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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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0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104화
104화
“협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 하, 하.”
북궁천은 자연스럽게 겸손을 떨며 마주 인사했다.
‘협의’라는 말을 할 때는 입안이 좀 간지러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진 않았는데, 밝혀 봐야 좋을 것 없을 듯해서 보류했다.
“무슨 말씀을? 설아가 다쳤다면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크게 상심하셨을 거요. 우리에게는 은혜를 베푼 셈이오.”
“이번에는 제가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저로선 그것으로 족합니다.”
“신세는 무슨?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말씀하시구려.”
“아닙니다. 이 정도면 됐습니다. 그럼…….”
북궁천이 말을 맺기 직전, 공손설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큰오빠, 아버지는 철웅전(鐵雄殿)에 계세요?”
“계신다. 그러잖아도 네가 왔다는 말씀을 들으시고는 함께 오시겠다고 하셔서 내가 데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했다.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단 공자와 함께 아버님께 가자,”
“제가 좀 바빠서…….”
흠칫한 북궁천이 그의 청을 거부하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손설이 말을 끊었다.
“그래요, 큰오빠. 오빠, 가요.”
“난 갈 길이 바쁜데…….”
“잠깐이면 되는데요, 뭐. 얼굴만 뵙고 가시면 되잖아요?”
공손설이 조금 전 아버지 운운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손후가 그녀가 바라는 바대로 말했다.
“그렇게 하시오. 그냥 가면 아버님께서 많이 서운해하실 거요. 이봐, 조강. 가서 아버님께 설아의 은인이 오셨다고 전하게나.”
북궁천은 공손후가 수하를 보내는 사이, 고개를 돌려서 싱글 생글 웃고 있는 공손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강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눈빛을 대하고도 공손설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이 여시 같은 꼬맹이가!’
“가요, 오빠.”
공손설은 북궁천이 야단치기 전에 후다닥 북궁천의 팔을 잡아끌었다.
북궁천은 자신의 두툼한 팔에 찰싹 달라붙은 공손설을 매몰차게 떼어 놓지도 못했다.
오히려 팔을 통해 느껴지는 뭉클한 감촉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어어, 이, 이거 놓고 가, 꼬맹아.”
“그럼 가는 거죠? 한번 말한 것을 뒤집으면 대협이 아니라는 거…….”
“알았다니까!”
빽, 소리를 내지른 북궁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꼬맹이 가슴이 언제 저렇게 커졌지? 밥 먹고 가슴만 키웠나?’
* * *
북궁천은 일행을 밖에 놔둔 채 혼자서 공손후 등을 따라 철웅전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 안에는 공손무극 외에도 네 사람이 더 있었다.
공손무극의 그림자인 철군쌍영이 그의 뒤에 묵묵히 서 있었고, 오십 대 중반의 중노인과 이십 대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그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공손무극은 공손후, 공손설, 염구악이 키가 큰 청년과 함께 철웅전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는 대화를 멈춘 후 일어나서 반겼다.
그는 나이 육십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위맹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생김새는 공손후와 판박이라 할 정도로 닮았는데, 단지 주름이 많고 머리카락이 반백이란 게 달랐다.
공손후가 먼저 보낸 수하로부터 보고를 받은 그는 인자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인상으로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허, 우리 설아가 침이 마르게 칭찬해서 어떤 젊은이인지 보고 싶었는데, 오늘 원을 이루었구먼.”
북궁천은 공손무극이 조부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처음에는 공손설을 구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겸손해하는 상투적인 인사가 오갔다.
공손무극은 북궁천이 북천궁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었을 텐데도 그다지 거부감이 없는 표정이었다.
북궁천은 일단 단화린으로서 대답했다.
공손설과 염구악 등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으니 속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북궁천임과 동시에 단화린이기도 했으니까.
오히려 그는 그 일보다 아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천사교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공손무극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공손설을 암습했던 그들에 대한 분노가 그대로 느껴졌다.
“감히 설아를 납치하려고 하다니. 내 그놈들을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네.”
헌원려려의 납치를 겪어 본 북궁천이다. 그는 공손무극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런데 공손무극의 말을 듣다 보니 갑자기 헌원려려의 납치와 공손설의 납치에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명화회! 회라는 명칭을 쓸 정도면 셋이 전부는 아니겠지. 호씨 성을 쓴다는 놈도 아직 남았고. 천사교의 주요 인물이 명화회 회원이라면…… 가만, 혹시……?’
그 때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묵묵히 서 있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성주님, 누구신지 궁금하군요. 소생에게도 소개시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이쿠, 내가 깜박했군. 젊은 사람들이니 통하는 면이 있을 텐데 말이야. 인사하게나. 아마 누군지 알면 자네도 놀랄 거네. 허허허허.”
청년이 먼저 포권을 취하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름을 밝혔다.
“화천장(華天莊)의 화운결이라 하오.”
화천장이라면 산서오호의 하나, 태행산 서쪽 양천에 자리 잡고 있는 세력이다. 최근 들어서는 산서오호 중 첫째로 꼽힐 만큼 세력이 커진 곳.
특히 화천장주 화태선의 아들인 화천공자 화운결은 산서의 청년 고수들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세 사람 중 하나다.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북궁천이야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단화린이오.”
북궁천이 자신을 단화린으로 소개하자, 화운결의 표정이 급변했다.
“아! 하남에서 돌풍을 일으켰다는 단 형이었구려. 말씀은 많이 들었소. 이곳에서 만날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그는 경악과 호승심이 뒤섞인 눈빛으로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단화린이 북천궁의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화천장은 산서 정파의 중심 세력 중 하나. 반면 북천궁은 마궁으로 불리는 곳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청년과 나란히 서 있던 중노인이 눈을 가늘게 좁히고 물었다.
“소문으로는 북천궁 사람이라던데, 사실인가?”
북궁천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하남에 간 목적이 검원장의 헌원려려라는 여아를 데려오기 위해서라고 하더군. 천사교와 싸운 것도 협의지심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그 이유 때문이었겠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나는 북천궁을 좋아하지 않네. 그런데 북천궁 사람이 마치 의협지사인 것처럼 소문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억지로 좋게 생각하라고는 안 하니까.”
듣는 사람에 따라 까칠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투.
중노인의 이마에 잡힌 주름이 꿈틀거렸다.
“꽤 건방진 친구군. 이름 좀 얻고 나니 이 목여진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나 보지?”
경천도(驚天刀) 목여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꼽은 산서십대고수 중 하나.
산서제일도를 가리기 위해 세 사람을 먼저 꼽는다면 당연하게 들어가는 이름이다. 또한 화천장의 장로이기도 했다.
공손무극도 그를 존중해 주었기에 가만 놔두었다. 한편으로는 단화린이 어떻게 대응하는가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분위기만 가라앉자 눈살을 찌푸리며 나섰다.
“어허, 목 장로. 단 소협은 설아를 구해 준 은인이네. 자네가 그러면 내 체면이 뭐가 되는가?”
목여진이 아무리 이름 날린 고수라 해도 감히 공손무극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성주. 제가 북천궁과 조금 좋지 않은 과거가 있다 보니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공손무극이 이번에는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이해하도록 하게. 이십여 년 전의 일을 아직 잊지 못한 모양이네.”
북궁천은 더 짜증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작별을 고했다.
“성주, 제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허어, 이거 아쉽구먼.”
“오래지 않아 다시 찾아와야 하니 그때 뵙지요.”
“바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그때는 며칠 머물다 가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북궁천은 일단 그렇게 대답하고 예를 취했다.
그러고는 공손설을 돌아보고 눈을 부라렸다.
‘너 때문에 시간만 보내고 이게 뭐냐?’
그래도 공손설은 배시시 웃어서 북궁천을 맥 빠지게 했다.
“나가요, 오빠. 아버지, 오빠 배웅해 드리고 올게요.”
공손무극은 몇 달 만에 돌아온 딸이 얼굴 잠깐 보고 북궁천을 따라 나가자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 허어, 저 녀석. 그렇게 좋은가? 저러다 저 친구에게 시집가겠다고 하겠군.”
막 전각을 나서던 북궁천이 그 말을 듣고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했다.
‘저 양반이 벌써 노망들었나?’
공손후는 전각문이 완전히 닫힌 후에야 공손무극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아버님?”
“뭔가 묘한 느낌이 드는 젊은이야.”
“단화린의 일행들 역시 모두 젊은데 범상치 않은 자들입니다.”
“흠, 그래?”
공손무극은 아들을 안다. 아들은 말을 허투루 하지 않는 성격이다.
아들 입에서 범상치 않은 자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단순한 절정고수의 단계를 넘어섰다는 뜻.
‘그런 자들을 수하로 거느릴 정도라면…… 설마?’
그의 눈빛이 빛나자 염구악이 전음으로 말했다.
―형님, 저 목가와 화가 애송이가 간 다음에 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손무극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가라앉았다.
그 때 목여진과 화운결이 그를 향해 예를 취했다.
“저희도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주님의 말씀, 장주께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게. 불손한 자들이 산서를 어지럽히는 꼴은 힘을 합쳐서 막아야 하지 않겠나?”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장주님께서 제안하신 것도 숙고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손무극의 노안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워낙 짧은 순간이어서 눈치챈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하지.”
한편, 밖으로 나와서 일행들과 합류한 북궁천은 공손설을 다그쳤다.
“인마, 내가 왜 그딴 자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냐?”
“목 대협이 있는 줄 누가 알았어요?”
“좌우간 허튼짓 말고 려려나 잘 돌보고 있어.”
“알았어요, 오빠아아아.”
공손설이 아양 부리듯 말하며 웃자, 북궁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휴, 내가 너 때문에 정말 미치지 미쳐. 그런데 이런 꼬맹이에게 시집 운운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야?”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야!’
그런 표정을 지은 채.
* * *
철군성을 나선 북궁천 일행은 남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런데 십 리쯤 지나 야산을 하나 넘었을 때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단 형! 잠깐만 멈춰 보시오!”
화운결의 목소리였다.
북궁천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자신들이 지나온 야산을 화운결이 일행과 함께 넘어오고 있었다.
모두 이십여 명. 그들은 빠르게 달려서 북궁천 일행과 가까워졌다.
북궁천은 그들이 삼 장 거리를 두고 멈춰 선 후에야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무슨 일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