위해서 목숨을 던지려 한단 말인가?
웃으면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정말 협의와 정의를 지키는 것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수하들이 주군을 위해 죽는 것은 충성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과 비슷한 것 같은데, 내면을 들여다보면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수하도,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정말 알 수가 없군.’
그때였다.
유원당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궁주, 부탁하네. 가서 호연도광에게 한 번만 제의해 보게. 그가 승낙한다면 언제든 와서 내 머리를 가져가게나.”
“궁주, 내 머리도 같이 가져가게!”
임강령마저 무릎을 꿇었다.
가슴이 답답해진 북궁천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대체, 대체 목숨까지 바쳐서 지키려는 것이 뭡니까? 그게 뭔데, 그대들과 상관도 없는 내 아들을 구하는 일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겠다는 거요?”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네. 내 가족들이,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사악한 천사교가 세상을 장악하고 어지럽힌다면 내 가족과 후손들이 어떻게 되겠는가? 강호에 발을 디딘 이상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 그들을 위해서 값지게 던질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이 아니겠나?”
유원당의 담담한 목소리가 북궁천의 가슴 깊은 곳에 거센 격랑을 일으켰다.
가치관의 혼돈.
“뭐가 뭔지 모르겠군요.”
“깊게 생각하지 말게. 궁주는 그저 내가 한 제의를 호연도광에게 말해 보기만 하면 되네.”
북궁천은 파랑이 인 눈빛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며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진아를 구하는 것!
자신에게는 세상에서 그보다 중요한 일이 없다. 하늘이 뒤집어져도 진아를 구해서 려려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들이 목숨을 내놓겠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는 일.
‘그래, 나는 진아만 구해서 돌아가면 된다. 정의? 그딴 것은 진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중원이 어떻게 되든 자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마음 한쪽에서 격렬한 반발이 일었다.
―북궁천, 너무 이기적이구나! 자기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좋아하는 사람들을 죽여도 괜찮다는 거냐? 마제의 자존심은 어디다 버린 거냐?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다, 북궁천!
자신이라 해서 어찌 유원당과 임강령의 죽음을 바랄까. 오죽 절박하면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북궁천은 이를 악물고 혼란스런 마음을 가까스로 다스렸다.
‘후우우우. 그래,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 서둘러서 이분들의 목숨으로 흥정할 필요는 없지.’
소이정을 이용하면 방법이 생길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호연도광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해도 반드시 이들의 목숨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일단 유원당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기로 했다. 그래야 자신이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걸 모를 테니까.
“좋습니다. 가서 호연도광과 흥정을 해 보지요.”
“고맙네, 궁주.”
유원당의 얼굴에 염화시중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도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북궁천은 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야.’
* * *
본래는 북궁천이 안에서 몇 사람을 죽이면 때맞춰서 장추람 등이 소란을 피우기로 했다. 그런데 유원당을 만남으로 인해서 계획이 틀어졌다.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다. 최선을 다해 본 후에 결행해도 늦지 않았다.
용호산 중턱에서 신호가 오기만 기다리던 장추람 등은 별다른 소란도 벌어지지 않고 북궁천이 돌아오자 안도와 아쉬움의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휴우, 다행히 무사하셨군.’
‘쩝, 구자강을 위해서 백 명만 죽일 생각이었는데…….’
‘설마 주군 혼자서 몽땅 죽이고 오신 것은 아니겠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궁금해진 장추람이 슬쩍 북궁천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주군, 그냥 이대로 돌아가실 겁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그럼 구자강의 복수도 다음으로 미루는 겁니까?”
“구자강의 복수는 계산에서 빼도 된다. 대신 구양환을 죽였으니까.”
장추람 등은 구양환을 죽였다는 말에 눈이 커졌다.
“구양환을 죽였단 말입니까?”
“잘 죽였습니다.”
“그 정도면 구자강도 섭섭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중원의 대문파인 삼성궁의 주인을 제물로 바친 셈이다. 그 정도면 괜찮은 복수 아닌가 말이다.
“곧 이 일대가 시끄러워지겠군요.”
“아무래도 그러겠지. 그만 가자. 가서 호연도광을 만나야겠다.”
“호연도광을요? 또 무슨 일로……?”
“가면서 이야기해 주마.”
북궁천은 용호산을 벗어난 후에야 임강령을 찾아갔다가 유원당을 만난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장추람과 냉호, 철교신은 유원당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와 임강령이 한 말에 격동을 금치 못했다.
“거,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군요.”
“역시 주군께서 좋아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가슴이 떨리는데요?”
그들의 반응이 북궁천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하지만 북궁천은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일단 호연도광을 만나 담판을 지을 생각이다.”
장추람이 그 말에 움찔하며 물었다.
“주군, 정말 호연도광이 제안을 수락하면 유원당과 임강령의 목을 벨 겁니까?”
북궁천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최선을 다해 보고, 정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장추람을 비롯한 네 사람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토록 강한 사람이 흔들리고 있다.
그들은 북궁천이 얼마나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지 말을 듣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자신들도 가슴이 격동하는데 주군은 오죽하랴.
* * *
뇌옥의 상황이 발견된 것은 북궁천이 떠나고 일각이 조금 지난 후였다.
죄수가 사라지고 뇌옥 안을 지키던 위사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 세력의 수뇌부 몇 사람이 뇌옥으로 몰려들었다.
“허어,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안 당주는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죽어 있는 거지?”
“혹시 고문을 한 것 아니오?”
“그럴 리가. 고문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 난 것이 없잖소?”
취조는 삼성궁이 맡았다. 그러나 고문에 대해선 아직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고문을 했다면 그것 역시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구양 궁주께서 오시면 알 수 있겠지요.”
“구양 궁주는 왜 이리 늦는 거요?”
군웅들이 웅성거릴 때 백리진이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제가 직접 온 건가?”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들 가슴이 묵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