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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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89화
189화
“이쪽은 걱정 말고 앞에 있는 자들을 상대하게!”
임강령은 쌍장을 휘두르며 악을 쓰는 그에게 좌측을 맡긴 채 적을 상대했다.
그런데 반 각가량 지났을 때였다.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등조립과 임강령과의 간격이 이 장으로 줄어들었다.
“저와 등 형이 뚫리면 끝장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내야 합니다!”
임강령이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그와 등조립이 뚫리면 적이 해일처럼 밀고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생길 판이었다.
“걱정 말게! 얼마든지 덤벼 봐라, 철구경!”
등조립이 답하며 쌍장을 휘둘렀다. 그는 철구경과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치열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철구경과 싸우던 등조립이 임강령 쪽으로 주르륵 물러섰다.
임강령이 전력을 다해서 삼검을 휘둘러 자신이 상대하던 자들을 물러서게 하고는, 철구경이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아서며 소리쳤다.
“등 형! 조심하십시오!”
“죽음을 각오하고 진세를 유지해라!”
백화청도 악을 쓰며 백검맹 무사들을 독려했다.
백검맹 무사들은 힘겨운 싸움 와중에도 진세를 유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때였다.
임강령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등 뒤에서 밀려드는 은밀하면서도 강력한 기운!
그 기운의 정체를 짐작한 임강령은 이를 악물고 몸을 틀면서 충격을 최소화시켰다.
퍽!
“크억!”
비명을 토한 임강령이 한쪽으로 훌훌 날아갔다.
“아우!”
“임 형!”
칠팔 장 떨어져 있던 백리진과 관호명이 기다렸다는 듯 임강령 쪽으로 날아왔다.
그들이 워낙 빨리 날아와서 철구경은 안쪽으로 진입하다 말고 멈춰 서야 했다.
“임 아우가 철가 놈에게 당했네! 내가 놈을 막을 테니 임 아우를 지켜 주게!”
물러섰던 등조립이 노성을 내지르며 다시 철구경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돕겠소! 관 형은 임 아우를 지켜 주시오!”
백리진이 등조립 옆으로 날아가며 외치자, 관호명이 즉시 임강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리진은 곧장 철구경을 향해 전력을 다한 공세를 펼쳤다.
검강이 피어난 검세가 폭풍처럼 밀려가자 철구경이 아쉬운 표정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백리진이 홱 몸을 틀더니 등조립을 공격했다.
쉬이익!
등조립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일 장 거리에서 급습한 백리진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 낼 순 없었다.
“크헉! 이게 무슨……!”
가슴과 어깨가 길게 갈라진 등조립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르륵 물러나서 백리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백리진은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재차 공격을 펼쳤다.
그사이 백화청이 철구경을 막아서고 관호명마저 등조립을 공격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백검맹 무사들이 동요했다. 하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조관수와 추혼검단주 예극생, 폭품검대주 주원호가 무사들을 다그쳤다.
“동요하지 말고 적만 상대해!”
“백검맹 무사들은 각자의 임무에만 충실해라!”
그 때 임강령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등조립! 이제야 정체를 드러냈구나! 다른 분들은 신경 쓰지 말고 적을 막으시오! 등조립은 적의 주구요! 나를 죽이고 방어벽을 무너뜨려서 적을 중앙으로 끌어들이려다 실패한 것뿐이오!”
한 마디 한 마디 외칠 때마다 입에서 피가 튀었다.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도 일양신장을 맨몸으로 받은 대가는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요를 최대한 빨리 수습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그사이 관호명과 백리진은 등조립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빈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백리진에 의해 부상을 입은 몸으로 두 절대고수의 공세를 막는다는 것은 아무리 등조립이 강해도 역부족이었다.
쾅!
“크억!”
끝내 관호명의 일장이 등조립의 옆구리에 적중했다.
뒤이어 백리진의 검이 허벅지를 훑고 지나가며 등조립의 발마저 묶었다.
“나, 나는 억울…….”
당황한 등조립이 비틀거리며 물러서면서 급급히 변명했다.
그러나 백리진과 관호명에게는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임강령이 등조립을 부르면서부터 손에 땀을 쥐고 긴장한 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은 그들이었다.
등조립이 몰래 손을 쓰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며 속으로 비명을 삼킨 그들에게 등조립의 변명은 가증스럽기만 했다.
“관 형은 적을 상대하시오!”
백리진은 관호명으로 하여금 적을 막게 하고 등조립을 몰아붙였다.
당장 적을 막는 것도 급하지만, 그보다 먼저 정파연합 고수들의 동요를 막아야 했다.
“네놈이 임 아우를 몰래 공격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변명이냐, 등조립!”
“뭐, 뭔가 잘못 알았소, 백리 형. 내가 왜……?”
“흥! 우리가 왜 너를 지켜본 줄 아느냐? 이미 강위당이 네 이름을 말했느니라! 임 아우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네 정체를 드러나게 하려고 너에게 등을 보인 것이다! 네놈이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다, 등조립!”
냉랭히 외친 그는 등조립이 소리쳐서 비밀을 누설하기 전에 제압하려고 재차 공격했다.
악착같이 변명하던 등조립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강위당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자결했지만, 백리진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모르는 그로서는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백리진의 눈에는 어떤 변명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땅을 구른 그는 악귀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얼굴로 발악하듯이 소리쳤다.
“천사교도들은 뒤를 조심……!”
순간, 백리진의 검기가 등조립의 마혈과 아혈을 연이어 찍었다.
철구경이 그 모습을 보고 악을 쓰듯 외쳤다.
“일단 뒤로 물러서라!”
한편.
격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즈음, 소리 없는 움직임이 안개 낀 용호산을 넘었다.
다른 길을 통해서 서진(西進)한 정파연합의 나머지 무사들이었다.
정파연합 수뇌부가 예상하고 있던 시각보다 반 각 정도 빠른 도착이었지만,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등조립 역시 알지 못했고.
용호산을 넘은 그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우영산장을 향해 이동했다.
숲이 담장과 가까워서 적의 접근을 알아채기 힘든 것은 천사교도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천사교도들이 갑작스런 외침에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담장을 넘어가서 천사교도들의 등 뒤를 공격했다.
“으아악!”
“뒤에 적이 나타났다!”
“뭐, 뭐야? 진짜잖아?”
“놈들을 막아!”
그 때였다.
방어에 치중하며 사력을 다해서 천사교의 공격을 막던 우영산장 내의 정파연합 무사들이 일제히 공세로 돌아섰다.
“지원군이 왔다!”
“놈들을 공격하라!”
와아아아아아!
안팎으로 공격을 받은 천사교도들은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우왕좌왕했다.
만우궁은 예상보다 적이 일찍 나타나자 대경했다.
“젠장! 이곳을 빠져나가라!”
* * *
금천장을 빠져나온 북궁천은 곧장 벽성장으로 갔다.
장추람 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북궁천이 진아 대신 웬 꼬마아이를 데려오자 눈만 껌벅였다.
진아는 아직 두 돌도 지나지 않았다. 저렇게 클 리가 없었다.
설마 저 아이를 진아로 잘못 알고 데려온 것은 아니겠지?
“혹시 그 아이가 전 금천장주의 아들이라는 아입니까?”
냉호가 금가린의 정체를 눈치채고 물었다.
북궁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소군은……?”
“구하지 못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은 조금 쉬고 싶으니까. 임표, 네가 이 아이를 돌봐 줘라.”
북궁천은 그 말만 하고 몸을 돌렸다.
누구도 그에게 다시 묻지 못했다.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바위가 박힌 듯 무거웠다.
방 안에서 혼자 이각을 지낸 북궁천은 답답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 마당을 거닐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마음이 착잡하다 못해 아팠다.
‘마음이 너무 쉽게 흔들렸어.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훨씬 좋은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철저히 준비했다.
무사를 칠 할이나 빼돌렸고, 수뇌부의 마음을 흔들기 위해서 안팎으로 일을 벌였다. 소존도 붙잡았고.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호연도광의 연기에 말려들어서 서두르는 바람에 진아를 구하지 못했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려려, 미안하다. 아무래도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 때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 소이정이었다.
북궁천은 홱 고개를 돌려서 소이정을 노려보았다.
기척을 죽이고 뒤로 접근하던 소이정이 화들짝 놀라서 멈춰 섰다.
“난 그냥 오라고 해서 왔을 뿐이야.”
누가 뭐라고 했나? 도둑이 제 발 저린 법이라더니…….
실소를 지은 북궁천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소이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소이정은 천사교도이면서도 천사교도답지 않은 자였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천사교를 배신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천사교를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단지 자신의 외조부 때문에 붙어 있는 것일 뿐.
그는 일단 십여 장으로 된 서류를 품속에서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진아를 구했으면 그에게 주고 떠나려고 품속에 넣어 두었는데, 진아는 구하지 못하고 서류만 건네주는 상황이 못내 안타까웠다.
소이정은 받아 든 서류를 품속에 대충 구겨 넣었다.
“혈도도 풀어 줘야지?”
“그 전에 할 말이 있다.”
“약속을 어기겠다는 거야?”
“약속? 서류를 준다는 약속은 했어도 혈도를 풀어 준다는 약속은 한 기억이 없는데?”
소이정의 얼굴이 울상으로 구겨졌다.
“그,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혈도는 풀어 줘야지!”
“혈도를 안 풀어 줘도 서류를 주서광에게 가져다주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그럼 나는?”
“당연히 그 문제는 따로 계약을 해야지.”
“도동놈…….”
“뭐?”
북궁천은 알아듣고도 모른 척했다.
소이정은 한 자나 튀어나온 입술을 잘게 떨며 분노를 꾹 참았다. 대들어 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무슨 계약을 하자는 거냐고.”
“은잠술이 그럭저럭 쓸 만하던데, 금화전에도 들어갈 수 있는지 모르겠군.”
‘네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곳에는 들어갈 수 없을걸?’ 꼭 그런 말투였다.
은근히 자존심 상한 소이정은 툭 쏘아붙이듯이 답했다.
“천하제일살수에게 들어가지 못할 곳은 없어.”
“그래? 그럼 그곳에서 뭔가를 훔쳐 올 수도 있겠군.”
“들어갈 수는 있어도 물건을 훔칠 수는 없는 곳이야.”
“왜?”
“가지고 나오기가 힘들기 때문이지. 더구나 아기처럼 큰 것은 더욱 갖고 나올 수 없어.”
소이정도 눈치는 있어서 북궁천이 왜 그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북궁천 역시 소이정이 단독으로 아기를 훔쳐 낼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도와준다면?”
“그럼 뭐,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한번 해 보겠나?”
‘할 수 없어. 못 해!’
소이정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고 북궁천만 노려보았다.
그런데 북궁천의 눈빛과 마주치자 목구멍에서 뱅뱅 돌던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씨발, 나는 저런 눈빛에 약한데.’
절박한 아픔이 느껴지는 눈빛. 사정을 알기 때문에 눈빛의 의미가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어릴 적 자신을 외조부에게 맡기고 죽어 가던 어머니의 눈빛 같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