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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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61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95화
195화
숙야돈이라 해서 어찌 그러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영서의 패배와 변성의 싸움으로 인한 피해가 커서 역공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오나 현재의 전력으로는…….”
그가 머뭇거리자 호연도광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이 화살처럼 꽂혔다.
“그대는 다 좋은데 간이 작아. 완벽을 추구하는 것도 물론 좋지. 하지만 때로는 무모하다는 생각이 드는 계책도 확신만 서면 망설이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어야 천하를 움켜쥘 수 있는 법이니라. 본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숙야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알겠습니다, 교주.”
“위기는 반드시 기회를 동반하는 법.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계획을 짜서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보고해.”
“예, 교주.”
“계획을 짤 때, 초청한 자들과 마제까지 염두에 두도록 해라. 그들이 죽고 사는 것은 생각지 말고 놈들을 모조리 피바다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그물을 설계해 봐.”
말을 맺는 호연도광의 표정에 기괴한 웃음이 피어났다.
그걸 본 숙야돈의 몸이 후드득 떨렸다.
어이없는 생각일지 몰라도, 교주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위기를 맞은 지금까지 지켜보기만 한 것도 자신이 원하는 시기를 기다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극적인 역전의 강렬한 쾌감을 맛보기 위해서!
세상을 조롱하기 위해서!
‘설마…….’
* * *
영허진인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정파연합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그 열기가 얼마나 거센지 영서에 머물고 있던 구자강이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영허진인이란 도사가 그렇게 대단한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북천마제만 하랴!
내심 조소를 지은 그는 태연하게 영서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한 듯하자, 임시로 얻은 안가(安家)로 향했다.
안가는 골목 깊숙한 곳에 있었는데, 빈집을 잠시 빌려서 사용 중이었다.
그런데 그가 대로에서 골목으로 꺾어지려 할 때 무사 다섯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구자강은 그들을 보고 골목 쪽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그 때 다가오던 자들 중 하나가 그를 불렀다.
“잠깐만 멈추시오!”
고개만 돌린 구자강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무슨 일이오?”
“어느 문파에 속한 분이시오?”
“뇌검문 제자요. 천사교를 물리치는 데 힘을 보탤까 하고 온 사람이오.”
“흠, 그래?”
다섯 무사 중 등에 도를 멘 사십 대 중년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유자강이라 하오.”
“고향은 어디인가?”
“산서요.”
“산서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군.”
“별말씀을. 미약한 힘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소.”
“걱정 마시게. 그대 정도면 큰 힘이 될 테니까.”
“과찬이오.”
“말투에 태원 사투리가 섞인 것 같은데, 고향이 태원인가?”
“그렇소.”
구자강은 중년인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들은 중년인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나는 언충이라고 하네. 친구들이 청월도라고 불러 주고 있지. 나도 고향이 태원인데, 자넨 태원 어디에서 살았는가?”
태원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구자강은 대충 얼버무렸다.
“태원이 고향이긴 한데 어릴 때 떠나서 잘 알지 못하오.”
“그럼 어디서 살았는가?”
“태행산 쪽에서 살았소.”
“호오, 태행산 쪽이란 말이지?”
“그렇소.”
“몇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 여기선 좀 그렇군. 우리와 함께 가세.”
“어디로 말이오?”
“우영산장.”
“사람을 만나기로 약속해 놓아서 지금은 그럴 수가 없소. 나중에 찾아가겠소.”
“지금 가야 하네.”
“약속을 어길 순 없소. 미안하오.”
구자강은 언충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런데 그가 포권을 취하고 몸을 돌린 순간 사방에서 무사들이 몰려왔다.
‘제길!’
대충 세어도 이십여 명. 대부분 정예무사들이고, 개중에는 절정고수도 두세 명 섞여 있다. 당장 눈앞의 언충만 해도 상당한 고수고.
이들만 상대해도 버거운데, 탈출하기 위해 싸운다면 또 다른 자들이 몰려올 터.
더구나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있다면 주군께 피해만 끼칠 게 분명하다.
잠깐 망설이며 머리를 굴린 그는 싸움을 포기했다.
이들은 아직 자신의 정확한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변명을 하며 계속 버티면 빠져나갈 기회가 올지도…….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몰라서 묻는가?”
“내가 첩자라도 된단 말이오?”
“그건 조사해 보면 알겠지.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사과하고 풀어 줄 거네. 하지만 반항하면 우리도 독하게 손을 쓸 수밖에 없네.”
그 때였다.
“오호, 이게 누구신가?”
한 사람이 조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를 본 구자강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구겨졌다.
다가오는 자는 구양환의 오른팔인 검신대주 사용화였다.
“천사교주와 협상을 했다는 마제의 졸개가 아닌가?”
‘젠장!’
사용화가 자신을 알아본 이상 이제는 상황이 조금 전과 달라졌다.
더구나 상대는 북궁천이 천사교주와 협상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지 않은가.
팍!
땅을 박찬 그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잡아라!”
“어림없다!”
정파연합 무사들이 몸을 날리며 퇴로를 막았다.
허공에서 검을 빼 든 구자강은 자신을 막는 자들을 향해 검을 뻗었다.
쩌저정!
강력한 검격에 두어 명이 튕겨 나갔다.
그러나 포위망이 두터워서 구자강은 빠져나가지 못하고 땅에 내려서야만 했다.
“흥! 빠져나가지 못한다!”
사용화와 언충, 검을 든 백의중년인이 땅에 내려선 그를 향해 몸을 날리며 공격했다.
일대일로는 구자강이 그들보다 강했다. 하지만 세 사람을 혼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구자강은 전력을 다해서 대항했지만 십여 초도 지나기 전 옆구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은 구자강은 합공하는 상대를 비웃으며 감정을 건드렸다.
“정파라는 놈들은 떼로 공격하는 걸 좋아하나 보군. 부끄럽지도 않은가?”
언충이 멈칫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중에 합류한 백의중년인도 멈칫했다.
그러나 사용화는 구자강의 격장지계에 말려들지 않았다.
“마의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지. 합공을 해서라도 저자를 잡아야 하오! 공격하시오!”
그가 소리치자 언충과 백의중년인도 망설임을 접고 공격에 나섰다.
다시 격렬한 접전이 벌어졌다.
검기 도기가 난무하며 살기가 충천했다. 직경 이 장이 온통 검기의 파편으로 뒤덮였다.
그렇게 칠팔 초가 더 흘렀을 때 구자강의 옷이 두어 군데 찢어지며 피가 배어 나왔다.
내상마저 입었는지 창백한 안색에 입가에선 피마저 보였다.
언충과 백의중년인도 약간의 부상을 입었지만 구자강에 비하면 그다지 심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내외상이 깊어지며 손발이 둔해진 구자강의 눈빛이 잘게 떨렸다.
이대로 잡혀갈 수는 없었다.
‘주군, 아무래도 더 이상은 모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결심을 굳힌 그는 혼신을 다해서 공력을 모조리 끌어 올리고 사용화를 향해 몸을 날렸다.
검과 하나가 되어 몸을 날린 그의 검첨에서 밝은 청광이 번뜩이며 뻗어 나갔다.
“헉!”
검강을 보고 대경한 사용화는 전 공력을 실어서 검을 휘두르며 다급히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혼을 불태우며 공격한 구자강의 공세를 완전히 막아 내지는 못했다.
쩌정!
“크억!”
불로 지진 것 같은 극통에 사용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용화의 검을 튕겨 낸 구자강의 검이 어깨를 가르며 비파골마저 잘라 버린 것이다.
그러나 언충과 백의중년인도 바라만보고 있진 않았다.
구자강이 사용화를 공격함과 동시에 그들도 구자강을 공격했다.
검강을 펼치기 위해서 공력을 과도하게 쏟아 낸 구자강이었다. 더구나 부상이 심한 상태. 그로선 두 사람의 공격을 막아 낼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개처럼 끌려가느니 깨끗하게 죽으리라!
처음부터 그렇게 결심한 그였다.
사용화의 어깨를 갈라 버린 그는 몸을 돌리고 차가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찰나, 날아든 검이 가슴을 가르고 심장에 꽂혔다.
서걱! 푹!
구자강은 그 상태에서 하늘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오늘따라…… 북천의 하늘이…… 보고…… 싶군.”
설마 피하지 않고 죽음을 택할 줄이야!
언충과 백의중년인은 구자강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얼굴이 붉어졌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정당치 못한 승리라는 걸. 구자강이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걸.
털썩.
구자강이 뻣뻣한 자세 그대로 천천히 넘어갔다.
여전히 웃음 띤 표정으로.
* * *
시간이 오후로 넘어가면서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거세진 바람이 양치기처럼 구름을 몰고 오면서 쾌청하던 하늘이 구름으로 빠르게 메워졌다.
그리고 결국 해마저 구름에 가려지자, 그러잖아도 무겁던 벽성장의 분위기가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북궁천이 호양곽을 앞장세우고 벽성장을 나선 것은 그때쯤이었다.
그런데 북궁천이 외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연소랑이 그의 거처로 찾아왔다.
“이봐, 돌덩이.”
마당을 가로지르던 철교신은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팽! 소리가 나도록 돌렸다.
연소랑이 빤히 바라보면서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위처럼 묵직한 그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나, 나처럼 부드러운 돌덩이 봤소?”
“생긴 게 영락없이 돌덩이잖아. 듣기 싫으면 말해. 그렇게 안 부를 테니까.”
싫긴?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왜 부른 거요?”
“당신 대형, 어디 갔어?”
“잠깐 볼일이 있다며 나가셨소.”
“에이, 뭐 좀 알아보려고 했더니.”
투덜거리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철교신은 그녀가 돌아서기 전에 재빨리 말을 붙였다.
“나에게 물어보시오.”
“돌덩이에게? 차라리 목상에게 묻는 게 낫겠네, 뭐.”
돌덩이보다는 나을 테니까.
모욕적인 말인데도 철교신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동안 장추람이나 냉호에게 숱하게 들었던 말이니까.
그들이 자신을 퉁명스럽게 부르는 것보다는 연소랑이 예쁜 눈을 흘기면서 묻는 게 훨씬, 백배는 나았다.
“그래도 혹시 아오? 내가 아는 것일지.”
“그래? 그럼 물어볼게. 혹시 말이야, 이전 금천장주의 아들이 여기 있어? 누가 찾던데.”
말해야 하나?
철교신은 잠시 고민했지만 연소랑을 위해서라면 주군께 혼나는 모험쯤 못 할 것도 없었다.
“있소.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쇼. 주군께서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말하지 말라고 했다고? 그런데 왜 나에겐 말하는 거지?”
“그야 연 소저니까 말하는 거요.”
“나니까? 단천이 나에게는 말해도 된다고 했어?”
“그건 아니고…… 그, 그냥 내가 말해 주고 싶어서…… 어쨌든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마쇼.”
말을 더듬는 철교신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피부가 검어서 표가 거의 나진 않았지만.
고개를 살짝 튼 연소랑이 그런 철교신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돌덩이, 혹시 나 좋아하는 거 아냐?”
철교신의 얼굴이 확연히 표 날 정도로 빨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