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정록 9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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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무료소설 조회 1,133회 작성일소설 읽기 : 마정록 91화
91화
“에이, 대형을 어떻게 북천마제와 비교…….”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말하던 황보청이 뒷말을 흐렸다.
갑자기 방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종리기진도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반쯤 벌리고 있고, 이정한 등도 넋이 빠진 모습이었다.
셋을 셀 시간이 지난 후에야 황보청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마, 맙소사! 그, 그럼 대형이……!”
“다른 사람에겐 말하지 마. 괜히 자네들만 험한 꼴 당할지 모르니까. 정파의 자제가 마제의 동생이라고 하면 손가락질할 것 아닌가?”
황보청은 대답할 정신도 없는 듯 눈만 왕방울만 하게 뜨고 북궁천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다 됐군. 그럼 포악한 우형은 이만 가 보겠네. 정한, 가자.”
북궁천은 공손설과 약속한 이각이 흐르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우르르 북궁천을 따라나섰다.
“따라올 필요 없다니까?”
“상남까지만 함께 가겠습니다.”
곧바로 헤어지는 게 아쉬운 황보청은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북궁천도 그것까지는 마다하지 않았다.
* * *
구양환은 한 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북궁천 일행이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놈, 지금은 마음껏 즐겨라. 곧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
그 때 사용화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궁주, 선우중이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구양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래? 신도가와 비룡가의 가주들에게도 전해졌느냐?”
“방금 전 방을 나와 뇌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럼 나도 가 봐야겠군.”
구양환은 냉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북궁천은 밝은 표정으로 철은보의 정문을 통과했다.
바람이 그 어느 때보다 시원했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
아버지도 어머니를 얻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흠, 오늘은 날씨가 좋군.’
하지만 그도 잠시.
“오빠, 같이 가요!”
공손설의 맑은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갑자기 바람에 먼지가 섞인 듯 입안이 텁텁했다. 손안에 다 들어온 떡을 빼앗긴 기분.
‘모래바람이나 안 불면 다행이겠군.’
그는 속으로 투덜대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뒤를 바라보았다.
공손설이 염구악과 능소소, 엽청문과 함께 달리듯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는 좋겠군.’
보지 않아도 눈에 훤했다. 지금쯤 이정한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을 것이 뻔했다.
그 때 바짝 다가온 공손설이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오빠, 여행하기에는 정말 좋은 날씨예요.”
‘좋기는 개뿔이나.’
속으로 투덜거린 북궁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언제 변덕 부릴지 모르니까 빨리 가자.”
그러고는 철은보 안쪽 깊숙한 곳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사공강후는 대연무장 한쪽에서 북궁천 일행이 나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놓은 사람이 떠나고 있었다.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예상보다 빠른 헤어짐이었다.
‘오늘은 그냥 보내지만, 다음에는 절대 그냥 보내지 않을 거요.’
오늘의 이별이 영원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순순히 보내 주기로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산은 높고 컸다. 현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넘을 수 없을 듯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러란 법은 없었다. 전심전력으로 갈고닦다 보면 언젠가는 벽을 넘을 수 있을 것이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보기를 바라겠소.’
사공강후는 북궁천과 시선이 마주치자 슬쩍 공수의 예를 취해서 환송했다. 그리고 북궁천 일행이 멀어져 가자 뒤돌아섰다.
그 때 그를 향해 천무회의 무사 하나가 뛰어왔다.
“소회주!”
“무슨 일이오?”
“선우중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 * *
북궁천 일행이 상남에 도착하자, 이조량이 그들을 맞이했다.
“소저는 북쪽 관도 끝에 계십니다, 대형.”
북궁천은 고개를 돌리고 황보청과 종리기진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가 봐.”
황보청과 종리기진은 아쉬움을 접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대형.”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아우들을 만나서 즐거웠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럼 다음에 보자고.”
북궁천은 조금도 아쉽지 않은지 그렇게만 말하고 몸을 돌렸다.
황보청과 종리기진은 한참 동안 서서 북궁천 일행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편, 공손설은 채 열 걸음 걷기도 전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북궁천에게 물었다.
“북쪽 관도 끝에 있다는 소저가 누구예요?”
“이 오빠의 부인 될 사람.”
움찔한 공손설의 걸음이 흐트러졌다.
충격을 받았는지 뺨에서는 핏기가 사라지고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북궁천의 곁에 바짝 붙어서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까지 그런 말씀 없었잖아요.”
“내가 왜 그런 것까지 너에게 다 알려 줘야 되지?”
“동생에게 그런 말 좀 해 주면 안 돼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이 꼬맹아.”
공손설이 입술을 삐죽이며 툭 쏘아붙였다.
“저 꼬맹이 아니거든요?”
“열여섯이면 꼬맹이지, 어른이냐?”
“이제 열일곱 돼요. 제 나이에 시집가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푸하! 열여섯이나 열일곱이나. 꼬마 계집애가 뭘 안다고. 안 그래, 호량?”
헛웃음을 지은 북궁천이 동호량에게 물었다.
동호량은 북궁천이 북천마제라는 걸 안 후로 입을 여는 게 두려웠다.
하지만 다 아는 사실을 거짓으로 말할 순 없었다.
“저, 대형. 열여섯, 열일곱이면 알 것 다 압니다. 그 나이에 혼인하는 여자들이 많아서 미리 가르쳐 주거든요.”
“안다고? 무슨 소리야? 나는 스무 살이 넘도록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는 조부 때문에 남녀 관계라는 것을 알 겨를도 없었다.
오직 패왕이 되는 걸 목표로 수련에 수련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궁주가 되고, 싸우기 위해 밖으로만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것은 북궁천이 비정상이었다.
동호량은 그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했다.
“공손 소저가 빠른 게 아니라, 대형이 늦은 겁니다.”
북궁천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무뚝뚝해서 말이 별로 없는 초강도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한은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별수 없이 이조량에게 물었다.
“조량,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죄송합니다, 대형. 저는 아버지와 함께 산골에서만 살아서 그런 것을 잘 모릅니다.”
북궁천은 이조량마저 도움이 안 되자, 한쪽에서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힐끔거리는 염구악에게 물었다.
“노인장은 어떻게 생각하쇼?”
염구악이 혀를 찰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도 모르냐? 설아가 좋아해서 똑똑한 놈인 줄 알았더니, 허우대만 컸지 속은 비었나 보군.”
앙심을 가진 그에게 물어본 게 실수였다.
은근히 기분이 상한 북궁천도 한마디 쏘아붙였다.
“모를 수도 있지, 인상은 왜 쓰는 거요? 그게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어이가 없어서 그런다. 왜, 기분 나쁘냐?”
“됐습니다. 오래 살지도 못할 노인네와 싸워 봐야 남들이 나만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내가 참지요.”
“뭐? 오래 살지 못해? 내가 얼마나 살지 네놈이 어떻게 알아?”
“하는 꼴 보니까 얼마 못 갈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불만이면 오래 살아서 복수하쇼.”
“이놈이 어디서!”
이전의 일 때문에 시비를 자제했다. 그런데 어린놈이 노인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더 참을 수 없었다.
“오냐, 어디 누가 먼저 죽는가 한번 해보자, 이놈!”
염구악이 팔을 걷어붙이고 당장 싸울 것처럼 눈을 치켜뜨자 결국 공손설이 한숨 쉴 것 같은 표정으로 나섰다.
“숙부님이 참으세요.”
“저놈 하는 말을 너도 들었지 않느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철군성까지 가려면 아직 며칠을 더 가야 하고요.”
염구악은 공손설의 말에 마지못한 표정으로 분노를 거두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한 소리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전의 일 때문에 찜찜했다.
일을 키웠다가 거꾸로 당하기라도 하면 무슨 창피란 말인가?
“험! 네가 그리 말하니 참긴 하겠다만,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이면 그땐 참지 않을 것이니라.”
그런데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아서 어느덧 관도 끝이 저만치 보였다.
이조량이 분위기도 바꿀 겸 재빨리 나서서 말했다.
“대형, 저깁니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 마차 한 대가 호위를 받으며 서 있었다.
북궁천이 언제 다투었냐는 듯 환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공손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가고, 다른 사람들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그녀를 살피며 뒤따라갔다.
북궁천은 헌원려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래 기다렸나 보군.”
“아니에요,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북궁천의 눈이 호위무사들을 향했다.
포원산장의 무사들은 헌원려려와 이조량에게 미리 말을 들었음에도 왠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더구나 철군성의 사람들까지 합류하자 반발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북궁천은 그들에 대해서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따라가지 않는다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무 걱정 마쇼. 당신들에게 해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호위무사들에게 위로도 아닌 위로를 한 북궁천은 공손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꼬맹아, 너도 마차에 타라. 려려, 철군성의 꼬맹이와 함께 타고 가도 괜찮겠지?”
“그럼요, 태우세요.”
“뭐 해? 어서…….”
북궁천이 재촉하기도 전에 공손설이 뛰어들 듯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꼬마라 마차 타고 가는 게 좋긴 좋은가 보네.”
북궁천은 공손설의 의도를 눈곱만치도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그녀를 꼬마 취급했다.
“자, 출발합시다.”
7장. 그대들은 이제부터 기도해야 할 것이다!
상남을 빠져나온 마차는 포원산장으로 가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다.
북궁천은 바람이 다시 상쾌하게 느껴졌다.
바로 옆 마차에 헌원려려가 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오 리쯤 갔을 때 그 좋던 기분이 불쾌함으로 변했다.
언뜻 봐도 오십여 명은 될 법한 사람들이 남쪽 언덕을 넘어서 날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구양환이 선두에서 몸을 날리고, 그 좌우에 삼성궁의 주요 인사들과 무림맹의 장로들, 강호의 명숙 등 철은보에 남았던 고수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똑바로 달려오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자신이 목표인 듯했다.
“멈춰라!”
냉랭한 목소리가 겨울 하늘을 울렸다.
마차를 몰던 포원산장의 무사들은 반사적으로 고삐를 잡아챘다.
북궁천은 사오 장 정도 더 걸어간 다음 걸음을 멈췄다.
순식간에 오 장 거리까지 다가온 군웅들은 북궁천을 포위하듯이 반원으로 둘러쌌다.
북궁천은 그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십여 명 중에는 구양환을 비롯한 삼성궁의 세 가주와 등조립 등 자신이 보기에도 능히 고수라 불릴 수 있는 자들이 십여 명은 되었다.
시선을 구양환에게서 멈춘 그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구양환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냉랭히 말했다.
“단화린, 너에게 두어 가지 물을 게 있다. 솔직히 대답하지 않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