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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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0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59화
159화
“하하하, 우리 남패령은 항상 북혈회를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소. 이번에 령주께서 직접 오시려고 했는데 바쁜 일이 있어서 내일이나 오실 거요. 이해해 주시구려.”
남패령에서 온 사자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십년지기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그는 산혈수(散血手) 화진이란 마도고수로 남패령주의 오른팔이었다.
‘항상 친구처럼 생각하기는…….’
연풍척은 코웃음이 나왔지만 겉으로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본인 역시 남패령을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소.”
서마련에서 사자로 온 풍마검(風魔劍) 위척세도 지지 않고 친분 유지를 다짐했다.
“저희 서마련도 북혈회와 더욱 돈독한 관계가 되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회주.”
“그리 생각해 주신다니 정말 고맙소이다.”
“별말씀을. 그보다 동마방에 물을 먹인 친구를 한번 보고 싶군요.”
“허허허, 그 친구는 남 앞에 모습 보이는 걸 워낙 싫어해서 이런 자리에는 잘 나오지 않소. 더구나 연속된 싸움으로 운기행공 중이어서 오늘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으니 이해하시구려.”
그 시각.
화화루를 뒤엎어 놓고 돌아온 북궁천은 연풍척의 말대로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그러나 운기행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침상에 누워서 상념에 잠겨 있었다.
상주에 들어온 지 하루.
생각보다 진아를 향한 거리가 빨리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빠르다 한들 그의 마음을 만족시켜 줄 순 없었다.
‘동마방을 치고 상주의 마도를 뒤흔들어 놓으면 천사교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럴 때 정파연합이 공격해 주면 좋은데.’
그럼 금천장에 침투하는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진아를 구해 내는 것 역시.
‘려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반드시 진아를 구해서 돌아갈 테니까.’
그는 눈을 감고 헌원려려를 떠올렸다.
그런데 하필 그녀의 웃는 모습이 구체적인 형상을 이루어 갈 즈음 밖에서 임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형, 정화문이 찾아왔습니다.”
헌원려려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제길.’
정화문은 쭈뼛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팔짱을 끼고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냉호를 힐끔거린 그는 북궁천 앞까지 다가와서 멈췄다.
북궁천은 헌원려려를 쫓아낸(?) 그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왔소?”
다시 한번 냉호를 힐끔거린 그가 나직이 되물었다.
“금천장의 건물 배치를 알려는 이유가 뭐요?”
“왜 그걸 궁금해하는 거요?”
“그게…….”
“저 친구 때문이라면 걱정할 것 없소. 내 입안에 종기가 나면 치료를 위해 칼을 맡길 수 있는 친구니까.”
그제야 머뭇거리던 정화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아침에 미처 못 다 한 말이 있어서 왔소.”
“눈치 볼 것 없이 다 말해 보쇼. 괜히 몇 번씩 오가지 말고.”
“알겠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금천장에서 잘못을 저질러 쫓겨난 게 아니오. 천사교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후 상주에 머물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이곳에 들어왔을 뿐.”
금천장에서 살아난 사람이 백 명쯤 된다고 했다. 그걸 생각하면 정화문의 말은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북궁천은 눈빛을 빛내며 정화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겨우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밤늦게 자신을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마저 해 보시오.”
정화문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북궁천을 빤히 바라보며 절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라도 금천장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부탁 하나만 합시다.”
“부탁?”
“한 사람을 구해 주시오.”
사람을 구해 달라?
북궁천 역시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들어가려는 것이다.
자신의 앞가림도 못 하고 있는 사람에게 누굴 구해 달란 말인가?
풀썩 헛웃음이 나왔다.
“훗, 금천장은 천사교의 모든 힘이 집결되어 있는 곳이오. 그 안에서 사람을 빼돌릴 수 있다고 보시오?”
“우리가 돕겠소.”
“우리? 혹시 금천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소. 당시 살아남은 사람 중 서른 명 정도가 아직도 상주 안에 있소. 그 사람들은 금천장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우리가 돕는다면 금천장을 들락거리는 일이 훨씬 쉬워질 거요.”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아를 구하는 일에 도움이 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 사람들 중 금천장 안에 있는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정화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다섯이 있소. 비록 대단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요.”
“구하려는 사람이 누구요?”
“전 장주님의 늦둥이 막내아들이오. 이제 겨우 아홉 살인데, 얼마 전에 뇌옥에 갇혀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
* * *
어둠이 깔린 금천장 깊숙한 곳.
숙야돈은 밤늦게 찾아온 수하의 보고를 받고 눈살을 찌푸렸다.
귀안(鬼眼) 교호명. 그는 숙야돈의 오른팔과 같은 존재로 천사교의 정보를 총괄하는 귀안당(鬼眼堂) 당주였다.
그가 늦은 시간에 찾아왔다는 것은 보고할 내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고 내용은 숙야돈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동마방이 흔들리고 있어?”
“예, 사교령. 환금장과 화화루가 당하면서 상주의 분위기가 어제와 완전히 달라져 있습니다.”
숙야돈은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쓰다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주 제일을 뽐내던 동마방이 흔들리다니.
하루 사이의 변화치고는 지나칠 만큼 급격했다.
서로의 눈치를 보며 세력을 키우던 자들이 갑자기 전격적으로 충돌했다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더구나 그 일의 발단이 사대 세력 중 가장 약한 북혈회에서 시작되었다는 게 더 이상했다.
그들을 길들이기 위해선 강력한 충격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런 급격한 변화는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곳을 공격한 자들이 북혈회 사람이란 말이지?”
“예, 사교령. 그들은 처음 대립이 벌어진 영월루에서 나왔는데, 북혈회의 소회주인 연소랑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북혈회가 동마방을 공격하다니. 간덩이가 부었던가, 아니면 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 말인데…….”
남패령과 서마련에서도 북혈회에 사자를 보냈다고 했다. 이 상태라면 동마방도 북혈회를 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찝찝한 느낌이 드는 상황.
곰곰이 생각하던 숙야돈이 교호명에게 물었다.
“어떤 놈들인지 알아보았느냐?”
“지금 수하들이 조사하는 중입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결과가 나오는 대로 보고해.”
“예, 사교령.”
“그건 그렇고, 마제의 흔적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느냐?”
“상주로 들어서는 길목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특별한 보고는 없었습니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으니 놈들이 나타나면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쯤은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예상이 빗나갈 이유는 하나뿐.
“으음, 정말 정파연합과 함께 움직일 생각인가?”
“마제의 마음이 아무리 급하다 해도 몇 명이서 본 교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숙야돈은 느릿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는 자신과 달리 마제와 정파연합이 함께 움직일 가능성을 낮게 봤다.
하지만 하루면 충분한 거리인데도 이틀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면 감정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다.
‘아무리 아들을 구하는 일이 급하다 해도 북천을 제패한 놈이 자신의 감정대로만 움직일 리가 없지.’
현재 마제의 우군은 정파연합 중 일부뿐.
그들과 은밀하게 연락을 취하며 아들을 구해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파연합에 잠입해 있는 아이들이 몇이나 되지?”
“다섯입니다.”
“그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마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탐문해 보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동마방과 관련된 일은 네가 직접 챙겨라. 아무래도 찜찜해.”
“복명.”
* * *
상주 전체에 살얼음이 깔린 것처럼 긴장감이 흘렀다.
양민들조차 밤사이에 큰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비명과 고함이 몸서리쳐지게 울려 댔으니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었다.
북궁천은 밖의 분위기야 어떻든 하루 종일 조양장 별원에서 나가지 않았다.
지금쯤 천사교에서도 어떤 조치가 취해지고 있을 터. 자신을 드러내서 그들의 시선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운공조식과 명상수련을 하며 낮을 보낸 그는 밤이 깊어서야 혼자 조양장을 나섰다.
천사교 귀안당 무사들이 조양장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어둠 속을 야조처럼 날아가는 북궁천의 그림자도 잡아내지 못했다.
잠시 후.
북궁천은 상주 외곽 야산 자락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작은 도관을 바라보았다.
‘여긴가?’
칠이 벗겨진 정문은 슬쩍 밀어도 부서질 것처럼 낡았고, 지붕에는 풀이 무성해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았다.
그나마 정문 위에 칠이 반쯤 벗겨진 현판이 매달려 있어 그곳이 약속 장소인 현도관(賢道觀)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진평천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화화루를 공격한 후 헤어지기 전 진평천이 말했다.
“서북쪽 외곽으로 가면 현도관이라는 작은 도관이 있네. 내일 밤 자시에 그곳으로 오게. 소개해 줄 분들이 있네.”
북궁천은 그가 말한 ‘소개해 줄 분들’이 화산파의 사람이거나 섬서 정파의 고수일 거라 짐작했다.
그로선 그들과의 만남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진아를 무사히 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아수라라 해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그였다.
도움을 주는 자는 친구, 방해하는 자는 적.
끼이익.
정문을 밀자 녹슨 경첩이 안간힘으로 버티며 신음을 내질렀다.
문을 반쯤 열고 안으로 들어간 북궁천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좌측 작은 건물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가 몸을 그쪽으로 돌리자, 건물 옆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나왔다. 어젯밤에 봤던 중년인 중 하나였다.
“단 공자요?”
“그렇소.”
“이쪽으로 오시오.”
간단하게 질문을 던진 중년인은 북궁천을 불 켜진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는 처음 보는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 둘, 그리고 노인 둘이 진평천과 함께 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어서 오게.”
진평천이 담담히 웃으며 북궁천을 반겼다.
두 중년인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고, 두 노인은 심유한 눈빛으로 북궁천을 살펴보았다.
북궁천이 빈자리 쪽으로 다가가 걸음을 멈추자, 진평천이 두 노인을 소개했다.
“인사드리게. 화산파의 장로이신 명원 도장과 종남파의 장로이신 송선 도장이시네.”
그리고 두 중년인을 마저 소개했다.
눈이 가늘고 약간 매부리코인 중년인은 월영신검(月影神劍) 좌일소였고, 볼살이 통통한 중년인은 개벽권(開壁拳) 웅선당이었다.
두 중년인은 섬서를 대표하는 정파고수 십 인에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을 지닌 자들로 진평천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이었다.
북궁천은 그들과도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할 사람이 많아진 만큼 상황이 복잡해질 것은 분명한 일. 하지만 현 상황이 싫진 않았다.
굴러온 넝쿨에 호박이 많이 달렸는데 싫을 이유가 없었다.
“단천입니다.”
“진 대협께 말씀을 들었네. 마도에 몸을 담고는 있지만 진심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하더구먼.”
명원 도장이 먼저 북궁천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북궁천은 부인도, 인정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