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3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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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96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39화
139화
‘머지않아 껍질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겠지.’
* * *
북천궁 사람들과 함께 내향을 나선 북궁천은 남들의 시선을 피해서 서쪽을 향해 달렸다.
아기가 가짜라는 사실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구양우경으로 인해 그 사실을 미리 알게 된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소존이란 놈이 말하기 전에 자신이 한 발 먼저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자신을 이용하려던 상대의 계획에 금이 간 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놈의 생각을 거꾸로 이용해야 해.’
자신이 한두 번 요구를 들어줬다 해서 소존이 아기를 돌려줄까?
절대 그럴 놈이 아니다. 놈은 아기를 이용해서 자신의 뼈골까지 모조리 빼먹으려 할 것이 분명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아기를 되찾아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딴 놈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아기도 찾지 못하고 자신마저 이곳에 뼈를 묻을 수는 없다.
‘살아만 있어라, 진아야. 살아만 있으면 이 아버지가 세상을 뒤엎어서라도 너를 구할 테니까.’
가슴이 먹먹했다. 분노가 활화산 저 깊은 곳의 용암처럼 들끓었다.
하지만 북궁천은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억눌렀다.
지나친 분노는 진아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냉정한 대처만이 아기를 구할 수 있다.
‘침착해라, 북궁천!’
북궁천 일행이 상남에 도착한 것은 새벽 어스름이 밀려들기 직전인 인시 무렵이었다.
상남의 밤거리는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한산했다.
시간이 너무 이른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파연합과 천사교 무리의 싸움에 상남 일대의 양민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밖으로 나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한 번 싸울 때마다 수백 명이 죽어 나가는 판이었다.
싸움이 워낙 큰 데다가 강호 세력 간의 싸움이어서 관과 군조차 모른 척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힘도 없는 양민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상남으로 들어간 북궁천은 객잔으로 가지 않았다.
대로를 그대로 빠져나간 그는 과거 구양우경이 소동동을 납치해 갔던 관운묘로 갔다.
관운묘는 구양우경이 이용하려 했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다. 천사교의 눈을 피해서 하루 이틀 머물기에는 적당한 장소였다.
북궁천은 은자 열 냥을 주고 관운묘를 사흘간 빌리기로 했다.
관운묘를 지키던 노인은 감지덕지하며 북궁천이 원하는 건물을 내주었다. 소동동이 구양우경에게 당할 뻔했던 지하실이 있는 건물을.
북궁천은 아침이 밝자 담운과 지송문에게 명령을 내렸다.
“혹시라도 우리를 알아보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모습부터 바꿔야겠다. 송문과 담운이 상남으로 가서 역용에 필요한 물건과 하루 먹을 음식을 사 오도록 해라.”
“예, 주군.”
그들은 한 시진이 지날 즈음 필요한 물건을 한 보따리 사 들고 돌아왔다.
일단 식사부터 마친 사람들은 지송문에게 얼굴을 맡겼다.
지송문은 무공만 강한 게 아니라, 백변귀도(百變鬼刀)라 불릴 만큼 역용에 있어서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북궁천이 그에게 역용에 필요한 물건을 사 오라 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지송문은 제일 먼저 사람들의 얼굴에 칼부터 들이댔다.
오랫동안 수염을 깎지 않아서 산적처럼 보일 정도였다. 수염만 손질해도 사람이 달라 보일 듯했다.
수염을 깎은 지송문은 각자의 특성에 맞게 머리를 손질하고 얼굴에 누렇고 검은 약재를 발랐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을 그가 구해 온 평범하고 허름한 무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몇 군데만 단순하게 손봤는데도 몸집을 제외한 일곱 명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이상 이조량이나 태극문 제자들이라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문제는 무기였다.
무사는 한 번 본 무기를 쉽게 잊지 않는다. 그런데 장추람의 커다란 검이나 철교신의 창은 물론, 북궁천의 묵혼도 한 번 대적해 본 자는 곧바로 떠올릴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지송문은 검집과 도집을 푸른 천으로 감싸게 해서 급한 대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렇게 모습을 바꾸는 일이 끝나자 북궁천은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냉호, 교신. 가서 한 놈 잡아 와. 될 수 있으면 철은보 내부 상황을 잘 아는 놈으로. 천사교 놈들은 입을 열지 않을 가능성이 많으니까 혈문이나 마종보 놈들 중에서 골라 봐. 갈 때 무기는 놓고 가도록.”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주군.”
장추람도 나서려고 했지만 북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덩치가 커서 남들의 이목을 끌지 모른다. 그냥 여기에 있어.”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북궁천은 장추람을 눌러 앉혀 놓고 인상이 평범한 담운과 지송문을 철은보로 보냈다.
“출세 좀 해 보려고 산서에서 왔다고 적당히 둘러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저들도 신분 확인을 세세하게 하진 못할 거다.”
“예, 주군.”
“임표와 자강은 놈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이상한 점이 보이면 보고해.”
* * *
내향에 도착한 황보청과 종리기진은 북궁천을 찾아갔다.
그러나 북궁천 일행이 머물던 방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황보청은 점소이의 손에 동전을 몇 문 쥐여 주고 북궁천에 대해 물었다.
“언제 떠났지?”
“어제 오전에 떠났습죠.”
그때만 해도 북천으로 가기 위해서 떠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점소이가 돈 받은 대가를 하고 싶은지 머뭇거리며 말했다.
“삼성궁의 대공자께서 찾아오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떠났습니다요.”
“뭐? 구양우경이?”
“예, 소문만 듣고 그러려니 했는데, 진짜 제정신이 아니더라고요.”
“그놈이 왜 대형을 찾아왔단 말이냐?”
점소이는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위를 슬쩍 둘러보며 말을 아꼈다.
황보청은 점소이의 손에 열문을 더 쥐어 주었다.
“말해 봐. 아무에게도 네가 말했다고 하지 않을 테니까.”
그제야 점소이가 바짝 고개를 내밀고 입을 열었다.
“아기를 찾으러 왔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요.”
“구양우경이 아기를 찾으러 왔다고?”
“예, 나으리. 제가 계단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고 구경했는데 말이죠. 그분들이 데리고 있던 아기가 가짜라지 뭡니까요?”
‘이런 빌어먹을!’
황보천은 본능적으로 일이 크게 터졌다는 걸 직감했다.
종리기진도 냉막하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형님, 아무래도 아기 때문에 떠난 것 같습니다.”
떠났다면 북천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기를 찾아야 할 테니까.
황보청은 급한 마음으로 점소이를 다그쳤다.
“그래서 아기는 어떻게 되었지?”
“얼굴이 곱상하게 생긴 분이 데리고 먼저 떠났습니다요.”
“다른 사람들은?”
“두세 분은 마차를 구해서 부상당한 분을 태우고 따로 가시고, 제일 높은 공자님은 다른 무사님들과 함께 가셨습죠.”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객잔을 나온 황보청과 종리기진은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서평을 향해 달렸다.
황보청과 종리기진이 내향을 빠져나갈 즈음, 또 다른 자들이 영화객잔에 들이닥쳤다.
점소이는 그들에게도 비슷한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은자 반 냥을 받아 챙겼다.
‘오늘만 같으면 금방 집 한 채 사겠군. 또 오는 인간들 없나?’
* * *
냉호와 철교신은 건달처럼 어깨를 구부리고 어슬렁거리며 상남을 돌아다녔다.
무기를 놓고 나온 터라 사람들도 그들을 보고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전 내내 돌아다녔는데도 쓸 만한 놈이 걸리지 않았다. 적당해 보이는 놈은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많았고, 처리가 쉬워 보이는 놈은 쓸모가 없을 듯했다.
그런데 미시 무렵, 뒤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객잔에 들어갔을 때 냉호가 괜찮은 먹이를 발견했다.
대낮부터 술을 처먹는 게 마음에 들었고, 가끔 철은보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니 내부 상황도 제법 잘 아는 듯했다.
게다가 일행이 있는데도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니 기다리면 기회가 날 것 같았다.
“저놈 어때?”
“괜찮아 보이는군. 그럭저럭 중간 간부는 될 것 같고. 그런데 성질 좀 있겠는걸?”
“그래야 쉽게 말려들지.”
“하긴. 좋아, 저놈으로 하자고.”
두 사람이 식사를 마쳐 갈 즈음, 목표물이 어기적거리며 일어나더니 객잔 뒤로 가는 게 보였다.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냉호와 철교신은 계산을 하고 객잔을 나왔다.
“어이, 잠깐 나 좀 보지?”
막 뒷간에서 나오던 노굉화는 한쪽 구석에서 손짓으로 부르는 자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
건달처럼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놈이었다.
제법 차갑게 느껴지는 인상. 제 딴에는 무게를 잡는다고 째진 눈을 가늘게 뜬 모양인데, 혈문의 추혈당주가 그 정도 인상에 기죽을 줄 알았다면 오산이었다.
“뭐야, 인마?”
냉호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리 와 봐.
그런 뜻을 담아서.
노굉화는 짜증과 분노가 뒤섞인 기분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흥, 별일만 아니어 봐라. 확,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테니까.’
손가락을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움켜쥔 그는 냉호를 노려보며 다가갔다.
소화도 시킬 겸 모가지를 똑 따서 한 놈 죽이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냉호는 다시 한번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구석진 곳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 건달 새끼가!’
노굉화는 눈을 치켜뜨고 빠르게 따라갔다.
그런데 그가 막 굽이를 돌아간 순간, 좀 전에 본 놈이 아니라 바위처럼 생긴 뭉툭한 인간이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멍청한 자식은 또 뭐……?”
노굉화는 멍청하게 생긴 놈의 따귀를 후려치기 위해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찰나였다.
굼벵이처럼 굼뜨게 생긴 철교신의 주먹이 번개처럼 명치에 틀어박혔다.
퍽!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상대의 모습 때문에 방심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주먹이 너무나 빨랐다.
게다가 거리가 바로 코앞이었다. 술에 취하기도 했고.
몸을 반도 못 틀고 한 대 얻어맞은 노굉화는 입을 쩍 벌렸다.
퍼억!
비명이 튀어나오기 전에 또 한 번의 주먹이 아랫배에 꽂혔다.
배가 뻥 터질 것 같은 충격!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에 짜르르 전율이 일었다.
냉호가 달려들어서 꼬꾸라지는 노굉화의 마혈과 아혈을 제압하고는 포대에 구겨 넣었다.
“꽤 짜릿했을 거다. 저 돌덩이의 주먹맛은 맞아 본 사람만 알거든.”
* * *
냉호와 철교신이 먹잇감을 챙기고 있을 무렵.
지송문과 담운은 철은보의 객당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철은보에 간 것은 정오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 시간을 택한 것은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심을 앞둔 시각. 천사교 무리들도 찾아온 마도무사들에 대한 조사를 자세하게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집무사를 담당하는 자들은 두 사람에 대해서 이름과 출신지만 적고는, 대충 실력을 시험해 본 후 곧장 모집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하긴 북천을 휩쓸고 다니며 숱한 싸움을 겪어 본 두 사람이 아닌가?
그들에게선 마도무사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선천적으로 정파인과는 그 분위기가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