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98화
무료소설 마정록: 보고 들으면서 쉽게 읽는 소설감상
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5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98화
198화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
“어떻게?”
“나와 겨루는 거다. 그리고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졸개가 되는 거지.”
적광의 두 눈에서 투지의 불길이 솟구쳤다. 마음에 드는 제의였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이번에는 적주원도 말리지 않았다.
적광이 천사교로 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제의 졸개가 되는 것이 나았다.
‘소광,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단다.’
* * *
화정루 뒷마당의 월동문을 지나면 제법 조용한 별원이 나왔다.
아직 본격적인 장사 전이어서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어차피 승부를 길게 가져갈 생각이 없는 북궁천은 멀리 갈 것 없이 적광과 이 장 거리를 두고 마주서서 묵혼을 뽑았다.
적광도 도를 빼 들고 사선으로 늘어뜨렸다.
길이 삼 척 오 촌, 폭 세 치에서 다섯 치, 도신에선 피를 머금은 듯 은은한 혈광이 일렁거렸다.
“시작해 볼까?”
적광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탐색이라는 것은 멋 내기 위해 무공을 배운 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생사가 갈리는 생사투에서 탐색은 무슨!
이긴 자만이 나중에 웃을 수 있는 법. 전쟁에선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그는 혈랑도로 광풍을 일으키며 북궁천을 덮쳤다.
도신 전체에서 붉은 회오리바람이 휘돌며 뻗어 나갔다.
막는 것은 뭐든 부숴 버릴 것 같은 패도!
북궁천은 묵혼으로 북성팔검 중 파혼성광을 펼쳐서 적광의 도에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콰광!
귀청을 먹먹케 하는 굉음!
적광은 도세를 비틀어서 충격을 완화시키고 북궁천의 빈틈을 노렸다.
그러나 그가 뚫기에는 완벽한 경지에 도달한 북성팔검의 위력이 너무 강했다.
찰나간에 광풍폭우가 몰아치며 삼초의 공방이 벌어지고, 두 사람이 서 있는 반경 이 장 안이 먼지가 일며 들썩거렸다.
몇 초의 공방으로 적광의 무위를 대충 확인한 북궁천은 북천명왕공을 끌어 올렸다.
순간, 패기가 조금 모자란 듯 느껴지던 그의 검세가 돌변했다.
묵혼에서 뻗어 나간 강력한 기운이 단숨에 적광의 도세를 갈라 버렸다.
쾅!
주르륵 물러선 적광은 눈을 부릅떴다.
속이 울렁거리고 팔이 저릿했다.
지금까지 그가 겪어 본 어떤 공격보다 가공할 위력이 실린 검세였다.
문제는 그러한 검세가 상대 공격의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가 검을 단순하게 긋는 것 같은데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가공할 압력이 밀려들었다.
적광은 십성 공력을 끌어 올려서 북궁천의 일자패천검에 맞섰다.
“차아아아!”
마옥의 가장 강력한 도법 중 하나인 광라일섬(光羅一閃)이 펼쳐지며 밀려드는 압력을 두 쪽으로 쪼갰다.
콰르르릉! 콰광!
“흡!”
적광은 외마디 신음을 삼키며 또다시 뒤로 일 장가량 튕겨 나갔다.
바로 그 때!
쿵!
북궁천이 패왕일보를 펼치며 검을 뻗었다.
뒤로 튕겨 나간 적광이 거력에 휘말려서 주르륵 대여섯 걸음을 물러섰다.
여전히 앞을 향해 뻗은 묵혼에서 심혼을 부술 것 같은 무형의 기운이 뻗어 나갔다.
동시에 북궁천의 입에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할 건가?”
적광의 움푹 들어간 눈이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마옥을 단신으로 무릎 꿇린 자신이 십초도 버티지 못하다니.
핏빛 늑대의 투지도 꺾어 버리는 저 패도적인 기세는 또 뭐란 말인가?
수백, 수천 번 싸운 경험을 이용해서 반전을 꾀할 수 있는 것도 실력 차가 그리 크지 않을 때 이야기다.
더구나 상대 역시 싸운 경험이 자신 못잖게 풍부한 자다.
혈랑도를 축 늘어뜨린 적광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내가 졌다.”
* * *
북궁천이 호양곽과 적광을 대동하고 벽성장에 돌아온 것은 술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주군!”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장추람 등이 문 앞까지 달려와서 맞이했다.
평소와 다른 그들의 행동에 북궁천이 이마를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장추람이 구자강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북궁천의 표정이 서리라도 내린 것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그게 사실이야?”
“예, 주군. 일단 담운을 보내서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무사는 칼날 위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다.
북천의 무사치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한 자루 검을 들고 북천을 종횡했던 북궁천 역시 그 사실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안다.
가까웠던 사람이 죽어 간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하지만 손발과 같았던 구자강의 죽음은 그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늘이 내 등을 떠미는군. 그러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는 분노를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냉랭히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으로 들어가서 나누자.”
방 안으로 들어간 북궁천은 먼저 적광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시켰다.
“인사해. 이름은 적광. 앞으로 함께 지낼 사람이다.”
“반갑소, 장추람이오.”
냉호와 철교신도 이채를 반짝이며 인사를 나누었다.
“난 냉호요.”
“철교신이우.”
세 사람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피를 끓게 하는 자였다.
‘늑대 같은 자군.’
‘누군데 주군께서 데려온 거지?’
‘칼을 쓴단 말이지?’
놀란 것은 적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셋 다 자신의 아래로 보이지 않았다. 전력을 다한다 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자들.
특별할 것 없는 장원에 무슨 놈의 고수가 이리도 많단 말인가?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주위에 강한 자들이 많다는 것을 즐거운 일이었다.
그 때 북궁천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앉아라.”
탁자 주위로 장추람 등이 앉자 북궁천이 입을 열었다.
“지송문의 행방이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면, 그도 잡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군.”
아니면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 처했든지.
장추람도 같은 생각이었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더 기다릴 시간 여유도 없는데 등까지 떠민다.
하늘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가?
그렇다 해도 북궁천은 피하지 않기로 했다.
“마침 준비도 대충 마쳤으니 저녁을 일찍 먹고 출발하도록 하자. 나머지는 가면서 생각하도록 하고.”
“예, 주군.”
간단하게 결정을 내린 그는 품속에서 인피면구가 든 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장추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뭡니까?”
“앞으로 사용할 얼굴.”
“예?”
“이런 걸 파는 곳이 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 살 걸 그랬어.”
냉호는 인피면구를 알아보았다.
“그게 인피면구라는 겁니까?”
“맞아. 아무래도 얼굴을 감추고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변장 도구를 사려고 했는데 마침 이게 있더군.”
철교신은 인피면구보다 호양곽이 메고 있는 뇌전궁에 더 관심을 가졌다.
호양곽은 칼을 사용하던 자다. 더구나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의 것이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북궁천이 활의 주인일 가능성이 컸다.
“저 활은 뭡니까? 누구 눈알 쑤실 놈이라도 있습니까?”
그가 그 말을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북궁천의 궁술은 북천 일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났다.
사냥을 나가면 북천제일궁사인 연립과 쌍벽을 이루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대막 백타궁을 상대할 때였다. 백타궁의 간부 하나가 정문 앞에서 거만을 떨며 북궁천을 애비도 없는 애송이라고 놀린 적이 있었다.
그때 북궁천이 쓰러져 있던 궁사의 활을 주워서 오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던 그자의 눈을 꿰뚫어 버렸다.
그 사건 이후 북궁천이 활을 들기만 하면 적은 방패나 벽 뒤로 숨기에 바빴다.
“얼굴만 바꾸기도 뭐해서 여차하면 묵혼 대신 쓰려고. 인피면구를 제값 주는 대가로 얻었는데, 알고 보니 그놈 물건이더군.”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좋을 대로 해.”
철교신이 손을 뻗어서 뇌전궁을 잡았다.
그는 시위를 두어 번 당겨 보더니 탄성을 내질렀다.
“이야, 굉장하군요!”
“어쩌면 그놈이 한 건 할지 모르겠다. 그 정도면 오백 보는 가볍게 나갈 것 같거든.”
“이제 주군의 눈 밖에 난 놈들은 방패 뒤에 숨어도 소용없겠는데요?”
앞에 있는 뇌전궁은 생각만으로도 오싹할 만큼 강력한 탄성을 지닌 명궁. 어지간한 방패는 종잇장처럼 뚫어 버릴 것 같다.
앞으로 중원은 새로운 공포에 떨어야 할 것이다.
“교신, 연소랑이 찾아온 것도 말씀드려.”
냉호가 뇌전궁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철교신에게 말했다.
철교신이 그제야 뇌전궁을 내려놓고 연소랑이 찾아온 일에 대해 보고했다.
“연소랑이 왔었습니다, 주군. 가린이라는 아이 때문에…… 일단은 모른다고 대답하라 했는데, 저희가 떠나면 그 아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금가린을 욕심 많은 늙은이에게 넘겨줄 순 없는 일.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남겨 둘 수도 없고, 정화문 때문에 연소랑에게는 맡길 수가 없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북궁천이 뒤쪽에 서 있는 이조량과 호양곽을 돌아다보았다.
“양곽, 그 아이와 조량을 적주원에게 데려가라. 그리고 조량,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 아이를 지켜라.”
호양곽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주군.”
“대형, 제가 꼭 가야 합니까?”
이조량은 북궁천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북궁천은 이조량마저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매우 중요한 아이다. 너를 믿기 때문에 맡기는 거다. 너는 그 아이를 지키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라.”
북궁천의 단호한 목소리에 이조량도 더 이상 고집부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형.”
북궁천의 눈이 이번에는 노중문을 향했다.
“중문, 너는 곽태문과 함께 금천장의 상황을 철저히 살펴봐라. 사소한 것도 놓치지 말고.”
“예, 주군.”
북궁천은 일찍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인피면구를 착용했다.
먼저 접착제를 인피면구 안쪽에 얇게 발랐다. 그리고 반쯤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굴에 썼다.
얼굴 크기를 비교해 보고 썼는데도 경계 부분이 어색했다.
그러한 곳은 진 노인이 준 살색 염료를 붓으로 찍어 발라서 표가 나지 않게 했다.
북궁천의 뒤를 이어서 장추람과 냉호, 철교신이 인피면구를 썼다.
이질감이 들긴 했지만 기분 나쁠 정도는 아니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된 상태.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바뀐 동료의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
10장. 인과응보
낮부터 불어 대던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나무들이 꺾어질 듯이 휘어지고, 나무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숫돌에 칼 벼리는 소리처럼 들려서 산속 길을 걸으면 스산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덕분에 여름을 재촉하던 날씨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먼지가 일어 안개처럼 뿌연 하늘 때문인지 기분은 더욱더 깊게 가라앉았다.
‘모든 것을 배제하고 진아만 생각하자.’
세찬 바람에 휘날리며 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치울 생각도 않고 앞만 바라보며 걸은 지 벌써 이각째.
구름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민 석양이 시뻘건 구슬처럼 변해서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해시 무렵. 키가 큰 장한과 텁석부리 장한이 영서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