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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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04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17화
117화
천종원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항상 한 발 앞서가는 유원당이다.
그로 인해 적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고, 연합 세력은 한 발 한 발 승리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한데도 사람들은 아직 유원당의 뛰어남을 알지 못하고 있다.
천종원은 조용조용히 명을 내리는 그를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전율이 흘렀다.
천하의 판도가 뒤집히고 있는 상황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
그것은 모사로서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알겠습니다, 총군사.”
그는 나직이 대답하며 진심을 담아서 예를 취했다.
그 시각.
구양환도 북궁천 일행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흡족해했다.
“대단하군. 아주 대단해!”
그는 감탄 반, 흥분 반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화가 굳은 표정으로 좀 더 정확한 상황을 전했다.
“사상자가 백오십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반면 그들 일행은 죽은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호오, 그래?”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했다.
북궁천뿐만이 아니라 나머지도 모두 대단한 고수들이었다.
구양환은 잠시 생각하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유원당이 간부 회의를 소집했다고 했지?”
“예, 궁주. 진원보를 공격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순간, 구양환의 눈빛 깊은 곳에서 한광이 번뜩였다.
“잘됐군. 놈들을 한 번 더 시험해 보려 했는데, 그럴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어.”
* * *
“결국 그놈이 말썽이군.”
호연유는 당장 앞에 있으면 씹어 먹을 것처럼 이를 으드득 갈았다.
“아기를 우리가 먼저 찾기만 하면 놈을 우리가 거꾸로 이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정말 재미있을 텐데…….”
호연유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 보면 구양환도 멍청해. 차라리 아기를 곁에 두고 철저히 지키는 게 나을 텐데 말이야.”
“정파란 자들은 남의 눈을 무서워하지요. 그러니 구양환으로선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타인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이 죽는 것만큼이나 싫었을 테니까요.”
“후후후후, 어리석기는…….”
조소를 지은 호연유는 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좌우간 상곡진과 양평이 피로 물들었으니 놈들은 이곳을 노릴 것이오. 겹겹이 방어막을 구축하고 놈들의 움직임을 철저히 살펴보도록 하시오.”
혈뇌의 얇은 입술이 비틀어지며 미소가 매달렸다.
“걱정 마십시오, 소존. 호교령이 있는 한, 놈들의 움직임은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단화린은 지금 어디에 있소?”
“양평진에 있다고 합니다.”
“놈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화산 같은 놈이오. 항상 주의해서 살펴보도록 하시오.”
“예, 소존.”
* * *
첫 번째 요구를 어렵지 않게 마무리 지은 북궁천 일행은 양평진의 해원객잔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쉬면서 연락을 기다렸다.
그렇게 미시 말쯤 되었을 때 사용화가 그곳에 나타났다.
“또 다른 임무가 떨어졌소.”
싸움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임무란 말인가?
“당신 주인이란 자는 우리 몸이 쇠로 된 줄 아나 보군.”
장추람이 사용화를 향해 냉랭히 쏘아붙였다.
냉호와 철교신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고.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진아를 되찾고 싶은 북궁천은 그의 말을 반겼다.
“잘됐군. 그러잖아도 너무 싱겁게 끝나서 힘이 남아도는데 말이야.”
“주군…….”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추람.”
북궁천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장추람을 향해 손을 젓고 사용화를 직시했다.
“어떤 임무인지 말해 봐.”
사용화는 책을 읽듯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연합 세력이 진원보를 공격할 거요. 당신들은 연합 세력이 진원보를 공격하면 뒤로 들어가서 적진에 최대한 혼란을 일으키시오. 단, 전세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되어야 한 건을 해결한 것으로 인정하신다고 하셨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투다.
적진에 최대한 혼란을 일으키면 된다니, 얼마나 간단한가?
적진 중앙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아기를 넘겨줘야 한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물론 우리도 잘 알고 있소.”
“가서 전해. 만약 아기를 넘겨주지 않으면 내 검이 석검장으로 향할 거라고.”
사용화는 장추람 등이 속을 긁기 전에 황급히 떠났다.
그가 간 뒤로도 객잔의 방 안에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만에 장추람이 침을 튀겨 가며 투덜댔다.
“아예 진원보에 있는 놈들을 우리보고 다 상대하라고 하지? 미친놈들!”
냉호와 철교신 역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북궁천만 살펴보았다.
사용화는 친절하게도 진원보에 있는 적의 상황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장원 내의 숫자만 팔백. 절정고수가 수십.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른 고수도 네다섯 명은 된다 했다.
곡가장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것이다.
여덟 명이 그곳에 들어가서 적을 뒤집어 놓으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말이다.
그런데 북궁천은 새파랗게 눈빛을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흐음, 오랜만에 투지가 끓어오르는군.”
“주군!”
“정말 그들 말대로 하실 겁니까?”
아기를 구하기는커녕 중원에서 뼈를 묻을지 모를 판.
오랜만에 장추람을 비롯한 세 사람은 북궁천에게 큰소리를 쳐 봤다.
하지만 북궁천은 팔짱까지 척 끼고는 위엄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누구냐, 추람?”
억만 근의 힘이 실린 나직한 목소리.
한순간에 대기가 짓눌리고 숨이 턱 막힌다.
경련을 일으키듯 어깨를 부르르 떤 장추람이 두 손을 맞잡고 묵직하게 대답했다.
“주군께선 북천의 주인, 마제십니다!”
“맞아. 내가 바로 마제 북궁천이다. 이제 저들도 곧 북천의 마제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 * *
이튿날.
날이 밝자 내향은 물론 인근에 진을 치고 있던 무사들까지 움직였다.
삼성궁, 천무회, 무림맹, 백검맹, 철군성.
모두 합해 일천오백 명.
그들 외에도 여기저기서 모여든 무사들이 삼백은 되었다.
반면 적은 진원보에 팔백, 그 인근에 오백. 합이 천삼백 정도였다.
누가 봐도 정파 쪽 연합 세력이 유리한 상황.
하지만 그동안 천사교 무리에게 밀렸던 것은 숫자가 적어서가 아니었다. 무공 수준이 떨어져서도 아니고.
―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명령에 철저히 복종한다. 강호의 법도도 따지지 않는다. 아무리 사악한 짓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자들이다. 반면 우리는 저들에 비해서 아무래도 결속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지켜보는 강호인들의 눈도 생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유원당은 정파 연합 세력과 천사교의 차이를 그렇게 정의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천사교의 무리에게 자신들이 밀리는 이유라 생각했다.
누구도 그 말에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유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물론 유원당은 그 이유 외에 또 다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니어서 말하지 않고 있을 뿐.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거다.’
북궁천이 움직이고 있고, 내부의 간자들도 파악된 상태니까.
* * *
정파 연합 세력 무사들이 이동을 시작하던 그 시각.
남양의 암평도국 내실에선 왕두평과 이조량, 태극문 제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수색을 시작한 지 이틀.
암경회 사람들이 남양과 방성, 노산을 경계로 해서 안쪽을 뒤지고 있었다.
갈지자로 이백 리 정도 이동한 상태. 삼성궁과의 거리는 오십 리 정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직 능상악과 비슷한 자를 봤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자는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위험한 장소를 피했을 같소.”
왕두평의 말에 이조량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럼 깊은 산중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봐야겠군요.”
“왕 모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사실 깊은 산중이 안전할 것 같아도 때론 평야보다 더 눈에 잘 띄고 위험한 법이오.”
동호량이 턱을 검지로 긁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많은 곳에 있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렇다고 봐야 할 거요.”
“그렇다면 사람이 아주 없지도 않고 많지도 않은 곳을 찾아봐야겠군요.”
“당장은 그런 곳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있소. 하지만 허를 찌를지도 몰라서 몇 명은 큰 마을을 수소문해 보라고 했소.”
“포원산장 쪽은 어떻습니까?”
묵묵히 있던 초강이 불쑥 물었다.
“설마 그곳으로 갔겠소?”
왕두평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정한과 동호량, 이조량도 같은 생각이었다.
포원산장 주인 서문각과 헌원려려는 친척 간인데, 설마 아기를 이용하겠다는 자들이 그곳으로 데려갔을까?
그런 생각이었기에 포원산장 쪽은 일단 수색에서 제외한 상태였다.
초강 자신도 자신의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지 모르진 않았다. 능상악이 허를 찌를지 모른다는 말에 그리 말했을 뿐.
그런데 막상 말해 놓고 보니 왠지 모르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회주님, 두어 사람만 저에게 붙여 주십시오. 제가 한번 포원산장 주위를 돌아보겠습니다.”
“붙여 주는 거야 어려울 것 없소. 그런데 정말 포원산장 주위를 수색하려는 거요?”
“알아봐서 나쁠 것은 없을 걸 같습니다. 헌원 소저께서 궁금해하실지 모르니 겸사겸사 포원산장의 사정도 알아보지요.”
“알았소. 야무진 아이들로 셋을 붙여 주겠소.”
왕두평이 흔쾌히 허락하자 이정한도 몸이 근질거렸다.
“초 사제, 그럼 함께 나서자. 너는 포원산장 쪽을 돌아다녀 봐라. 나와 호량, 조량은 남소에서 노산 사이의 산촌 마을을 돌아볼 테니까.”
“예, 사형.”
남양을 나선 태극문 제자들과 이조량, 암경회의 무사 셋은 곧장 남소 쪽으로 북상했다.
유시 초, 남소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서 헤어졌다.
이정한과 동호량, 이조량은 더 북쪽으로 올라가고, 초강과 암경회 무사 셋은 동북쪽으로 꺾어지며 포원산장으로 향했다.
* * *
내향의 연합 세력이 움직였다는 소식은 양평의 북궁천에게도 전해졌다.
양평은 나선 북궁천은 남쪽으로 빙 돌아서 서협으로 향했다.
사오십 리 더 돌아가야 했지만, 적의 눈에 들키지 않고 도착하면 그만큼 유리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연합 세력이 천사교 무리를 바로 공격하지는 않을 터.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밤이 늦은 시각.
북궁천 일행은 서협에서 남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궁산의 계곡에 도착했다.
절벽 사이 바위틈에서 불을 지핀 그들은 객잔에서 사 온 음식으로 간단히 저녁을 해결했다.
“장판도(長板島)에서의 싸움, 기억하지?”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은 북궁천이 갑자기 물었다.
그 말에 장추람과 냉호, 철교신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장판도는 육지 속의 섬과 같은 지형이었다. 그 안에 일천 명 가까운 적이 모여 있었다.
사대원로는 공격을 포기했지만 북궁천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단 오십 명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유인했다. 그리고 막다른 협곡으로 들어가서 배수진을 치고 끝장을 보는 싸움을 했다.
그날, 피로 젖은 협곡에는 육백이 넘는 시신이 쌓였다.
북궁천이 벌인 싸움 중 가장 치열하고 무모했던 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