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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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45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09화
109화
방 안에는 구양신걸을 비롯한 삼성궁의 고수들이 몇이나 있었지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해결하고 싶어. 그런데 그대들은 내 마음을 너무 모르는군.”
나직이 입을 연 북궁천의 시선이 다시 백소하를 향했다.
동시에 방 안을 짓누르던 무형지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백소하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당신 아기라도 되는 것 같군요.”
‘맞아. 내 아기지.’
하지만 북궁천은 목까지 솟구친 그 말을 삼키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부인의 말 한마디에 수백 명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아기만 돌려주면 되는데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군요.”
백소하는 다시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좋아요, 솔직하게 말하죠. 사실 나도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 장소를 몰라요. 궁주께선 아실지도 모르지만.”
북궁천의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다.
“부인이 아기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른다? 지금 저를 놀리시겠단 겁니까?”
“사실이에요. 궁주의 말을 전해 듣고 내가 아이를 그곳에서 빼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긴 했지만, 어디로 옮겼는지 장소는 몰라요.”
흔들림 없는 목소리. 눈빛도 잔잔하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구양환이 만약의 상황을 생각해서 부인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것 같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녀가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단순히 려려의 아기여서 옮긴 것은 아닐 것이다. 혹시 아기가 누구의 아기인지 짐작하고 옮긴 건가?’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는 헌원려려와 북천마제의 관계를 그때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 않은가 말이다.
‘제기랄, 능구렁이 같은 작자가 내 아기라는 걸 눈치챘나 보군.’
북궁천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 백소하에게 하나 더 물었다.
“누가 아기를 옮겼습니까? 설마 그것까지 모른다고는 않겠지요?”
백소하는 잠시 망설였지만, 북궁천의 분노가 깃든 눈빛을 보고는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수룡위사대의 능 대주예요.”
“그는 어디 있습니까?”
“아기와 함께 있을 거예요.”
자신만 알기 위해서 돌아오지 못하게 한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구양환밖에 없다는 말.
‘빌어먹을 인간, 정말 철저하게 숨겼군.’
* * *
삼성궁을 나온 북궁천의 표정은 만년설이 얼어붙은 천산의 얼음처럼 차가웠다.
기대가 컸던 만큼 분노도 컸다.
뒤따르는 북천궁 사람들도, 태극문 제자와 이조량도 말 붙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의 입이 열린 것은 십여 리가량 걸었을 때였다.
“확 엎어 버릴까?”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그냥 하는 말 같지가 않다.
장추람이 슬쩍 북궁천의 표정을 살피며 되물었다.
“우리들만으로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구양환과 쥐새끼들을 잡는 것 정도는 충분할 것 같은데.”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때 걸음을 우뚝 멈춘 북궁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우우우, 진아만 아니면 정말 그러고 싶은데…….”
그러다 진아가 다치기라도 하면 평생 후회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성질대로 할 수도 없고…….
눈치를 보던 이정한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못하면 아기에게도 영향이 미칠 수 있습니다. 일단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십시오, 대형.”
자신도 그러고 싶다.
그래야 한다는 걸 왜 모를까?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마음이 문제지.
“좋아, 일단 구양환을 만나 보자. 만나 보면 무슨 말이 있겠지.”
북궁천이 분노를 삭이자, 일행들은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뭐야? 단화린?”
“분명히 그자입니다, 각주.”
잠은각주 천유문은 측근인 천상호에게 보고를 받고 이마를 찌푸렸다.
천상호는 최측근이자 사촌조카로 허튼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공석인 우령주로 삼을 생각마저 하고 있는 터였다.
그렇다면 정말 단화린이 삼성궁에 왔다는 말.
천유문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기를 찾으러 왔다고 합니다.”
천유문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깜박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기라니?”
“서문려려의 아기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야? 서문려려에게 아기가 어디 있어?”
잠은각이 어떤 곳인가?
대공자의 부인이 될 여자였던 서문려려에게 아기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면, 잠은각의 문을 걸어 닫으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천상호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가 영선원까지 갔다는 걸로 봐서, 지난해 여름부터 영선원에서 기르던 아기가 아무래도 서문려려의 아기였나 봅니다.”
“뭐? 그럼 구양우경과 혼인하기로 한 서문려려에게 정말로 아기가 있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각주.”
천유문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번뜩였다.
“그 아기가 구양우경의 아기는 아닐 거다.”
“물론입니다. 구양우경이 서문려려를 만난 것은 작년 봄의 일입니다.”
“서문려려는 원래 이름이 헌원려려고 북천궁의 북천마제가 좋아하는 여인이라고 했지?”
“예, 각주. 그래서 단화린이 그녀를 데려가려고 중원까지 왔다는 게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입니다.”
“상호, 그럼 그 아기의 아버지는 누굴까?”
묻는 천유문의 노안에서 신광이 번뜩였다.
“그 아기의 아버지는…… 억! 설마……?”
무심코 대답하던 천상호가 눈을 홉떴다.
“중간에 다른 남자가 끼지 않았다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북천마제 북궁천!
“그, 그럼 그 아기가 북천마제의 아기란 말이군요.”
“그러니까 단화린이 찾으러 온 것이겠지.”
“그런데 왜 두어 달 전 떠날 때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아마 헌원려려가 정신을 잃는 바람에 미처 알려 주지 못한 것일 수도 있어.”
“그럼 헌원려려가 정신을 차렸다는 말이군요.”
“맞아. 다만 정신을 차리긴 했어도 몸이 건강한지, 아니면 크게 아픈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
차근차근 단추를 꿰어 가던 천유문이 천상호를 직시했다.
“그가 아직도 궁 안에 있느냐?”
“아닙니다. 반 각 전에 나갔습니다.”
“아기는? 단화린이 데려갔나?”
“그는 아기를 찾지 못했습니다.”
“영선원에 있었지 않느냐?”
천상호가 곤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명 그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습니다. 그 바람에 단화린이 궁주 부인을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궁주 부인을? 그럼 궁주 부인이 아기가 어디 있는지 안단 말이냐?”
“그에 대한 것은 아직 확인해 보지 않았습니다만, 단화린이 궁을 떠날 때의 표정으로 봐서 아기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영선원에도 가 보고 궁주 부인까지 만났는데도 아기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천유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게다가 구양신걸은 그에 대해 알리지 않고 쉬쉬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다는 말인데…….”
“구양 장로에게 명령을 내일 수 있는 사람은 궁주뿐입니다.”
“맞아. 결국 궁주는 아기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아기가 영선원에서 빼돌려진 것도 궁주의 지시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결론을 내린 천유문이 천상호에게 지시를 내렸다.
“종원이에게 알려라. 궁주의 움직임을 잘 살펴보라고 해. 그리고 사람을 보내서 단화린의 움직임을 주시해라. 궁주 쪽에서 눈치챌지 모르니 너무 가까이 붙지는 말고, 멀리서 어디로 가는지만 지켜보라고 해.”
“예, 각주.”
* * *
그날 오전. 서협의 진원보에서 천사교 무리 중 일부가 나섰다.
숫자는 삼백여. 천사교도와 혈문, 마종보 무사들로 이루어진 그들은 내향에서 육십 리 떨어진 성곡진까지 이동했다.
그 소식이 내향에 머물고 있던 연합 세력에 전해진 것은 미시 무렵이었다.
“놈들이 성곡진까지 진출했습니다. 인원은 삼백 명 정도. 고수는 많지 않습니다만…….”
유원당은 잠은각 좌령주 천종원의 보고를 받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탁자 위에 넓은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가로세로 넉 자가량의 종이에는 인근 오백 리 일대의 지리가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성곡진이라고 쓰인 곳에 붉은 돌을 올려놓았다.
그처럼 붉은 돌이 놓인 곳은 모두 네 곳. 그중 성곡진이 제일 가까웠다.
천종원의 보고가 끝나자 유원당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를 끌어내겠다는 생각인 것 같군.”
“그렇다면 일단 지켜보면서 대응해야겠군요.”
“아쉬운 것은 우리에게 그럴 여유가 없다는 거네.”
“하면?”
“놔두면 놈들의 숫자는 점점 불어날 거야. 그러다 코앞에 산이 쌓이면 나중에는 치고 싶어도 칠 수가 없지. 그렇다고 해서 더 물러날 수도 없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수뇌들이 가만있지 못할 거네.”
천종원의 이마에 골이 파였다.
“그럼 함정일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공격해야 한단 말씀입니까?”
“어쩔 수 없지. 단, 공격하되 저들이 원하는 방식을 피해야 할 게야.”
“그나마 방법이 있다니 다행이군요.”
“다행이랄 것도 없네. 내가 선택한 공격 방식을 우리 쪽 수뇌부에서 받아들이면 좋은데 반드시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거든.”
“계책만 탁월하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탁월이라…… 그럴 수도 있긴 한데,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공격 방식이 좀 지저분하네. 아마 싫어하는 분들이 많을 거야.”
“그래도 이길 수만 있다면야…….”
“일반적인 전쟁에서는 승리가 최고의 덕목이지.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강호는 조금 다르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적보다 우리 쪽 수뇌부들의 마음이야.”
정파는 명분을 중요시한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또는 악한 방법을 써서 승리하면 승리하고도 욕을 먹는다.
물론 사악한 천사교를 상대로 하는 싸움인 만큼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다른 때보다는 적겠지만.
그래서 강호의 싸움은 대부분 정면 대결을 선호한다. 심지어 합공하는 것조차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마저 있다. 특히 정파는 더 그렇다.
문제는 유원당이 생각하고 있는 계책이 그러한 싸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어쩔 수가 없었다.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승리해야 했다.
“잔소리를 들어도 내가 나중에 듣겠네. 그렇게 알고, 가서 간부 회의를 소집하게.”
천종원은 새삼스런 눈으로 유원당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군사.”
* * *
연합 세력은 석검장 외에 내향의 작은 장원 두어 곳과 몇 곳의 객잔을 통째로 얻어서 거점으로 정하고는 각 세력별로 기거하게 했다.
잠자리와 식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삼성궁은 내향 외곽의 석검장에 머물고 있었는데, 구양환이 단화린의 등장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것은 그날 신시 초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 시진 후, 두 번째 소식이 전해졌다.
구양환은 북궁천이 백소하까지 다그쳤다는 말을 듣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건방진 놈. 감히 부인을 협박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