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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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9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88화
188화
금가린은 털썩 무릎을 꿇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그 아저씨라는 말 좀 안 하면 안 되냐?”
“예? 그럼……?”
“내 이름은 북궁천이다. 단화린이기도 하고. 북궁 공자나 단 공자, 둘 중 하나로 불러라.”
“알겠습니다, 북궁 공자님.”
“그런데 운평이란 자가 봉을 돌려서 문을 다시 열 수도 있잖느냐?”
금가린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안에서 조종하기 전에는 열리지 않아요.”
“밖에서 열 수 없도록 문을 완전히 봉쇄했단 말이지?”
“예.”
그렇다면 그리 나쁜 일도 아니다.
천사교 놈들도 들어오지 못할 테니까.
“좋아. 그럼 계속 가자. 한 번만 더 나를 속이려 하면 정말 혼날 줄 알아라.”
“걱정 마세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구불구불 이십 장을 전진하자 석문이 나왔다.
금가린은 망설이지 않고 석문을 열었다.
석문 안쪽은 가로세로 삼 장 크기의 석실이었다.
석실 안에는 좌대가 길게 늘어서 있고, 그 위에 온갖 진기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만금의 가치가 나가는 보물도 있었고, 가치를 알 수 없는 무척 오래된 골동품들도 있었다.
“굉장하군.”
석실을 둘러본 북궁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그뿐. 그는 대충 석실을 둘러본 후 금가린을 재촉했다.
“밖으로 나가는 길이 이 안에 있느냐?”
금가린은 보물을 보고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 북궁천이 더 놀라웠다.
“북궁 공자님은 이 물건들이 욕심나지 않으세요?”
“왜? 욕심난다고 하면 줄 거냐?”
“갖고 싶은 것 있으면 가져가세요.”
“됐다. 지금은 이런 보물보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더 급하다. 동생이나 다름없는 수하들이 천사교도와 싸우고 있거든. 아직 못 빠져나갔으면 도와줘야 한다.”
보물을 챙기는 것보다 수하를 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
가슴이 찡하니 울려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분이야말로 진짜 남자구나!’
금가린은 더 이상 보물을 권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원하는 만큼.
“알았어요. 그럼 저를 따라오세요.”
그때만 해도 북궁천은 알지 못했다.
그날의 일이 훗날 대천금상(大天金商)으로 불릴 금가린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비밀통로는 후원 외곽의 구석진 곳에 있는 낡은 사당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키는 사람도 없는 곳.
더구나 사당에서 담장까지는 십 장밖에 되지 않았다.
금가린의 안내를 받으며 세 번에 걸친 관문을 통과해서 비밀통로를 빠져나온 북궁천은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가 비밀통로로 들어간 지 일각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장추람 등 북천궁 사람들도 전력을 다해서 빠져나간 터라 어디에서도 싸우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빠져나갔나 보군.’
그렇다면 자신도 더 머물 이유가 없다.
아픔이 깃든 눈빛으로 금화전 쪽을 한 번 바라본 북궁천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금가린을 옆구리에 끼고 단숨에 담장을 넘어서 금천장을 벗어났다.
6장. 상옥추제
우영산장을 장악한 정파연합은 부상자를 치료하는 한편으로 산장의 주방에 쌓여 있는 식자재를 이용해서 음식을 만드는 등 부산을 떨었다.
누가 봐도 승리에 도취되어서 긴장이 확연히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 와중에 삼십 대 장한 하나가 상대적으로 호젓한 산장의 뒷담을 슬그머니 넘었다.
그런데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나직한 목소리가 뒷덜미를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나왔는가, 강위당?”
장한은 간이 떨어질 정도로 놀랐지만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담장의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를 본 장한은 웃음마저 띤 얼굴로 태연히 대답했다.
“임 대협이셨군요. 아무래도 경비가 너무 소홀한 것 같아서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려고 나왔습니다.”
강위당은 신도가 소속으로 삼성궁 십이당 중 도선당(刀線堂) 부당주였다. 순찰을 돈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지위.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임강령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 금천장에 가려고 나온 것은 아니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말인지는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제가 첩자라도 된단 말씀입니까?”
“잘 아는군.”
장한, 강위당이 눈을 치켜뜨며 대들었다.
“지금 저를 모욕하시겠다는 겁니까? 증거를 내놓지 못하면 저도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혹시라도 자네에게 명령 내린 사람을 믿고 있다면 기대를 접게. 지금쯤 그도 자네와 같은 처지에 처해 있을 테니까. 구양영이 당하는 걸 봤다면 내 말이 헛소리가 아니란 걸 잘 알 거야. 나는 완벽한 상황이 아니면 검을 뽑지 않거든.”
임강령은 검을 뽑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강위당에게 다가갔다.
“그게 무슨 말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갑자기 땅을 박차고 숲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숲까지는 십여 장 거리밖에 되지 않아서 천하의 고검이라 해도 한순간에 붙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 강력한 기세가 숲 안에서 뻗어 나왔다.
“헉!”
대경한 강위당은 급히 검을 빼 들고 누군가의 공격에 대항했다.
쩌저정!
강력한 기운이 부딪치며 어둠을 흔들었다.
“크으윽!”
강위당은 강력한 반탄력에 뒤로 튕겨진 후 비틀거리며 대여섯 걸음을 더 물러났다.
그 때 숲 속에서 백리진과 관호명이 나왔다.
강위당은 절대고수 세 사람이 삼재의 방위를 막고서 다가오자 대항을 포기하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목을 그어 버렸다.
천사교도의 지독함을 잘 아는 임강령은 어차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던 터라 장한이 자결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목에서 피를 뿜으며 죽어 가는 강위당을 내려다보며 냉랭히 말했다.
“너는 모를 것이다. 네가 자결함으로써 그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는 걸.”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안 강위당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우, 정말 그가 천사교 사람인가?”
백리진이 침중한 표정으로 물으며 임강령을 바라보았다. 강위당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를 몰래 금천장으로 보내려 한 자. 그자에 대해 묻는 것이었다.
임강령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증거가 있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확증이라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워낙 철저히 자신을 숨겨서 죽은 강위당이 가장 유력한 증거일 정도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서 그를 잡을 생각인가? 방법은 있는가?”
“한 가지 있긴 한데…….”
그 때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관호명이 염려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가 간자라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할 거요.”
임강령도 모르지 않았다. 그자는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강호의 운명을 건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한 지금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제 목을 걸 생각입니다.”
* * *
안개가 옅게 낀 용호산을 넘어 그들이 나타난 것은 정파연합이 우영산장을 장악한 지 반 시진이 지날 무렵이었다.
일천오백을 오백씩 셋으로 나눈 천사교도들은 삼면에서 우영산장을 향해 접근했다.
정파연합은 승리에 도취되었는지, 아니면 아직 그럴 시간이 없었는지 별다른 경비태세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척후를 보내 내부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장원의 연무장 중앙에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주방을 뒤져서 음식을 만들고 식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고 했다.
풀어질 대로 풀어진 상황.
그들은 멈칫거리지 않았다.
산장 안에 있는 자들이 대응태세를 갖추기 전에 쓸어버릴 작정이었다.
천사의 영광을 위하여!
“공격해!”
서쪽을 맡고 있던 역천군주 만우궁이 먼저 나직하고 짧게 명령을 내렸다.
거의 동시에 남쪽에서는 야율수가 이끄는 야랑군이, 북쪽에서는 방철산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장로, 수라마검(修羅魔劍) 철구경이 이끄는 오백 교도가 일제히 숲을 빠져나와 우영산장을 향해 달려갔다.
우영산장은 영호산과 어우러져서 경치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하지만 경치가 아름다운 반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취약한 면이 있었다.
우거진 숲이 담장 가까이까지 뻗어 있어서 적이 소리를 죽이고 접근하면 근접할 때까지 알아채기가 힘든 것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짙은 어둠으로 물들고 안개마저 낀 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숲을 나선 천사교도들은 단숨에 이십여 장을 달려가서 담장을 넘어갔다.
그때까지도 산장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천사교도들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산장 안으로 까마귀 떼처럼 날아들었다.
그렇게 그들이 절반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천둥소리 같은 외침이 어둠을 뒤흔들었다.
“적을 막아라!”
넓은 연무장 중앙에서 모닥불이 타올랐다. 나무를 통째로 잘라 피운 것이어서 불길이 열 자 높이까지 치솟았다.
그로 인해서 연무장 일대는 물론 장원 어지간한 곳은 그림자 진 곳만 아니면 대낮처럼 밝았다.
정파연합 무사들은 불길을 등지고서 철저히 방어진을 구축한 채 천사교도를 맞이했다.
숫자에서 세 배나 차이 났지만 고수들이 많은 덕에 방어벽이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더구나 불길을 등지고 있어서 적보다 훨씬 유리했다.
교도들을 독려하며 정파연합을 몰아붙이던 만우궁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보고와 전혀 다른 상황. 승리에 도취되기는커녕 철저한 준비를 하고 기다린 듯했다.
완벽한 방어진. 정파의 절대고수들도 개인적으로 나서지 않고 오직 방어에만 치중하고 있다.
왜?
‘뭔가가 잘못됐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처럼 광분해서 날뛰었다.
“독 안에 든 쥐새끼들이다! 모조리 죽여라!”
“손을 늦추지 말고 벽이 깨질 때까지 공격해!”
“와하하하! 지옥으로 보내 주마, 이놈들!”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후퇴를 명할 수도 없는 일.
방법은 하나뿐이다.
정파 놈들의 방어벽을 최대한 빨리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한줄기 다급한 전음이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호교이령이다. 연락을 받지 못했는가?
만우궁은 눈빛을 번뜩이며 고개를 저었다.
곧 다시 전음이 들렸다.
―제기랄! 일각 후면 놈들의 후속대가 도착할 거다. 내가 도와서 한쪽에 구멍을 뚫을 것이니 그 전에 놈들을 무너뜨려라.
그제야 정파연합의 계획을 눈치챈 만우궁은 악을 쓰며 소리쳤다.
“놈들의 후속대가 올지 모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놈들의 중앙으로 침입해!”
천사교의 공격이 절정으로 치닫던 그 시각.
백화청과 임강령이 이끄는 백검맹 무사들은 방어진 북쪽에서 결사적으로 적을 막고 있었다.
천사교 쪽에선 수라마검 철구경이 이끄는 오백 무사가 물밀듯이 밀려드는 상황.
삼성궁이나 무림맹에 비해서 전력이 뒤지는 백검맹이다 보니 금방이라도 진세가 뚫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등 형! 이쪽을 도와주십시오!”
임강령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오륙 장 근처로 다가온 등조립을 향해 외쳤다.
즉시 등조립이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