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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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252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99화
199화
키 큰 장한의 나이는 삼십 대 중반 정도.
활과 화살이 든 동개와 시복을 등에 메고 옆구리에는 천으로 감싼 검을 차고 있었다.
코밑과 턱의 거친 수염, 약간 삐뚤어진 코, 광대뼈에 박힌 큰 점 하나가 눈에 띄긴 해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등에 칼을 멘 텁석부리 장한도 나이는 비슷해 보였는데, 키가 그보다 조금 작고 눈빛이 늑대처럼 날카로웠다.
인피면구를 쓴 북궁천과 본 모습의 적광. 그들이 영서에 도착한 것이다.
“저긴가 보군.”
북궁천이 앞을 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풍령객잔이라고 써진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별말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은 객잔으로 들어가지 않고 객잔의 담을 따라서 골목 안으로 꺾어졌다.
골목 안으로 이십여 장쯤 들어간 그들은 평범한 민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 집의 정문에는 몇 사람만이 아는 비문이 적혀 있었다.
딱! 딱! 딱!
북궁천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요?”
“나야.”
곧 문이 열리고 안에서 임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멈칫했다.
주군의 목소리여서 문을 열어 주었는데 처음 보는 자들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구신지……?”
“나다.”
북궁천은은 불쑥 한 마디 내뱉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연 임표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비켜섰다.
분명히 주군의 목소리였다. 몸집이나 행동도 영락없었다.
그런데 얼굴이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등의 저 활은 또 뭐란 말인가?
“주군이십니까?”
“얼굴에 껍질 하나 썼을 뿐인데 네가 몰라보다니. 돈 들인 값어치는 하는군.”
북궁천은 자신의 변장에 만족해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적광은 묵묵히 따라가고.
임표는 급히 문을 다시 닫고 북궁천을 안으로 안내했다.
북궁천의 말을 들었음에도 그의 의문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은 주군이라 치자, 옆에 있는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장추람보다 조금 작고, 냉호나 철교신, 담운보다는 조금 큰 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상당한 고수 같은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호양곽이나 노중문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북궁천은 방 안으로 들어가서야 두 사람을 인사시켰다.
임표는 이채 띤 눈으로 적광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모를 만도 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무뚝뚝한 적광과 인사를 나눈 그는 북궁천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구자강과 지송문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상황까지.
“……그러던 중 송문이 남긴 흔적을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놈들에게 잡힌 것 같습니다. 지금 담운이 나가서 좀 더 자세한 걸 알아보고 있긴 한데, 순찰이 삼엄해져서 정보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군.”
설명을 들은 북궁천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지송문이 잡혔다면 저들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얻으려 할 터. 그 전에 구해 내야 했다.
“우영산장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봐. 어느 쪽에 어느 세력이 기거하는지, 중요 인물 중 누가 어디에 있는지, 뇌옥은 어디에 있는지.”
* * *
싯누런 등잔불빛이 은은하게 깔린 지하뇌옥 안.
길게 뻗은 지하뇌옥 가장 구석진 곳에는 다른 방과 달리 돌로 벽을 쌓아서 소음을 차단한 작은 석실이 있었다.
그곳이 바로 중죄인을 취조하는 고문실이었다.
그런데 야조도 잠든 밤늦은 시각. 쇠사슬로 결박된 사람 하나가 석벽에 매달려 있는 그 석실에 두 사람이 찾아왔다.
“마제의 명령을 받고 왔느냐?”
둘 중 오십 대로 보이는 자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에 갈색으로 말라붙은 피, 흐트러진 머리카락, 창백한 안색의 지송문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자강의 죽음을 멀리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구할 수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구자강이 사용화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구자강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분노로 가슴이 새카맣게 탄 지송문은 뛰쳐나가려는 발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복수하겠다고 뛰쳐나가는 것은 무의미한 죽음일 뿐.
사실을 알리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복수는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런데 울분을 삭이며 뒤로 물러서는 그의 앞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앞에 있는 구양환이었다.
“왜 정탐을 한 거지? 마제란 놈이 천사교주의 졸개 노릇을 하기로 했다더니, 그것 때문이냐?”
지송문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서 구양환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그런 말을 주군 앞에서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구양환의 눈빛이 새파랗게 번뜩였다.
“흥! 내가 그놈을 두려워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산? 글쎄, 과연 그럴까?”
지송문의 입가에 떠오른 조소가 짙어졌다.
그럴수록 구양환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사실대로 불어라. 그러면 살려 줄 테니까.”
“죽여 보시지. 혀를 깨물 힘조차 없다는 게 너무 원망스러울 뿐이니까.”
“독한 놈!”
구양환의 눈빛에서 독기가 돌았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 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바로 고통인 법.
그는 우측에 서 있는 중년인을 냉혹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추승,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놈의 입을 열어라.”
절검당주 안추승은 굳은 표정으로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라 해서 어찌 구양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까.
명령에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거역할 수도 없는 일.
“알겠습니다, 궁주.”
안추승의 대답을 들은 구양환은 냉랭히 말하며 석실을 나갔다.
“남의 눈을 의식할 것 없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 * *
북궁천과 적광이 도착하고 반 시진가량 지났을 때 삼룡이 차례차례 안가를 찾아왔다.
다행히 한 사람도 정파연합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았다.
북궁천은 그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후 혼자서 거처를 나왔다.
데에엥! 데에에엥!
때마침 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용호산 중턱에 있는 용문사에서 들려왔다.
우영산장으로 향하는 북궁천의 마음이 묵직한 종소리를 따라서 심해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안가를 나온 지 일각 후.
북궁천은 기척도 없이 우영산장의 뒷담을 타 넘었다.
정원의 나무를 발끝으로 찍고 솟구쳐서 지붕 위를 스치듯 날아 넘어간 그는 유령처럼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경비무사 두엇이 전각 밑을 지나갔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로 누군가가 날아갔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지붕 위에 납작 엎드린 북궁천은 임표가 알려 준 전각의 위치를 떠올리며 내부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화톳불이 건물 사이사이서 타오르고 있고,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경비무사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마도 마제의 수하가 잡혔다는 것 때문에 경비를 강화한 듯했다.
한 바퀴 장원을 둘러본 그는 뇌옥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응시한 채 청력을 극대화시켰다.
그 때였다.
바로 그 건물 어딘가에서 들릴 듯 말듯 나직한 웃음이 단절되어서 흘러나왔다.
“크, 크, 크, 큭.”
고통으로 일그러진 웃음.
상대에 대한 조소가 느껴지는 웃음.
모든 것을 포기한 자가 아니라면 어찌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으랴.
순간, 엎드려 있던 북궁천의 모습이 지붕 위에서 사라졌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다. 네가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손을 멈추마. 마제가 이곳에 오기로 했느냐? 언제 오기로 했지?”
안추승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서 지송문을 다그쳤다.
고문을 시작한 지 한 시진째.
그는 뇌옥 한쪽에 놓여 있던 뭉툭한 몽둥이를 사용해서 지송문을 고문했다.
물에 적신 몽둥이는 훌륭한 고문 도구였다.
지속적으로 한곳만 후려치면 그곳에 피가 뭉치고, 맞을 때마다 고통이 배가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뼈마저 박살 났다.
그는 지송문의 허벅지 한곳만 후려쳤다.
얼마나 맞았는지 허벅지 바깥쪽은 살이 뭉개지고 터져서 떡처럼 이지러져 있고, 그곳에서 피가 뭉클뭉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근육만이 아니라 안쪽의 뼈마저 조각조각 부서져 있을지 몰랐다.
“크, 크, 크, 큭. 나는…… 할 말이…… 없다. 죽여…… 라.”
“네놈이 정말 나를 독하게 만드는구나!”
눈을 치켜뜬 안추승은 피로 물든 몽둥이로 지송문의 허벅지를 후려쳤다.
쩍!
피가 범벅된 곳을 몽둥이가 후려치자, 마치 물에 젖은 빨래를 치는 소리가 났다.
다리가 연체동물처럼 흔들렸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지송문은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의 극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봤지만, 잇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흐으으으으.”
“말하라니까! 마제가 언제 오느냐!”
“주, 죽여…….”
지송문이 버티면 버틸수록 안추승도 짜증이 심해졌다.
“죽이기 전에 네놈의 뼈를 잘근잘근 부수어 주마!”
오기가 생긴 그는 몽둥이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뒤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떤 안추승은 고개를 홱 돌려서 뒤를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
그의 앞에 커다란 사람 형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북궁천이 소음을 철저히 차단한 채 뇌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헉!”
안추승이 그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북궁천의 손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와직!
북궁천은 우수로 안추승의 목을 움켜쥐고, 좌수로 마혈을 짚었다.
빠르기가 번개 같아서 안추승의 능력으로는 피할 수조차 없었다.
북궁천은 단숨에 안추승을 제압하고 몽둥이를 든 손을 잡았다.
우두둑!
우수가 부러지며 기묘한 각도로 꺾였다.
목이 잡힌 안추승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게졌다.
“끄으으으.”
북궁천은 소음에 대해서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뇌옥 내부를 지키던 위사 셋 모두 지금쯤 저승에 도착했을 것이었다.
외부에 있는 자들은 비명과 신음이 들린다 해도 죄인이 지르는 것인 줄로만 알 터.
더구나 자신이 소리를 차단해서 어지간한 소리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뼈를 부순다고 했더냐?”
염왕의 목소리가 안추승의 고막을 흔들었다.
흔들림 없는 냉정한 눈.
목을 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그 의미를 깨달은 안추승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는 살고 싶었다. 그래서 강한 압박이 잠시 멈추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말했다.
“나는…… 하라는 대로…… 한 것…….”
“누가 시켰지?”
“궁주…….”
“먼저 가서 기다려라. 구양환도 보내 줄 테니까.”
콰직!
목뼈가 으스러지며 안추승의 머리가 기괴하게 꺾였다.
북궁천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진 안추승을 한쪽으로 던져 놓고 지송문을 바라보았다.
짓이겨진 살점이 피와 범벅된 왼쪽 다리가 축 늘어져 있다. 겉모습만으로도 뼈가 정상이 아닌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